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종교와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선 목회자

‘김병조 선생’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대한독립을 외친 일재(一齋) 김병조 선생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종교와 교육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으로 국권 회복을 모색한 김병조 선생은 상해 임시의정원 평안도 대표를 역임하고, 항일 역사서 출간에 힘쓰면서 그 누구보다 대한독립의 열망을 뜨겁게 불태운 독립운동가이자 목회자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민족대표 48인(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
3·1 만세 운동 추진에 뜻을 모으다

평안북도 정주군 동주면에서 태어난 김병조는 여섯 살 때 향리에 입학해 한학을 익혔다. 1897년부터 서당을 열고 훈장이 되었는데 애국계몽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1903년부터 변산동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 초등학교로 만들었다. 그는 1909년 기독교 장로회 신자가 되었으며, 191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조선예수교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자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1919년 2월, 김병조는 유여대, 장덕로, 김승만 목사 등과 함께 선천지역에 있는 양전백 목사 사택을 방문했다. 기독교 목사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근처에 왔다가 양전백 목사의 집을 들렀는데 이곳에서 남강 이승훈을 만났다.
남강 이승훈은 김병조를 비롯해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목사에게 3·1 만세 운동 거사 계획을 들려주었다. 김병조가 거사 계획을 들은 당시에는 이미 이승훈을 비롯한 기독교 인사들과 천도교 지도자들이 연대에 합의한 후였다. 단순히 기획 단계의 계획이 아니었다. 거사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김병조를 포함한 위 4인은 종교인이자 민족 동포의 한 사람으로서 3·1 만세 운동 거사에 동참할 것을 약조했다.
김병조는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외치기 전, 만세 시위 동참을 권하는 ‘격고아한동포문(檄告我韓同胞文)’을 제작해 배부했고, 3월 1일 당일 평안북도 여러 지방을 다니며 만세 시위를 전파했으며, 현장에서 민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당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있지 않았고 그곳에서 기미독립선언서 낭독을 함께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김병조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다. 슬프다. 우리 팔도의 동포여! 깊은 잠에 빠져 있음을 크게 뉘우칠 지어다. 하늘의 모습을 우러러 보아라, 동방의 밝은 별이 이미 밝았다. 시국의 형편을 두루 살펴보아라, 집집마다 경종이 스스로 울리니 휘날리는 태극기는 제군들의 조국정신을 활발하게 하고, 열렬한 만세소리는 제군들의 일체 생명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하도다. - 격고아한동포문 뒤이어 3월 7일, 김병조는 친일파 관리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경고관헌문(警告官憲文)’을 만들어 배포했는데 그 내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에도 게재되었다. 이르노니 너희 조선인으로 왜놈의 관리된 자야 양심에 따라 스스로 반성하라. (중략) 의를 의지하고 일어선 2000만 민족이 모두 너희들을 쳐죽일 생각임을 모르는가. 아니면 절개를 지키며 숨져간 30만 충령이 이미 너희를 죽이기로 한 결정을 모르는가. 위로는 하늘이 두렵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이 부끄럽지 않느냐. 너희 할애비 너희 애비의 피가 과연 네 골수에 흐르고, 충이니 의이니 하는 마음이 아직도 네 마음속에 남았거든 북을 치고 공격할 때를 기다리지 말고 힘을 내어 무기를 거꾸로 들고 돌이켜 길을 바꿈으로써 크게 후회하는데 이르지 않도록 하여라. - 경고관헌문

(왼쪽)1919년 6월 17일 설립한 임시사료편찬회(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 관한 사료를 수집·정리·편찬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위원들(앞줄 맨 오른쪽이 김병조 선생) (오른쪽)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편찬한 한일관계사료집
태화관에서의 독립선언식 그리고 3·1 만세운동

우리는 물었어야 한다. 왜 하필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했을까? 민족대표 33인이 전부 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마지막 거사 전 좋은 술 한 잔을 마시고 싶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왜 하필 태화관이었을까?
조선 24대 왕 헌종은 자신의 후궁들이 머무는 사당을 지었다. 이는 태화관의 시작이었다. 그러다 이곳이 을사오적(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을사늑약 당시 찬성을 표시했던 정부대신 5명을 말함) 중 한 명인 이완용에게 넘어갔고, 1907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했던 대한제국의 백성들, 우리 선조들은 이완용의 집을 불태운다.
이완용이 집을 잃자 일제는 태화관 사당을 개조해 별장을 꾸미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태화관은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들의 주요 모임 공간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총리대신으로서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일본 정치가)와 을사늑약을 체결하기 위해 사전 회의를 수도 없이 거친 곳도 바로 태화관이었다. 즉, 태화관은 매국과 친일의 근거지였다. 민족대표들은 ‘악의 근원지’를 정화, 정명하기 위해 악의 근원지, 악의 중심으로 들어가 목이 터져라 독립선언문을 외쳐 민족정기를 바로 잡으려 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태화관은 친일파들의 주요 거점이었기에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그것이 태화관이 독립선언식의 거점 장소로 최종 결정된 이유다. 결과적으로 일제는 독립선언서 낭독을 문제 삼아 태화관을 폐쇄했고, 1921년부터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종교 활동을 전파하는 포교 장소로 활용되다 1930년대에는 감리교 여성 복지기관으로 변했다. 당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화관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갈 때, 누군가는 현장에서 민중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는 사실에 후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더 알려져야 하는 인물이 아닌지’, ‘목회자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민족대표 33인 중 김병조는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고 상하이로 간신히 망명에 성공했다.
그 후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설립된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임시의정원 평안도 지역 대표와 선전위원회 이사를 역임했다. 당시 김병조는 임시정부에서 사료편찬 위원으로 일을 하며 1924년 「대동역사」, 「독립혈사」를 발간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독립운동 활동을 지속했으나, 여전히 목회 활동을 병행했다. 그에게 기독교 신앙은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신념 그 자체였다.

해방 후 김병조 선생이 소련군에 피검된 사실을 보도한 자료(현대일보 1947년 03월 19일자)
김병조 선생의 둘째 아들 김행식 목사
끝나지 않은 이야기, 김병조의 친손녀를 만나다

2019년 9월, 필자는 김병조의 친손녀인 김영옥 씨를 만났다. 김영옥 씨는 허심탄회하게 할아버지와 아버지(김병조의 둘째 아들 김행식 목사)는 독립운동가로서는 훌륭한 인물이었으나, 가족에게는 0점짜리 분들이었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선택’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삶. 그 누구도 알아주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던 그들의 선택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오랜 시간 동안 후손들은 김병조가 북한에서 사형됐거나 6·25 전쟁 기간 피살된 줄로만 알고 살았으나, 시베리아에서 옥사하시고 바이칼 호수 어딘가에 유해가 묻혀있다는 말은 큰 아픔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후손은 유해라도 모셨으면 원이 없겠다는 마음이었다. 쉽게 가늠하기도 어려운 수많은 세월 속의 서운함, 서러움, 아픔은 말로 전달이 어려웠다. 후손은 한동안 그렇게 말을 잇지 못했다.

김병조(金秉祚)선생
(1877.1.10.~1952)
-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교육자
-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임시사료 편찬위원회 위원
-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방선전부 이사
- 1921년 국민대표회기성회 조직위원
- 1922년 상하이 인성학교 교사
-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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