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일제의 심장을 저격한
열혈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

강한 독립 의지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는 어렵고 불우한 시대를 신념과 행동으로 돌파하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윤봉길·백정기 의사와 함께 ‘3의사’로 불리며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이 여전히 독립을 원하고 있다는 의지를 널리 알리며 불꽃처럼 살다간 이봉창 의사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가슴에 혼으로 살아 숨 쉰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품고 일본으로

이봉창은 1901년 한성 원정(서울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세에 용산 문창보통학교에 입학해 13세에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19세에 용산역 만선철도의 기차운전 견습생으로 입소했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 1년 만에 그만두게 되고, 1924년 가난에서 벗어나 성공하려는 뜻을 품고 일본에 건너갈 때까지 집안일을 도왔다.
큰형 이범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은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원으로 일했다. 정세를 살피던 그는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오사카 등지를 전전하며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 잡역부 등으로 직업을 바꿔가며 생계를 이어갔다.

독립운동 암흑기에 불태운 애국정신

1931년 1월, 중국 상해의 날씨는 유난히 추웠고 중국 전체에 퍼져있던 반제국주의, 시민혁명, 항일운동의 열기도 식어갔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운동에 어려움을 겪으며 침체되어 있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밀정(남몰래 사정을 살피는 사람, 스파이)으로 변해 동지를 팔아넘기면서 그야말로 독립운동의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다.
과거 서울 용산철도국에 근무하면서부터 이봉창은 일제의 극심한 착취에 분개하며 일본에 대한 복수와 혁명, 조국 해방투쟁을 염원했고, 이는 항일정신으로 이어졌다. 이봉창은 1931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기 위해 애국지사가 가장 많이 모여있는 상해로 건너갔다. 도착 후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 운동에 참여하겠다는 큰 뜻을 밝혔으나 민단 간부들은 그의 행색이 수상해 이를 믿지 않고 일제의 밀정으로 오해했다. 당시 이봉창은 일본 기모노에 게다(일본 나막신)를 신고 있었고, 이봉창을 처음 본 김구는 이후 그의 동태를 유심히 관찰했다. ‘상하이 양수포(楊樹浦) 소재 일본인 인쇄소의 점원, 나이 31세.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으며 일본 노래를 부름.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이봉창의 모습이었다. 김구는 임시정부 사무원인 김동우를 시켜 이후로도 그를 면밀히 살펴보게 했다.

이봉창 의사
김구와 한마음 한뜻으로

그러던 어느 날 이봉창이 취중에 민단사무실로 찾아와 ‘독립운동을 한다는 당신들이 왜 일왕을 죽이지 않느냐’며 민단사무원들을 크게 힐책했다. 그러자 민단사무원 한 명이 ‘일개 문관이나 무관 하나도 죽이기 어려운데, 엄청난 존재인 일왕을 어찌 죽이겠는가’하고 의아해했다.
이봉창은 ‘작년에 일왕이 능행하는 것을 길가에 엎드려 보았는데 그때 폭발탄 한 개만 손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일왕을 죽일 수 있었겠다고 생각하면서 한탄했다’ 고 말했으며, 이를 들은 김구는 그날 밤 이봉창을 찾아가 그의 심중을 떠봤는데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 (聖業)을 완수하게 해 주십시오.” 이봉창의 신념과 굳은 의지, 깊은 애국심을 간파한 김구는 비로소 그를 신임 하게 됐고, 거사를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밀회하며 실행 방법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윽고 일왕을 저격하기 위한 최종 계획을 김구와 함께 세웠으나 자금이 조달되지 않아 이봉창은 월급 80원으로 일본의 인쇄소 직공, 악기점 점원으로 일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한편, 김구는 자금 조달에 온갖 힘을 다해 1931년 말에 마침내 미국 교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

이봉창 의사가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 양손에 수류탄 두 개를 들고 태극기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 저격을 선서하는 이봉창 의사(1931년)
거사 그리고 영원한 작별

김구는 중국군 대령으로 있던 김홍일에게 부탁해 상해 병공창(무기공장)에서 수류탄 한 개를 구매했고, 하남성의 중국인 유지로부터 수류탄 한 개를 더 구매한 뒤 이봉창에게 연락했다. 이를 들은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 잠입할 계획을 세웠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은 수류탄 2개와 김구로부터 받은 자금 300원을 가지고, 안공근(안중근 의사 막냇동생) 집에서 양손에 두 개의 수류탄을 들고 거사 직전 선서식을 거행했다. “나는 적성(赤誠,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선서를 끝낸 이봉창은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그는 “내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말했다. 무사히 도쿄에 도착한 이봉창은 거사 일정에 관해 상해에 있는 김구에게 암호를 보냈다.
‘물품은 1월 8일에 방매함.’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뜻이었다. 1월 8일은 일왕 히로히토가 괴뢰국(다른 나라의 지배 하에 있는 나라)인 만주국 황제 부의와 함께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군대를 사열하는 의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이봉창은 관병식을 끝내고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왕을 기다려 수류탄을 던졌다. 굉장한 폭음과 함께 수류탄이 폭발했으나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는 관계로 명중하지 못했고, 이때 이봉창 앞에 있던 사람을 범인으로 오인해 일본 경찰이 검거 및 구타를 시작하자, 이봉창은 내가 던졌다며 스스로 자수했다. 이봉창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도쿄의 이치가야 형무소에 수감됐다. 형무소에 수용된 지 9개월이 지난 1932년 10월, 비공개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봉창은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봉창 의사 수감카드(왼쪽) 와이봉창 의거 현장(오른쪽)
독립운동의 불씨를 지피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 즉,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 명중시키지 못하였다”라고 보도해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했다. 이 보도에 대한 파문은 엄청났다. 중국 남동의 복주(룽청)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해 파괴했고, 이봉창 기사를 쓴 중국 신문사들은 모두 폐쇄되고 말았다.
한편, 이봉창 의거가 일어난 시점의 일본은 새로운 내각이 출범한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일본 내부의 정치적 혼란은 상상을 초월했다. 새로 구성된 내각은 중의원을 해산했고, 극우 세력인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수상이 암살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결국, 일본의 정당정치는 붕괴되었고 극우 세력 군부가 등장해 국권을 좌우했다.
이봉창의 의거는 결코 ‘실패’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와 같은 한인애국단 소속이었던 청년 윤봉길에게 그의 의지가 이어져 석 달 뒤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폭사시켰고, 뒤이어 이덕주, 유진식, 류상근, 최흥식 등 여러 청년 동지들의 의혈 활동이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1946년 6월 15일, 백범 김구를 비롯해 5천여 명의 학생,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세 명의 독립운동가 추도식이 엄숙히 거행됐다. 이후 6월 30일에는 1백여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민장이 열렸으며, 효창공원 묘역에 봉안됐다.

이봉창 의거 관련 중국·일본신문 보도자료(1932년 1월) 3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묘 참배 1932년 9월 30일자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실린 이봉창 의사의 사진
이봉창(李奉昌) 의사 (1901.8.10. ~ 1932.10.10.)
- 독립운동가
- 1931년 한인애국단 입단
- 1932년 일왕에게 수류탄 투척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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