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대한 독립을 향한
선구적 삶의 불꽃을 지핀,

‘김마리아 열사’

일제에 맞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신여성이었던 김마리아. 그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들여와 교육·종교계 지도자들에게 전달해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공헌했다. 오직 대한 독립만을 꿈꿨던 김마리아는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여권 신장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지도자이자 애국지사였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7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김마리아(金瑪利亞) 열사(1892.6.18. ~ 1944.3.13.)
- 독립운동가
- 1919년 2·8 독립선언 및 3‧1운동에 가담
- 1919년 9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추대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애국지사들에게 둘러싸여 보낸 유년기

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세 자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마리아는 그의 세례명이자 이름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친이 직접 지어주었다.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한 뒤 송천리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운 교육자이자 자본가였다. 김마리아의 집안을 살펴보면, 첫째 삼촌 김용순은 1902년경 백범이 여옥이라는 처자와 혼약을 맺었으나, 여옥이 죽자 백범이 장례를 치르고 여옥의 어머니를 김용순에게 부탁할 정도로 백범 김구와 절친한 사이였다. 셋째 삼촌은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필순이고, 셋째 고모는 김규식의 부인으로 상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순애였다. 김순애는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의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다. 막내 고모 김필례는 신간회의 자매단체였던 근우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고 형부인 남궁혁도 독립운동가였다. 첫째 고모인 김구례는 신한청년당의 당수를 맡았던 독립운동가 서병호와 부부 사이다. 서병호는 임시정부에서도 활동했다. 이토록 애국지사들이 가득한 집안에서 김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해갔다.

1925년 미국에서 김마리아 열사, 안창호 선생, 독립운동가 차경신 선생이 함께 있는 모습(맨 왼쪽부터)
전 세계에 독립열망과 의지를 공표하기 위한 노력

김마리아는 3세였던 1895년에 아버지를, 13세였던 1905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대학공부까지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그는 1906년부터 숙부 김용순과 김필순이 있는 서울로 이주해 이들과 함께 지냈다. 곧 이화학당에 입학했으나 2주 만에 자퇴하고 연동여학교(지금의 정신여자중학교)로 진학해 언니, 고모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김마리아는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노백린 장군(The-K 매거진 21년 4월호 참고)의 딸 노숙경, 노순경,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딸 이의순, 이인순과 함께 공부했다.
1910년 6월 16일 그는 광주광역시 수피아여고 교사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2년간 교사로 재직한 뒤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여학교에서 1년 동안 유학했고 다시 국내로 돌아와 모교 연동여학교에서 교사 활동을 시작했다. 김마리아는 1915년 동경여자대학에 유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이때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1915년 4월 김필례(김마리아 고모), 최숙자, 나혜석 등이 모여 조직한 친목단체였다. 김마리아는 조국광복을 위해 일신을 바치겠다는 굳은 의지로 세운 이 단체의 대표로 1919년 동경에서 거행된 2·8 독립선언식에 참여했고, 선언식이 끝난 후 2·8 독립선언의 상황을 국내에 전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자 국내로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김마리아는 일본 여인으로 변장하고 기모노를 입은 뒤 허리띠 속 미농지에 베껴 쓴 2·8 독립선언서를 숨겨 국내로 들어오는 데 성공한다. 귀국 후 대구·광주·서울·황해도 일대에서 독립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여성계에서도 조직적 궐기를 서둘러야 한다며 3·1운동 사전 준비에 사력을 다했다. 이후 3·1운동에 여성들이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이렇듯 목숨 걸고 국내에까지 소식을 전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주체로 대규모 시위에 앞장서다

1919년 2월 21일 서울에 도착한 김마리아는 2월 26일 천도교 민족지도자 이종일과 만나 3·1운동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김마리아는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에 가서 독립운동 동지 규합과 자금 모집에 힘썼는데 3·1운동이 발발하자 급히 서울로 돌아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 2일과 4일 정동교회와 이화학당 기숙사에 나혜석, 박인덕 등 10여 명의 여학생과 3·1운동에 대한 이후 대응책을 논의했다. 3월 2일 회의에서는 첫째, 부인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할 것, 둘째, 여성단체와 남성단체 사이에 연락을 취할 것, 셋째, 남성단체에서 활동할 수 없을 때는 여성단체가 그것을 대신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3월 5일에는 정신, 이화, 진명 등 서울 시내 여학교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다음날 김마리아는 이 모든 시위의 주동자, 총 책임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체포됐다. 이때 일제는 김마리아를 잔인하게 고문했으나, 결국 5개월 뒤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가 조직되고 국내와의 긴밀한 협력 활동이 필요해 조직망의 확충이 절실한 과제로 요구됐는데 이 역할을 김마리아가 수행했다. 독립운동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전국적 조직망이 있었던 ‘혈성단애국부인회’와 임정 산하 여성조직이 흡수·통합되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이하 ‘애국부인회’)가 만들어졌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검거 사실을 보도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자
모진 고문에도 독립을 외친 항일 투사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하였거니와…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김마리아가 1919년 9월 1일 작성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취지서 일부 김마리아는 같은 해 10월 19일, 기존 조직을 개편하여 전국 각도에 지부를 두고 대대적으로 회원을 모아 독립운동에 진력할 것을 결의했다. 그는 직접 애국부인회 취지문을 작성하고 “유무식을 막론하고 빈부귀천 차별 없이 이기심을 다 버리고 ‘국권 확장’ 네 글자만 굳건한 목적으로 삼고 성공할 줄 확신하며, 장애물에 개의치 말고 더욱 진력하며 일심 합력하자”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1919년 11월 1일 임정 대통령 이승만 앞으로 군자금 2천원과 애국부인회 취지서를 송부했다. 그러나 이렇게 임정과 애국부인회가 서로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준비해가고 있을 무렵, 동지였던 오현주의 배신으로 1919년 11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맞게 됐다.
오현주는 남편의 강압에 못 이겨 애국부인회 서기 김영순에게 회원 명단과 회칙을 받아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에게 제공했으며, 이로 인해 오현주만 실형언도를 면하고 정보 제공의 대가로 거금을 받았다는 사실이 훗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1949년 3월 28일) 기록에서 확인됐다.
김마리아는 1919년 11월 28일 연동여학교에서 김순영, 장선희, 신의경과 함께 체포됐으며, 다음날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됐다. 전국에서 체포된 애국부인회 임원 및 회원 중 52명이 심문을 받았는데 이 중 김마리아를 포함한 9명만 대구교도소로 송치됐다. 당시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 회장이었고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에 그에겐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일제는 그를 통해서 애국부인회와 청년외교단과의 관계 및 임정의 국내조직 연계 상황과 대한적십자회 대한지부의 현황 및 설립 목적 등에 대해 명확하게 파악해내려 했기 때문에 그 고문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때 놀라운 것은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마리아는 결코 일제에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제는 학문적으로 우수했던 김마리아의 이력을 보며 일부러 머리를 심하게 구타했고, 결국 그는 코뼈 속에 고름이 생기는 고질병에 걸려 출소 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고문으로 인해 한쪽 가슴을 도려내기까지 했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 기록된 김마리아 열사 일본 유학시절, 혼자 한복을 입고 있는 김마리아 열사
광복의 꿈을 향한 끝없는 노력

대구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나던 때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철창 속에 외로이 지내다 무정하고 야속한 병마가 거듭되어 대구병원에 누워 영면만 기다리고 있다는 기사가 계속 보도됐다. 김마리아는 이후 서울 성북동 보문암에서 요양하다 변장으로 인천을 탈출하여 상해로 망명했다. 임정 요원들은 김마리아를 극진히 간호했으며, 차츰 건강을 회복한 그는 기독교계 사립대학인 남경 금릉대학에 입학해 학업에 정진했다. 그는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김마리아는 파크대학,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황에스터·박인덕 등 8명의 옛 동지들을 만나 여성독립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추대된 뒤 재미 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이와 함께 안창호와 흥사단에서 활동하던 중 1931년 5월 형기가 만료되자, 1932년 7월 20일경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로 장로교 교단의 여전도회에서 활동했는데,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44년 3월 13일, 광복을 1년 앞두고 사망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법정 공판 내용을 다룬 「동아일보」 1920년 6월 9일자 대구교도소 출옥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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