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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2 Vol.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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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


교단을 내려오니 문단이다. 교사라는 명찰을 떼니 ‘이발사’다. 그리고 여전히 이정록이다. 시인이자 교사였던 이정록 회원이 퇴직 후 시인이자 이발사가 되었다. 그러나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여전히 그에게는 머리가 아닌 마음을 내주어야 한다.

이성미 / 사진 이용기

※ 모든 인터뷰 및 사진 촬영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해서 진행했습니다.

‘교단’이라는 무대에서 ‘세상’이라는 무대로

충남 천안시 불당동에 자리한 신불당아트센터 3층에 이발소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머리를 다듬을 요량으로 길을 나서면 곤란하다. 들여다보면, 원고지 모양 현판 안에 ‘이정록 시인의 이발소(이야기발명연구소)’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이발소는 시인 이정록 회원이 명예퇴직 후 출근하는 새로운 창작소다.
“정년보다 조금 일찍 떠난 이유는 더 나은 교사가 될 자신이 없었어요. 스스로 내가 나를 쫓아내는 느낌이 들기 전에, 더 잘할 수 있는 작가의 길에 전념하고 싶었지요. 퇴직 소감을 말하자면, 한마디로 홀가분합니다. 언젠가는 그만두어야 할 일이잖아요? 당연히 제가 떠난 자리에 젊은 선생님이 들어오셨겠죠. 그것 하나는 교직에 이바지한 것 같습니다. (웃음)”
교직 첫 장은 1985년 3월 광천중학교에서 시작한다. “좋은 교사, 좋은 시인이 되겠다”라고 다짐했으나 ‘새마을과’에서 빈 병 모으고, 쓰레기장을 관리하고, 환경 정리와 화단 가꾸기, 교문 앞 꽃길 만들기 등 업무가 더해졌다. 이정록 회원은 그것을 두고 “시인 지망생과 딱 맞는 업무”라고 말한다. 그 덕분(?)인지 4년 후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 「농부일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렇게 30년 넘게 시를 쓰고, 30년 넘게 중·고등학교 한문 교사로 일했다.
교사로서 이정록 회원은 교단을 무대, 학생을 관객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유료 관객이었다. 저들이 가진 것 중 가장 값지고 귀한 ‘시간’을 주고 수업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러니 수업 시간 동안 관객을 감동케 하고 지식과 지혜를 한 움큼 쥐어가게 하려 했다. 그 마음을 퇴직 후에는 진짜 객석에 옮겼다.
“지난 6월 14일 동네책방 ‘가문비나무아래’에서 신재창 가수와 시노래 콘서트를 열었고, 26일과 30일에는 평생학습공동체 ‘오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강연과 수업을 했어요. 7월에도 같은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발소는 제 개인 창작 공간이기도 하지만 창작 합평과 독서 토론, 공연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무대 대기실이기도 합니다. 이발소 옆에 ‘M스테이션’이란 공연 세미나실이 셋이나 있고요. 저는 작은 배우로 늘 대기 중입니다.”

이발사가 세상에서 발명한 이야기들

이정록 회원의 새 창작소 이름은 이발소, 풀어서 ‘이야기발명연구소’다.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겠다”라는 뜻에서 이름 붙였다. 시든, 이야기든, ‘깎아내고 다듬는’ 점에서 이발과 관련이 깊다는 점도 닮았다. 이정록 회원은 “이발소를 연다니까, 개그맨 전유성 선생님이 이발소 의자를 선물로 보내주신다고 전화를 주셨어요. 70년대 의자라 현대식보다도 10만 원이나 비싼 거라면서요”라며 호쾌하게 웃는다.
지난 5월 출간한 그럴 때가 있다』에도 그가 발굴한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있다. 초락초등학교에서 아이에게 토막 연필을 선물 받거나 버스 기사와 할머니 간 독한 대화를 옮긴 것처럼 일상도 시가 되었다. 재미와 온기가 가득하다는 점에서 전작과 결을 같이 하면서도, 이정록 회원은 “독자와 더 쉽게 닿았으면 싶어, 무대와 음악을 떠올리며 선율과 가락과 빛과 동선을 그려보았다”라고 설명한다.
‘이정록의 시노래 콘서트’에서 가수 신재창이 세션으로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시가 그러하듯 삶 또한 교단을 벗어나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선율과 가락과 빛과 동선이 생겼다. 귀한 사람과 점심을 먹으며 반주(飯酒) 한잔 곁들일 수 있고, 여유가 생기면 낮잠도 잘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소소한 행복이 더해졌다는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22살에 교직에 나온 뒤부터 지금까지 거의 똑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에 4시 반쯤 깨서 글을 조금 쓰고 이발소로 출근하거나 강연하러 갑니다. 학교에서 근무할 때도 주말, 방학 다 출근했습니다. 따로 집필실이 없었기에 교무실 제 책상이 창작소였지요. 늘 종소리에 맞춰서 일하고 화장실 가던 습관대로, 퇴직 이후에도 50분 단위로 일합니다. 습관은 무섭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여름과 겨울방학, 봄방학 즈음이 책을 엮는 귀한 시간입니다. 퇴직했지만 지금도 설레는 마음으로 여름방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결국 하나의 전집입니다

2막으로 구분 지을 필요 없는 나날. 이정록 회원도 “삶을 앞뒤로 나눌 필요 없다”라고 말한다. 우리 삶도 결국 한 권이라는 것이다.
“시집을 열 권, 백 권 내도 결국 전집(全集)입니다. 인생도 2막은 없습니다. 그러니 현장에 계실 때부터 꿈을 만들고 경영하세요. 퇴직 후에 ‘이걸 해야지’가 아니라, 지금부터입니다. 저도 2014년부터 인문학협동조합 ‘문화in결성’을 만들어서 활동을 해왔고, 그중 하나가 만해문예학교입니다. 그리고 요즘은 여유가 더 생겨서 미술학원에도 다녀요. 그림 작가가 되려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가지고 있던 꿈이거든요. 바라는 것에 그치지 말고 실행하십시오. 우리 모두 꿈자리 뒤숭숭한 사람이 됩시다. (웃음)”
이정록 회원이 시를 닮은 것일까, 시가 그를 닮은 것일까? 따뜻하며 재미있다. 여기에 ‘살림’이 더해진다. “시를 읽고 난 사람이 유쾌해지고 살맛이 나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그는 사람을 만나며 이야기를 발명해내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
이정록 시인이 ‘시노래 콘서트’에 참여한 독자들과 소통의 시간을 갖고 있다.
“지금 출판을 기다리는 원고가 여섯 권 분량입니다. 그중엔 동시집도 있고 그림책도 있고 동화책도 있지요. 그리고 조용히 긴 숨 들이마시며 완성까지 3년쯤 걸릴 몸집의 책을 쓰고 있습니다. 겹낱말 316개를 시로 옮긴 『동심언어사전』(문학동네, 2018)에 이어, 『시로 쓰는 국어사전』(가제)을 엮고 있어요.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정록 회원은 어복(語福)이 많다. 세상 어디서든 시어를 건져 올린다. 팔딱 뛰던 놈으로 골라 시를 지어 독자의 식탁에 올린다. 그러나 그를 좋은 시인으로 만든 저력은 어복보다 매일 낚싯대를 드리우는 부지런함에 있다. 이제 그에게 낚시할 시간이 더 많아졌다. 시어들은 긴장하고, 독자는 기대할 차례다. 케이 로고 이미지
인생 이모작의 주인공을 찾습니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재능을 기부하며 역동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회원님들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의미 있는 인생 이모작을 실현하고 있는 회원님을 추천해주셔도 좋습니다. 「The-K 매거진」 지면에 담아 많은 회원님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를 전해드리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 보내실 곳 : 「The-K 매거진」 편집실 (thekmagazine@ktcu.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