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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23 Vol.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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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문화보국(文化保國)과 문화광복(文化光復)의 일념으로

민족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선생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은 전 재산을 바쳐 우리 문화재가 다른 나라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문화재의 보존과 관리, 연구와 전승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문화 독립운동가’로 불린다. 그가 세운 ‘간송미술관’은 문화재에 담긴 우리 민족의 정신을 보호하고 후손에게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우고자 한 노력의 소산이다.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되찾아는 데 앞장섰으며, 보성학교를 인수해 민족 교육을 실천하는가 하면,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 중에도 방대한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관리함으로써 귀중한 문화유산의 명맥을 지켜왔다.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은 우리 민족의 자존감이자 먼 훗날까지 이어져야 할 우리의 얼과 문화였다.

이경훈 보라고등학교 역사교사

이경훈 역사교사는 보라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일 간 역사 갈등과 화해를 연구하면서 「쟁점 한일사」, 「마주 보는 한일사」(공저) 등을 출간했다. 동아시아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원교사,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와집 20채 값으로 맞바꾼 청자

“2만 원” 경성(일제강점기 서울)의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로는 전문 도굴꾼인 야마모토에게 구입한 고려청자 ‘천학매병(千鶴梅甁)’ 값을 이렇게 불렀다. 도자기에 새겨진 학은 69마리였지만, 매병을 빙빙 돌리면 1,000마리의 학이 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에다 선생, 이렇게 귀한 청자를 수장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인수하겠습니다.” 전형필은 한 푼도 깎지 않고 2만 원 현금이 들어 있는 가죽 가방을 마에다에게 넘기고 천학매병을 받았다. 2만 원은 1930년대 경성 시내의 여덟 칸짜리 기와집 20채 값이었다. 요즘 서울 아파트 가격 평균 시세로 따져도 200억 원이 넘는 고가였다.
며칠 후 천학매병에 대한 소문을 들은 일본의 수장가가 자신이 구입하기를 원한다며 마에다를 통해 두 배 가격을 불렀지만 전형필 선생은 거절했다. 이렇게 천학매병은 조선에 남았다. 이것이 해방 이후 국보 제68호로 지정된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간송미술관 소장)
출처:[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 최고의 거부'가된 24세 청년

간송(澗松) 전형필 선생은 1906년 서울 종로에서 당시 조선 최고 부자 전영기 대감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은할아버지가 무과에 급제해 종2품 가선대부까지 지낸 분이었기 때문에 대감댁이라고 불렀다. 할아버지는 배오개(이현, 당시 서울 종로 부근)에서 가장 큰 상권을 가지고 있던 거부였다. 휘문고보(현재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 전공으로 유학하던 1920년대 말, 간송을 아끼던 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일찍이 형마저 급사해 20대 초반의 간송은 집안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었다.
학업을 마친 전형필 선생은 조부와 부친이 남긴 재산과 운영하던 가업을 조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가 조사한 집안 소유의 논만 4만 마지기, 800만 평으로 약관 24세에 조선의 백만장자가 된 것이다. 토지 가격만 당시 경성 소재 기와집 2,000채에 해당하는 재산이었다.
청년 전형필은 엄청난 재산과 집안 운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193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대륙 침략을 준비하던 제국주의 일본의 전초기지였다. 또 조선총독부가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젊은 청년을 그냥 놔둘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오세창과 전형필(1938).맨 왼쪽이 박종화와 고희동, 부채를 든 인물이 전형필,전형필 왼쪽이 오세창 [출처: 「간송 전형필」(이충렬, 김영사)]

민족문화 수호로 조국 통일을 돕고자 마음 먹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한 전형필 선생은 이종사촌 형 월탄 박종화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집안의 앞날에 대한 고민을 가득 안고 있던 전형필 선생은 박종화와 고희동을 자주 만났다. 대학 재학 시절 방학을 맞아 경성에 돌아와 있던 전형필 선생은 고희동을 만나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고, 고희동은 책과 서화를 좋아한 전형필 선생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희동은 전형필 선생에게 평생 스승이 될 위창 오세창을 소개해 준다. 오세창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역관이었던 역매 오경석의 아들로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많은 문화재를 물려받은 대수장가였다. 게다가 그는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한학자, 문화재 감식안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역대 서화가들의 이전 기록을 총정리한 「근역서화징」 (1928)을 출판하기도 했다.
전형필 선생은 오세창을 만나 조선의 귀한 전적과 서화를 지키는 데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가르침을 구했다. 나라 잃은 백성을 도와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했던 전형필 선생은 스승 오세창을 만나며 민족의 혼과 얼을 일본으로부터 지켜내겠다는 결심을 하게된다. 민족문화를 보전하는 문화 독립에 매진하기로 결심한 전형필 선생에게 오세창은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오세창은 그에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에 나온 글을 인용해 ‘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라는 의미로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겸재 정선, 신윤복의 작품을 고국에 바치다

본격적으로 민족 문화재 수집에 나선 전형필 선생은 서울관훈동 한남서림을 인수했다. 한남서림은 고서화를 취급하고 관련 자료를 영인본으로 출판하기도 한 서점이다. 전형필 선생은 양반집 아궁이 불쏘시개로 들어갈 뻔했던 겸재 정선의 작품을 구한 적이 있다. 지방 양반들이 내놓는 골동품을 거래하는 거간꾼 중 장형수라는 인물이 용인 양지면 면장 송재구 집에 간 일이 있었다. 그가 잠자리에 들기 전화장실에 가기 위해 나왔을 때 머슴 하나가 아궁이 앞에서 불쏘시개를 들고 군불을 지피는 모습을 보았다. 머슴이 들고 있는 것을 자세히 보니 비단 표지의 화첩이었다. 장형수는 얼른 송재구에게 말해 20원을 주고 머슴이 들고 있던 화첩을 구입했고, 이것을 한남서림에 갖고 왔다. 이것이 겸재정선의 「해악전신첩」이다. 선생은 장형수의 말을 듣고 그자리에서 화첩을 거두었다. 전형필 선생은 겸재 정선 서화의 가치, 불쏘시개로 들어갈 뻔한 것을 구해온 정성 등을 생각해 무려 1,500원을 지불했다. 이후 거간꾼들이 좋은 문화재를 들고 한남서림에 몰려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해악전신첩」중 ‘금강내산’(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간송 전형필」(이충렬, 김영사)]
혜원 신윤복의 「혜원 전신첩」은 일본 오사카의 골동품상 야마나카 사다지로가 갖고 있었다. 전형필 선생이 오사카까지 직접 가서 야마나카와 대면하고 작품을 살펴보았다. “4만원” 야마나카가 가격을 불렀다. 전형필 선생이 예상한 액수 보다 너무 높은 금액이었다. “야마나카 선생, 가격 조정이 안되어 섭섭하지만 큰 안복(眼福)을 누렸습니다. 이번 여행이 헛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야마나카가 다시 얘기했다. “그동안 물건을 일본으로 보내겠다는 사람은 봤어도 되사가겠다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 화첩은 선생에게 가는 게 옳다고 봅니다.” 두 사람은 결국 2만 5천원에 흥정을 마쳤다. 조선 시대 풍속화의 백미로 인정받아 현재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혜원 신윤복의 「혜원 전신첩」은 이렇게 고국으로 돌아왔다.
전형필 선생은 민족문화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토지를 매입하고 조선 최초의 근대 건축가 박길룡에게 박물관 설계를 의뢰했다. 1938년 8월 조선 최초의 근대 사립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오세창은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라는 의미로 ‘보화각’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은 이렇게 탄생했다.
60만 원의 재단 확립, 보성 중학교를 인수,경성 전형필씨의 장거
[출처: 동아일보 1940.6.27.]
간송미술관의 현재 모습(구 보화각)
[출처: 조선일보 2022. 4. 15.]

교육과 구제사업을 통한 사회 참여 활동

일제강점기 경성에는 여러 곳에 인보관(隣保館)이 운영되고 있었다. ‘인보(이웃끼리 서로 돕는다)’ 운동은 영국과 미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구제 운동(settlement movement)’에 영향을 받아 진행된 빈민구제, 탁아사업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전쟁이 확대되고 경기가 어려워 지면서 운영이 어려워 폐쇄되는 인보관이 늘어났다. 전형필 선생은 어머니가 조금씩 도와오던 동화 인보관에 매년 1,000원씩 후원하면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보성고보(현재 보성고등학교)는 1906년 이용익이 세운 최초의 민족사학이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재단 관리자를 파견해 10년 이상 재직해 온 교사들을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 하고 불순한 조선인)으로 몰아 쫓아내려고 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위창 오세창은 전형필 선생을 불러 보성고보의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도울 방법을 논의했다. 전형필 선생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면 배우면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훈을 떠올리며, 그 자리에서 흔쾌히 학교 인수를 결정했다. 그 후 재단법인 동성학원을 설립해 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는 오로지 학교에 가해지는 조선총독부의 압력을 막고 재정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또한 1945년해방 이후에는 교장을 구하지 못해 1년간 교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목숨을 건 「훈민정음 해례본」과의 만남

1940년대 들어서서 제국 일본의 식민지 수탈은 점점 심해졌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지방의 양반들이 내놓는 귀한서화와 전적이 쏟아져 나왔다. 전형필 선생은 들어오는 서화와 전적을 원로 선생이나 신학문을 공부한 학자들과 함께 살피고 분류해 보화각 내에 ‘간송문고’에 수장했다. 이때 드나들던 학자 중에 경성제국대학교와 경학원(현재 성균관대학교)에서 조선어를 강의하던 김태준이 있었다. 김태준은 조직원이었던 이용준으로부터 “가문의 선조가 세종대왕으로부터 상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하사받아 가보로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이용해 조직 재건 자금으로 활용해 보려고 선생에게 접근했다.
당시 조선어학회 사건(1942)으로 한글 말살에 혈안이 되어있던 시기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한다는 것은 목숨은 물론 집안까지 위태롭게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 해례본」은 민족문화의 정수였다. 그는 은밀히 진품임을 확인한 후 사람을 보내 이를 인수했다. 선생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자신의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기고 한국전쟁 당시 피란 갈 때도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이렇게 보존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간송 전형필」(이충렬, 김영사)]
간송 전형필 선생의 흉상(간송미술관)

사후에도 이어지는 민족문화 수호 정신

해방 이후 전형필 선생은 학자들과 함께 흩어진 문화유산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산산이 깨뜨려버렸다. 피란 갔다 돌아온 보화각에는 그동안 정성 들여 모아둔 전적과 서화들이 불쏘시개감으로 장작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전쟁 이후 전형필 선생은 파손되거나 흩어진 유물들을 모으고 정리하면서 신진 학자들과 함께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고고미술」이라는 학술지를 만들어 후학을 기르는 일을 했다. 학교 재단 운영과 문화재 보존 활동 등도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재단을 정상화시킨 후 전형필 선생은 1962년 급성 신우신염으로 서거하고 말았다.
전형필 선생을 따르던 연구자들은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 구소를 설립해 그가 수집해 놓은 문화재를 연구, 발표하기 시작했다. 발표와 함께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보화각은 1971년 간송미술관으로 개명되었다. 그가 수집한 문화재를 기반으로 민족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간송학파’로 활동하고 있다. 전형필 선생이 서거한 후 정부는 그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문화포장을 추서했다. 1964년에는 보성학교를 지키고 발전시킨 업적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을 거듭 추서해 민족문화 수호를 향한 그의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