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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2023 Vol.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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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책 대신 총을 든 학생들과 그 곁에 함께한 선생님

고향과 나라를 구한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과 박효칠 교사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1951년 1월 9일 태백중학교 교정에 모인 학생들은 이렇게 외쳤다. 1·4 후퇴 이후 5일 만인 그날, 6·25 참전을 다짐하던 순간이었다. 4일을 꼬박 걸어 찾아간 군대에서 체구가 작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몇몇이 입대를 거절당했다. 그들은 “38선만 돌파하면 학교로 가겠다”고 사정하며 버텼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찾은 이들은 고작 14~16살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내 나라와 내 고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이들의 호국정신은 부모의 간절한 만류도, 살을 에는 겨울바람도 막지 못했다. 흘러내리는 철모와 몸에 맞지 않는 군복을 입은 10대 소년들은 그렇게 나라를 위해 전쟁터를 누볐고 18명의 전우를 떠나보내는 슬픔 속에서도 수많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속에는 "학생들이 가는곳에 선생이 있어야 한다"라며 이들의 곁을 지킨 박효칠 교사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있었다. 호국의 달 6월, 눈꽃처럼 순수하고 강철처럼 단단했던 학생들과 교사의 애국심, 그 숭고한 이야기를 만나본다.

이경훈 화홍고등학교 역사교사

이경훈 역사 교사는 화홍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일 간 역사 갈등과 화해를 연구하면서 「쟁점 한일사」 「마주 보는 한일사」 (공저) 등을 출간했다. 동아시아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원교사,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 원회 위원 등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6.25전쟁의 시작, 전쟁터로 나선 학생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친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에서 한국군은 전쟁 초반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겨우 전세를 역전시켜 북한군을 북으로 밀어 올렸지만 10월 19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참전은 전쟁을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혼란 상태로 빠뜨렸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또다시 밀리기 시작했고, 중공군은 12월 26일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마치 한반도를 남북으로 톱질하듯 밀고 밀리는 전황의 연속이었다.
학도의용군 신분증
‘학도의용군’은 전쟁 발발 직후부터 참전했다. 6월 28일 서울 한강 인도교가 폭파된 이후 가까스로 한강을 건너 수원에 모인 학생 200여 명은 다음 날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조직했다. 7월 1일 대전에서는 학생 700여 명이 ‘의용학도대’를 조직해 상당수가 군에 입대했다.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를 중심으로 대구에 모인 약 5,000명의 학생은 애국학도총궐기대회를 열고 ‘대한학도의용대’로 확대·개편해 참전했다. 이들은 학도병 모집, 피란 학생 규합, 선전대원 파견 등 군 업무에 적극 참여했고 안동전투, 다부동전투 등 전선에 투입되어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학생으로 구성된 학도의용군뿐 아니라 여학생 학도의용군, 재일 학도의용군도 참전했다. 그렇다면 학도의용군이란 정확히 어떤 이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학도의용군은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부터 1951년 4월까지 대한민국 학생 신분으로 지원해 전후방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공비소탕, 치안 유지, 간호 활동, 선무공작 등에 참가함으로써 군경의 업무를 도운 개별 학생 혹은 단체를 말한다.
학도의용군의 활동 기간을 ‘1951년 4월까지’로 정한 이유는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고 있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의 앞날을 짊어질 청년학도들은 시급히 학원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라’는 ‘복교령’을 내렸고, 대다수 학도의용군이 귀향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많은 학도의용군이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현역 군인으로 신분을 전환해 복무하기도 했다.
어린 중학생부터 장성한 대학생까지 학도의용군의 이름으로 실전에 참여한 학도들은 6·25 전쟁 전 기간을 통하여 모두 약 2만 7천여 명에 이르렀고, 후방지역 또는 수복지역에서 선무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무려 20만 명이나 되었다.

127명, 태백중학교 학도병들의 결의

“인민군은 15세부터 의용군이라는 명칭으로 전쟁터로 끌고갔기 때문에 우리는 숨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학교에 나가지 않고 있던 젊은 친구들이 인민군 청년위원회에 가입해 하루속히 나와서 함께 일하도록 해 달라고 말하고 다녀 더욱 겁에 질렸습니다. 밤늦게까지 들판이나 산에 숨어 생활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번에는 겨울철이라 숨어 견딜 수도 없었고, 또 남아 있자니 6·25전쟁 발발 당시와 같이 갖은 고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인민군에 부역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될 것임이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 황두영 씨의 증언)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경북 포항)
[출처: 경북일보 2019.6.6.]
1951년 1월 9일 새벽, 태백중학교 학생 123명이 교정에 모였다. 당시 학생들은 북한군 치하에서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숨어 지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간신히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다는 소식이 들리자 불안한 마음에 1월 8일 오후 학교에 모인 20여 명의 학생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태백지구에 또다시 북한군이나 중공군이 들어온다면 숨어 살거나 의용군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학생 중 일부가 포항 지역 학도의용군이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우리도 후방으로 내려가서 학도병에 지원하자”라고 제안했고, 많은 학생이 “우리 고향은 우리 손으로 지키자”라면서 동의했다. 하룻밤 사이에 학도병 지원 소식이 다른 학생들에게도 퍼져 9일 새벽, 123명의 학생이 모였던 것이다. 이들은 울산에 육군본부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까지 가기로 하고 출발했다. 이때 태백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박효칠 교사는 “학생이 있는 곳에 교사도 있어야 한다”며 함께 참여했다. 또 다른 지역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학생 3명도 합류해 총 127명이 영하의 기온과 강풍을 뚫고 울산으로 출발했다.
태백중학교 교정에 있는
박효칠 교사 흉상
6·25전쟁 당시 발급한 전시 학생증 [출처: 「6.25 전쟁
학도의용군 자료집」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호국의 마음으로 책과 펜 대신 총을 들고 나서다

울산으로 향한 박효칠 교사와 학생들은 3일 밤낮을 걸어 경북 봉화군 춘양까지 갔으나, 이곳에서 제3사단 23연대의 저지를 받았다. 부대에서는 아직 어린 학생들이니 다시 학교로 돌아가라고 했다. 학생 대표는 연대장을 찾아가 정식으로 입대를 요청했지만 학생을 군인으로 받을 수는 없다고 하여 거절당했다. 이들은 다시 나이와 키를 속여가며 간곡히 입대를 요청했고, 학생들의 의지에 감동한 연대장은 입대를 허락했다. 1월 14일 학생들은 입대식을 거쳐 학도중대로 편성되었고, 인솔을 맡은 박효칠 교사는 행정보급관으로 입대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학생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당시 전선이 위급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기초적인 군사훈련밖에 받을 수 없었다. 이들은 곧바로 영월군 중동면 녹전리 전투 참가 명령을 받았다.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의 첫 참전이었다. 녹전리에서는 한국군 3사단이 북한군 3개 사단에 맞서 1월 14일부터 5일간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는데, 학도의용군의 임무는 전투 후 낙오된 북한군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학도의용군은 제3사단이 제3군단에 편입되어 중동부전선으로 이동함에 따라 함께 이동했고, 5월 인제 현리 전투에 참전했다. 현리 전투는 6·25전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국군 3군단이 중공군 9병단의 포위 공격을 받아 군단이 와해되고 부대 편제를 유지하지도 못한 채 병력의 3분의 1 정도만 간신히 탈출한 전투다. 하지만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은 이 전투에서 중공군을 2시간 동안 막아내면서 한국군 4개 사단 병력이 적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할 수 있도록 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전투 이후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은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무사히 후방 집결지에 모였다는 것이다.
태백중학교 학도병전적비(제3사단 사령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리전투전적비(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출처: 강원종합뉴스]

정규군 특공대로 활약한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

1951년 2월 종군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라는 복교령이 떨어졌다. 전국에 산재해 있던 학도의용군은 그에 따라 3월 초 해산하고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은 치열한 전투 속에 5월이 지나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시 부대에서는 학도의용군의 현리 전투 전공을 알고 있었고, 접경 지역에서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 입대를 권유했다. 학생들은 고심 끝에 1951년 6월 1일 정식으로 군번을 받고 정규군으로 입대했다. 전시 중이라 양철 인식표도 없이 나무 표찰에 이름과 군번을 새긴 인식표를 받고 정식 현역병이 된 것이다.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은 현리 전투의 전공과 병력 손실없이 부대를 유지한 점을 인정받아 6월 15일 제3사단 23연대 특공대로 편제되었다. 이후 이들은 간성 쑥고개 전투, 김화 949고지 탈환 전투, 양구 가칠봉 전투, 간성지구 전투 등에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 직전 특공대는 해산되었다. 이후 특공대에 소속된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들은 주로 각 부대 행정 부서에 배치되어 행정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당시 현역병 중에서는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이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 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영어와 수학 기초반을 만들어 가르치기도 하고, 모교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도서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은 국방부 정훈국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소개되었다.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은 1957년까지 제대해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후 국가와 지역사회발전에 앞장서서 활동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중 18명은 군복무 중 전사해 유명을 달리했다.

태백의 화랑으로 기억되는 학도의용군

“한 학교 출신이 한 부대에서 1개 중대가 되어 전투에 참전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입니다. 모교에 태백 출신 전몰 학도병 충혼탑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1952년 9월 모교에서 후배들이 선배 장병을 위문하기 위해 부대를 방문했을 때 부대원 한 명이 이런 제안을 했다. 후배들과 인솔 교사, 자리에 있던 부대원들 모두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이에 학도의용군은 월급을 학교에 보내 이 사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때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 친목회를 만들기로 하고 삼국시대 국난 극복과 국위선양에 앞장섰던 화랑도와 고향 태백에서 한 글자씩 따와 ‘화백회’로 이름을 정했다.
휴전 이후 화백회는 전사한 18명 학도의용군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1954년 11월 모교에 충혼비를 건립했고,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1997년 태백중학교에서는 명예졸업장을 수여해 이들의 공적을 기렸다. 또한 2005년에는 제3사단 교육장에 ‘태백중학교 학도병전적비’를 건립했고, 2009년에는 태백중학교 교정에 기념관을 건립했다. 2016년에는 매년 개최되는 추모제에 육군참모총장이 참석해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 127명을 포함한 태백중학교 출신 참전용사 169명의 이름과 군번이 새겨진 명패를 학교에 증정하기도 했다.
“748, 949, 973, 662, 529…. 우리가 싸웠던 고지 번호입니다. 동창이자 전우들이 피 흘린 곳으로 평생 잊지 못할 숫자들이죠.” 추모제를 마친 뒤 화백회 이영도 씨에게 어디서 싸웠는지 묻자 숫자를 열거했다. 함께 참전하다 전사한 동지중 아직 16명의 유해는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생존한 학도의용군들이 매년 자신들이 싸웠던 곳에 올라 전우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고 했다.
화백회 회장을 역임한 이용연 씨는 “학업에 매진해야 할 나이에 입대해 8년 가까이 군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니 이미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배움이 짧은 상태에서 그나마 살길은 광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광부 생활을 하다 보니 진폐증으로 평생 인간다운 삶을 누려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피력했다.
전쟁은 당시의 치열한 전투로만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빛나는 전승을 기억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분들을 기념해야 한다. 그렇지만 전쟁의 비참함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이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지나간 전쟁을 기억하는 일도 필요하다.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과 박효칠 교사의 헌신과 활동은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고 즐겁게 학생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케이 로고 이미지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 김봉진 씨에게 명패를 전달하는
육군참모총장
[출처: 국방일보 20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