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The–K 인터뷰 1

정답 없는 인생이라도
해답은 있다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한순구 교수 언젠가부터 ‘노력’이라는 단어가 문자 그대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뜻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으니. 삶이 마음 같지 않다고 해서 좌초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정해진 답이 없다고 해도 나만의 인생 해답을 쓰려면 어떻게든 다음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 요령 없는 묵묵함이 현재의 한순구 교수를 만들었다.
  • 글. 정라희
  • 사진. 한제훈

경제학자의 경험으로 건네는 조언

경제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기회비용’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막연하게 알고 있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세월을 보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인생에 묘수란 없음을 깨닫지만, 삶의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젊은 시절에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흔들릴 때가 있다. 대학에 진학해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흔들림 없이 뜻을 세울 수 있는 이는 드물다. 그래서 한순구 교수는 학기를 시작한 첫 수업 시간에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칠판에 적는다. 연구와 교육, 행정 일로 분주한 교수가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하다니 꽤 과감하다는 생각도 든다.
“상담이 필요한 학생, 아닌 학생 구분해서 보는 일은 없어요. 학생들이 저를 찾아오면 자연스럽게 상담을 하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연락하는 것도 일종의 인생 공부라고 생각해요.”
대단한 뜻이 있어 학생들과 마주 앉은 것은 아니었다. 연세대에 교수로 부임했을 때 그의 나이 만 서른넷. 젊은 교수였던 만큼 자연스럽게 학생들과 격의 없이 지냈다. 실제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아 무심코 ‘형’하고 부르는 학생도 있었다.
가끔은 따로 만나 심각하게 상담할 내용도 있었겠지만, 대다수 학생의 고민은 결이 비슷했다. 상담에 드는 시간도 절약하고, 용기가 부족해 자신에게 연락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참고할 수 있도록 칼럼을 정리해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 칼럼을 모아 나온 책이 2017년에 출간된 <인생 경제학>이다. 과거 집필한 경제학 교과서처럼 깊은 지식을 다루지는 않지만, 경제학자로 살며 체화된 경제학적 사고와 태도가 그의 인생에 미친 효용을 에세이로 풀어냈다.
“경제학은 이런저런 걱정을 미리 하면서 여러 계획을 세우는 학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숫자의 학문이라 감정에 휘둘리지 않죠.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적 삶은 성취로 가는 효과적인 방법을 알아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결과를 담담히 수용하고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 길로 가야 한다’가 아니라
‘이런 길도 있다’는 안내 한 번이 학생들의 미래를
더욱더 풍부하게 한다. 교수로서 경력이 쌓이고
행정 업무가 늘어나면서 예전처럼 학생 상담에 열의를 쏟기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지난날 상담했던 학생들이 멋지게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초심을 되새긴다.
삶에도 경제학을 적용한다면

젊은 나이에 명문대 교수가 된 그의 삶은 탄탄대로처럼 보인다. 뼈아픈 좌절이나 실패는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과정에서 투입한 노력은 상당했다. 캠퍼스의 낭만이란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 부친은 “인생에는 계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그 영향 덕분에 일찌감치 유학 준비를 하며 매일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캠퍼스를 지켰다.
“1학년 때부터 유학을 목표로 두고 입대와 제대 시기까지 고려해서 시험 준비를 했어요. 군대 휴가도 GRE나 토플 시험 일정에 맞추려고 노력했고요. 4월 제대 후 그해 8월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계획에 따라 대학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인생에는 변수가 많고 예상과 다르게 인생 후반전이 흘러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래도 그는 “투입(실천)이 없으면 산출(결과)이 없다”는 경제학의 명제가 인생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상담하면서 가장 자주 접한 질문이 ‘제가 유학을, 로스쿨을, 행정고시 등을 준비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라는 거예요. 그러면 저는 학점이 어떤지, 평소 공부를 몇 시간이나 하는지 물어봅니다.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온 학생들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지 없는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때가 많아요.”
그는 이왕이면 학생들이 좀 덜 방황하고 좀 더 빠르게 목표를 이룰 수 있길 바란다. 미래를 너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다양한 선택지를 제안하기도 한다. 현재 연세대 경제학부에서는 다섯 갈래의 진로 트랙을 운영하며 학생들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게 돕고 있다.
“학생들이 진로를 정할 때 의외로 보수적으로 접근해요. 그래서 요즘은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 졸업생을 초대해 재학생과 만나게 해줍니다. 예전에 제가 상담했던 졸업생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거죠. ‘선생’ 말은 안 들어도 ‘선배’ 말은 잘 듣거든요.(웃음)”
‘이 길로 가야 한다’가 아니라 ‘이런 길도 있다’는 안내 한 번이 학생들의 미래를 더욱더 풍부하게 한다. 교수로서 경력이 쌓이고 행정 업무가 늘어나면서 예전처럼 학생 상담에 열의를 쏟기 어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지난날 상담했던 학생들이 멋지게 성장한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초심을 되새긴다.
“종종 ‘교수님도 바쁜데 학생들에게 시간을 왜 이렇게 많이 쓰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어요. 사실 그 학생들이 저에게는 자산이에요. 최근 몇 년 사이 저에게 상담받은 학생들이 교수로 부임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 역할을 이제는 후배 교수들이 대신하고 있어요.”

인생은 게임이다

철저하게 계획하고 꾸준하게 노력해도 인생이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죽을 각오로 노력했는데도 처참한 실패를 맛보기도 한다.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정신력을 키우는 비법 중 하나는 ‘인생은 한 판의 게임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제 세부 전공은 게임 이론입니다. 게임 이론은 경제학에서 국가 사이의 전쟁에서 구사하는 각종 전략이나 기업 간 경쟁의 전략을 다루는 분야예요. 국가나 기업의 살벌한 생존 싸움에 ‘게임’이라는 가벼운 단어가 붙은 것은 그 안의 수학적 구조가 같기 때문인데요. 인생도 어떤 면에서는 컴퓨터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어요.”
컴퓨터 게임을 하다 실수해도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의 게임도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는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세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즐기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비로소 인생은 의미를 지닌다. 결국 경제학적으로 산다는 것은 인생의 주체에 자신을 두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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