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광복을 눈앞에 두고
옥중 순국한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선생’

역사에 가려지고 기억되지 않는 인물 중에는 누구보다 강렬하고 뜨거웠으며,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던 민초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그중 일본군 고위관료 처단 계획에 동참하는 담대함을 지니고 한인애국단원으로 열정을 펼친 독립운동가 유상근 선생을 소개한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점점 커져가는 항일정신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유상근은 어릴 적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통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북간도(만주)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자연스레 학교도 여러 번 옮겼다. 유년 시절 그는 벗들과 깊은 우정을 만들지 못한 채 끊임없이 격변기 대한제국의 한복판에서 우왕좌왕했다.
중국 연길현 용정으로 이주했을 때 항일투사를 많이 배출한 민족학교 <동명중학교>에 입학했고, 백평리 갑산촌으로 이사한 뒤에는 생활고로 인해 부득이 학업을 중단했으나, 야학과 소년단을 창설해 후배교육과 항일사상 고취에 주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산촌에 불시 검문으로 조사차 나온 일본 경찰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일어났다. 이 사실을 들은 아버지 유기춘은 얼른 도망가라고 말했다. 간신히 마을을 벗어난 유상근은 서둘러 이모부 이종익이 거주하는 하얼빈으로 탈출했다. 이때가 1927년이었다.

  •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 선생(앞줄) 뒤에 있는 유상근
  • 유상근 자필 이력서(출처_독립기념관)
백범 김구와의 인연이 시작되다

3년 뒤 독립운동에 참여할 뜻을 품고 유상근은 상해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임시정부 요원이자 대한인교민단 단장 백범 김구를 만났다.
그는 김구에게 동명중학교에서 만난 사람들, 중국 갑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항일투사의 이야기를 전했다. 김구는 민족투사들과 함께 한 마을에서 살면서 일본 경찰과 맞선 조선인 청년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며 유상근을 아꼈다. 김구는 그가 자립할 수 있도록 버스회사의 검표원 일자리를 소개해 유상근은 직장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언어, 관습 등 여러 가지 시행착오로 직장을 오래 유지하지 못해 생활고에 허덕였다. 유상근은 혼자 힘으로 홍콩과 광둥 지방을 오가며 인삼 장사를 시작했다. 이후 1932년, 김구가 연락을 취했다. 유상근은 김구가 연락이 왔을 때 매우 긴장하는 동시에 설렜다. 그 역시 ‘그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은 이봉창이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명중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 형무소에 수감된 사건이었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擊日皇不幸不中)’. 즉,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라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일 관계가 매우 악화됐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 상해사변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했다.

(왼쪽)1932년 1월 8일 일본 동경 경시청 앞 이봉창 의거 현장검증 (오른쪽)유상근, 신채호, 이회영, 안중근의 순국지인 대련시 여순감옥에서 묵념하는 탐방객들
조국의 독립을 열망한 청년 유상근

바로 이 시기에 김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상해로 돌아온 유상근은 김구가 단장으로 있던 대한인교민단의 의경대원으로 활동했는데 당시 의경대원은 한인사회 치안과 밀정 처단 등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1932년 2월 24일, 유상근은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5월 초 대련에 국제 연맹 리튼 조사단이 온다는 소식을 접한 김구는 환영식에 참가하는 일본군 고위 관료들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때 김구는 평소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청년 유상근을 실행 요원으로 선발했다. 유상근이 대련으로 떠나기 전 김구는 다른 한인애국단 단원들과 사진 한 장을 찍었다.
1932년 4월 27일. 유상근은 상해를 떠나 대련으로 이동했고, 아옥정에 있는 만철 기숙사 동포의 방에 은거했다. 그는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에서 사용한 것과 똑같은 수통 폭탄을 들고 있었다. 당시 한인애국단 최흥식이 거사에 함께 참여하여 김구와 유상근의 중간 연락망 역할을 담당하는 등 긴밀히 비밀리에 추가 거사를 진행했다. 1932년 4월 29일 매헌 윤봉길이 훙커우 공원에 수통 폭탄을 투척했고, 의거는 대성공이었다. 중국은 ‘1억 중국 인민이 못다 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해냈다’라며 자금난과 변절자들로 인해 침체돼있던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임시정부는 고난의 피난길을 떠났다.

  • 유상근 의거 보도기사
  • 여순감옥 전경(출처_독립기념관)
광복 하루 전까지 버틴 빛나는 애국심

1932년 이후부터는 계속 이동해야 했고 그나마 난징에서 몇 년을 버텼다. 당시 한인애국단 단원은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다. 1932년 1월부터 5월까지 다수 청년독립투사의 여러 차례 의거 시도가 있었고, 이들 모두가 또 다른 이름의 ‘이봉창’, ‘윤봉길’ 들이었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일본 내부에서는 책임 소지에 대한 신상필벌과 함께 일본 본토에서부터 향후 대책 논의 및 추가 군대 파견, 군법으로 처단할 수 있는 공문 발행 등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이봉창, 윤봉길에 이어 다음 의거를 담당하게 된 유상근. 그의 가슴속은 다양한 감정이 공존했다. 뜨거움, 설렘, 먹먹함, 미안함, 그리고 아쉬움.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거사가 차근차근 진행되던 때였다. 국제연맹 조사단이 오기로 한 날인 1932년 5월 26일을 이틀 앞두고 대련 우체국에서 상해로 보낸 비밀전문이 발각되어 최흥식이 체포됐고, 유상근도 연달아 체포되었다.
유상근은 관동청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기타 말도 안 되는 죄명들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결국 여순감옥으로 이감되어 1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렇게 1945년 8월 14일. 일제는 유상근을 잔인하게 고문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광복을 하루 앞두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독립투사 유상근은 그렇게 옥중 고문사로 순국했다.

유상근(柳相根) 선생(미상 ~ 1945. 8. 14.)
- 독립운동가
- 1931년 한인애국단 설립에 참여
- 1932년 대련에서 일제 고관들 폭살 계획준비 중 체포
- 1945년 8월 14일, 광복 하루 전 옥중 순국
-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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