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노블레스 오블리주*
뜨거운 삶을 실천한 독립운동가

‘유일한 선생’

유한양행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는 많은 이들에게 ‘신상(紳商, 민족정신을 가진 상인을 가리키는 말)’으로 존경받을 만큼 개인이나 가족의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는 대신 민족과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일평생을 바쳤다. 진정한 애국심으로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며, 그 누구보다 청렴한 기업인의 삶을 살았던 그는 시대의 양심이자 뜨거운 독립운동가였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 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 : 프랑스어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단어인 ‘노블레스(Noblesse)’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Oblige)’ 단어가 합쳐져 생겨났다. 오늘날 부나 명예를 가진 사회지도층이나 기득권이 지위에 맞는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유학시절(왼쪽)과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만든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 학교(오른쪽) 유학시절(왼쪽)과 미식축구 운동선수 시절(오른쪽)
유일형에서 유일한으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평양에서 태어난 유일한은 1904년, 아홉 살의 나이에 오늘날의 조기유학에 해당하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런데 아버지(유기연)가 환전하라고 건네준 목돈을 배에서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였던 독립운동가 박용만의 도움으로 네브래스카주에 거주하던 침례교 신자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됐다. 그들은 새롭고 낯선 땅에서 유일한의 새로운 가족이었고, 영어 선생이자 인생 선배였다.
유일한의 본명은 유일형(柳一馨)이었는데, 미국에서 그는 스스로 ‘한민족’을 뜻하는 ‘일한(一韓)’으로 개명했다. 당시 시대적으로 굉장히 파격적인 행동이었고 자칫 불효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아들의 생각에 감동한 아버지 유기연은 오히려 다른 자녀들의 이름도 ‘한(韓)’자 돌림으로 개명시켰다.
1909년, 박용만이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만든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 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거나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미 유일한의 삶은 독립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유일한은 미시간 대학교에 입학했고, 동양인이 넘기 어려운 벽인 미식축구 운동선수가 되었다. 미식축구부의 주장을 맡을 정도로 운동에 재능이 있었지만, 장학금을 받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학업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대한인국민회 간부들과(왼쪽) 한인자유대회에서 결의문 낭독(오른쪽)
라초이 회사(위)와 라초이 회사 식품(아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조선인이 되어

대학생 유일한에게 어느 날 조국의 소식이 들려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다음 해인 1919년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미주 한인사회는 발칵 뒤집혔고, 독립운동가 서재필이 한인의회를 소집했다. 1919년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가 열렸고, 유일한 역시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참석했다.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서재필·이승만·조병옥·임병직의 주도로 4월 16일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한인자유대회(1919년, 1942년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독립운동후원대회)’가 열렸으며, 유일한은 이 행사에도 참석했다. 청년 세대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외친 대학생 유일한은 당시 30살의 나이 차를 둔 재미 한인 지도자 서재필과 나란히 태극기를 들고, 그곳에 서 있었다.
당시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며 학교에 다니던 유일한은 중국계 미국인들에게 부채, 찻잔 등의 중국 전통제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해 전통 제품을 구매해서 집안에 장식해둔다는 것을 듣고, 곧바로 사업 수완을 발휘한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사업적 재능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 제너럴일렉트릭(GE) 회사에 취직했고, 3년 차였던 1922년에 회사를 그만둔 뒤 미국인 대학동창이자 식품사업을 하던 웰리스 스미스와 동업하여 ‘라초이(La Choy)’라는 식품 회사를 창립했다. 그의 벤처 창업은 대성공을 거뒀다. 라초이 식품 회사는 당시 아시아인들이 즐겨 먹던 숙주나물 요리를 저장·보관하기 위해 통조림을 개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소개를 받은 중국계 미국인 여성인 ‘호미리’라는 소아과 전문의와 결혼했다. 유일한은 당시 극소수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 낸 손꼽히는 조선인이었다.

1926년 유한양행 설립
1941년 해외한족대회(왼쪽) 유일한 선생이 편성에 참여한 한인 국방경위대,미주한인 맹호군(오른쪽)
대한독립을 위해 자원입대하다

거래처 확보를 위해 중국에 다녀오면서 국내에 머물렀던 유일한은 의약품을 구하지 못하는 동포들을 보며 고국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미국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한 뒤 1926년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 일본은 만주를 침략했고(1931년 9월), 중일전쟁(1937년 7월)을 일으켰다. 국내 상황이 긴박하게 변하자 유일한은 미국으로 넘어가 수출선의 다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후, 1941년 4월 중국·러시아·프랑스 등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하와이에서 개최하는 ‘해외한족대회(미주한인단체들의 대표자회의)’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일한은 이 대회에 참석했는데, 여기서 결정된 내용이 참 귀하고 중요하다. 1. 대한민족은 주의와 이론을 초월하고 온갖 역량을 항일전선에 집중할 것
2. 대한민족과 각 단체는 임시정부를 절대 신뢰하며 물질과 정신을 다 하여 희생적으로 봉대할 것
3. 해외 한족 단체는 전체 동포에게 광복군 군인의 의무가 있을 것을 인식시키며 전선 출동의 훈련을 장려하기로 할 것
즉 대한민족 동포 모두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지와 후원 아래 광복을 위해 독립투사로서 함께 최선을 다해 싸우자는 것을 결의한 것이다. 유일한은 이 결의의 조직체로 만들어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단체운영자금을 기부하며 독립운동자금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그로부터 8개월 뒤,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했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유일한은 이때 자신의 삶에서 아주 특별한 선택을 하게 된다. 회사 사람들에게는 잠시 안식년을 가지며 미국에서 휴식을 취하겠다고 했지만, 그가 향한 곳은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정보처(OSS)였다. 유일한은 국내 투입작전을 위해 미군 특수부대에 자원입대를 선택한 것이다. 조기유학, 운동선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업가, 유한양행 설립자였던 그는 스스로 군인이 되었다.
그곳의 군인들은 언제든 목숨을 잃어도 기록조차 남지 않을 선택을 했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가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청년들이었다. 이들 중 핵심 요원이자 가장 최고령자인 한국인이 바로 유한양행을 설립한 기업가, 유일한 회장이었다. 그러나 특수부대의 비밀작전 실행을 목전에 두고, 일본의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1946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이 모든 사실을 비밀로 한 채 유일한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유일한의 자원입대 선택은 생전에 그의 가족을 포함해 아무도 몰랐고, 훗날 미국에서 자료가 공개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에게 납세훈장을 받는 유일한 선생
시대의 양심이 된 청렴한 기업인

유일한은 개인 소유주식을 처분해 유한공업고등학교를 건립했다. 학비와 기숙사 숙식비는 전액 무료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나머지 개인 소유주식 12,000주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기부하며 주식 기증의 엄격한 전제조건을 걸었다.
“(오직) 의료복지와 교육을 위한 목적 외에는 주식을 매매할 수 없다.”
그는 기업의 부패를 막기 위해 회사에서 아들과 집안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자신이 살아있을 때 이 일이 완수되어야 한다며 적극적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 전문경영인(CEO) 제도가 도입되었고, 제약업계 최초로 상장사가 되어 기업경영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했다.
정경유착이 일상화되었던 그 시절, 정치가들에게 전혀 기대지 않았던 유한양행은 국세청의 세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도 오히려 세금을 더 많이 납부한 것으로 밝혀져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납세훈장을 받기도 했다. 세상을 떠나며 유일한은 유언을 남겼고, 손녀의 등록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기부했다. 1971년 당시 금액 36억 2천만원, 평생 기부한 금액은 50억원이 넘는데 당시 신입사원 월급이 2만 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가치로 약 5,000억원이 넘는 재산을 기부한 셈이다.
이 뜻을 이어받아 손녀 유일선은 자신에게 남겨진 등록금 중 반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전부 사회에 환원했으며, 딸 유재라는 200억 원에 이르는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부했다.
아메리칸 드림, 성공한 사업가, 유한양행 설립자, 40대 후반 나이에 목숨을 걸고 미국 특수부대에 자원입대한 독립투사, 전 재산 기부, 대한민국 최초 종업원 지주제, 전문경영인(CEO) 제도 도입, 제약업계 최초 주식 상장,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 가장 존경할만한 기업가, 그리고 애국자. 이처럼 ‘유일한’이라는 인물을 수식하는 단어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삶 전체를 관통했던 것은 국가와 동포에 대한 헌신이었다. 한 평생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실천한 그의 선택을 돌아보며 그를 기억해본다.

유일한 선생(왼쪽) 1969년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넘기는 유일한 선생(오른쪽)
유일한(柳一韓) 선생
(1895.01.15 ~ 1971.03.11.)
- 독립운동가이자 기업인
- 유한양행과 유한재단 설립
-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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