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머나먼 이국땅에서 더욱 빛난 투혼!
헤이그 특사

‘이준’ 선생

독립운동가이자 정의에 맞선 대한민국 1세대 검사인 이준 열사. 슬픈 역사를 짊어진 젊은 열사는 머나먼 타국에서 외롭고 고단한 여정을 겪으며 일제의 부당함을 알리는 데 온몸을 바쳤다. 비록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 특사였지만, 이준 열사가 보여준 뜨거운 나라 사랑과 희생정신은 우리 마음속에 두고두고 간직될 것이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이준 열사 기념 우표(2018년 8월 15일 발행)
세상에 널리 빛나는 사람으로

이준은 1859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학자로 불리던 이병관의 아들이자, 완풍대군(완산군) 이원계의 직계 후손이다. 완산군은 고려 무신 이자춘의 아들이며,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이다. 그러나 이러한 집안 배경에도 불구하고, 유년 시절 이준 선생의 삶은 불우했다. 그는 세 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조부와 작은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했다.
이준의 원래 이름은 성재였다. ‘인간이란 본시 하늘의 뜻을 따름이다’라는 뜻이다. 이준은 성장해서 ‘세상에 널리 빛난다’는 뜻을 담아 스스로 이름을 준(儁)으로 고치고, 호를 일성(一醒, 세상을 한 번에 깨우침)으로 지었다. 실제 세상을 보는 선각자적 식견과 정세 판단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는 이준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열두 살에 북청 향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시험에 합격하고도 급제에 이르지는 못했다.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생각에 화가 난 그는 시험지를 들고 북청 남문루에 올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의협심과 배짱이 좋았던 이준. 세상의 부당함에 대한 열두살 소년의 도전은 인상적이었다.

재사로 인정받고, 최초의 검사가 되다

1875년, 큰 뜻을 품고 상경한 이준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형조판서 김병시 대감에게 천거된다. 대원군으로부터 이준의 됨됨이를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김병시는 이준을 데리고 다니면서 세상을 배우게 했다. 그렇게 이준은 당시 형조판서인 김병시, 최익현 등으로부터 재사(才士,재주가 뛰어난 선비)로 인정받았다.
1884년 이준은 함경도에서 장원 급제했고, 이후 그는 처음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준은 구한말 대한제국이 육성한 최초의 근대 법조인이자 최초의 검사였다. 졸업 직후에는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올바른 법 집행을 하며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으나 탐관오리들의 중상모략으로 2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이준은 미국에서 귀국한 독립운동가 서재필을 만나게 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며 ‘조선독립협회(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의 평의원이 되어 「독립신문」 간행, 독립문 건립, 가두연설 등 맹활약을 펼친다. 개화파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법과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1898년부터 ‘조선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외세 배격과 언론·집회의 자유를 주창하는 민주주의적 성격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러다 수구파(조선 말기,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하여 중국 청나라를 배경으로, 자주독립을 표방하는 독립당과 대립한 무리)의 모략에 의해, 당시 가두연설을 함께 했던 이승만, 이동녕 등 17인과 함께 투옥됐다.

민족열사로서의 구국활동

1902년 이준은 효율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비밀결사인 ‘개혁당(전 독립협회 활동가들이 개혁활동을 지속한 당)’을 조직했다. 또한 1904년 ‘한일의정서(러·일 전쟁 뒤에 우리나라와 일본이 맺은 조약)’를 근거로 일본이 한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일본인에게 허가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서자 이준은 ‘보안회(일본의 조선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직된 항일단체)’를 조직하여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주도했으며, 전국 도처에서 이 ‘보안회’를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강압으로 보안회가 와해되자 이준은 이상설, 이상재, 이동휘 등과 함께 보안회의 후속 단체인 ‘대한협동회’를 조직해 민족운동을 이어나갔고,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해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준은 이러한 와중에 일본 헌병에 강제 체포되기도 하나,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또한 이준은 개화노선을 표방하고, 민회를 열어 정부를 비판하며 내정개혁을 요구했던 ‘공진회(대한제국 때 부보상들로 조직된 사회운동단체)’에 참여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1904년 12월, 이준을 비롯한 공진회 간부들이 궁내부 관리들을 탄핵하다가 대신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유형 3년을 선고받은 이준은 황해도 해주에 유배되었지만 역시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이준은 계몽활동에 주력했다. 1905년 5월에는 윤효정, 양한묵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창립, 부회장직을 맡았다. 헌정연구회는 근대 법학에 기초하여 국민은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함을 주창한, 법치주의의 확립을 지지한 단체였다. 이듬해인 1906년 4월 이준은 ‘국민교육회(애국계몽단체)’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취임해 국민교육운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전재산을 들여 돈화문(창덕궁의 정문, 보물 제383호) 근처에 야학인 보광학교를 설립해 청년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고종황제가 이준 열사에게 수여한 헤이그 특사 위임장(1907.4.20)
강직함으로 세상에 맞서다

한편, 이준은 강직한 성품으로 고위직 관리들과 번번이 마찰을 빚었고, 모함을 당해 두 차례나 검사직을 박탈당했다. 순탄치 않은 검사로서의 삶이었지만,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법치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점은 정의로운 검사의 표본이 되었다.
그러나 1906년 10월 그의 검사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일어났다. 황태자의 혼례를 앞두고 고종황제가 특별사면을 내렸는데, 이때 법부(1895년 법무행정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에서는 이준에게 은사(특별사면) 대상자 명단을 전달하며 그대로 은사안을 작성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국법상 은사안 작성은 검사의 고유 권한이므로, 이준은 명단대로 진행하라는 요청을 거부했고, 법부에서는 이준이 작성한 은사안 명단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경해 황제에게 보고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준은 1907년 2월 법부 형사국장 김낙헌을 고소했고, 법부는 부하가 상관을 고소했다며 이준을 체포했다. 이때 이준의 석방에 도움을 준 것은 조정 대신들도, 가문도 아니었다. 애국계몽단체 회원들과 백성들, 국민들의 요구가 쇄도하여 3일 만에 석방된 것이다. 한 달 후, 재판장에 선 이준은 태형 100대에 처하는 판결을 받았고, 아래와 같이 항변했다. ‘판사가 일본에서 법률 공부를 했다고 하나, 오늘 보니 법률에 대해서 아주 우매하도다. 임금이 잘못하면 신하가 간하고, 아버지가 허물이 있으면 자식이 간하는 것이거늘, 상관이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못할진대 하관이 어찌 이를 논란하여 책망하지 못하겠는가’ -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5일자 재판광경 그렇다면, 당시 이준의 재판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진 것일까? 이준은 강직함으로 세상에 맞서며 국민교육운동에 앞장서는 등 누구보다 백성들을 생각하며 가까이 소통하는 ‘명연설가’ 검사였기 때문이다.

  •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 가져간 태극기
  •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왼쪽부터)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특사의 임무를 맡다

그러던 어느 날, 이준은 황제로부터 급히 궁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고종은 이준에게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군비 축소와 세계 평화를 위해 열린 국제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을 나가, 을사조약(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 무효임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을 위해 열국의 지원을 요청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특히 오랜 시간 대한제국의 특사 임무를 수행한 미국인 헐버트 박사는 요시찰 인물로 일제의 감시가 집중되고 있으니, 이 기회를 틈타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을 만나 헤이그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왜 하필 이준이었을까? 고종황제는 이준을 아꼈다. 당시 대한제국이 배출한 첫 번째 검사이며,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불의와 불법에 목소리를 내온 정의로운 검사였던 곧고 올바른 성품의 이준은 명연설가이자 누구보다 일본의 불법침탈과 불법 행위를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적임자였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그는 이상설과 재회해 1907년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범진 대한제국 공사를 만났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뒤 일제가 각국에 파견된 대한제국의 외교관들을 모두 국내로 송환했을 때, 유일하게 일제의 부당한 명령을 거절하고, 러시아에 주재하고 있던 외교관이 바로 이범진이었다.
이범진은 미국·프랑스·러시아에서 외교활동을 하며 늘 아들 둘을 데리고 다녔는데, 덕분에 둘째 아들인 이위종은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보기 드문 4개 국어 능통자가 되었다. 이범진은 이준, 이상설에게 아들 이위종을 소개했고, 조국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위종은 세 번째 특사로 합류하여 능통한 불어 실력으로 「한국을 위한 호소문」을 작성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장서」의 공고사를 불어로 번역해 인쇄했다.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태극기를 꺼내 한국의 특사들이 왔음을 헤이그에 공표했다. 숙소 창문 밖으로 대한제국의 태극기가 펄럭였다.

[이준 열사의 ‘헤이그행(1907년 4월 22일 ~ 6월 25일)’] 
								서울 이준 열사(1907년 4월 22일 열차로 부산 항해 출발) - 부산(이준 열사, 4월 23일 배타고 부산 출발) - 블라디보스토크 이상설 합류(4월 26일 도착, 5월 21일 시베리아 횡단 열차편으로 출발) - 하얼빈 - 이르쿠츠크 - 노보시비르스크 - 음스크 - 모스크바 -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위종 합류(6월 4일 도착) - 베를린(6월 19일 도착) - 헤이그(6월 25일 도착)
헤이그에서 평화와 정의를 외치다

이들이 헤이그에 도착했을 때는 만국평화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특사들이 회의장에 들어가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을사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으므로, 일본이 참석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일제처럼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는 나라가 많았고, 그들은 대한제국의 편이 아닌, 일제의 편을 들었다.
3일간의 시도 끝에 특사 일행은 6월 28일 「장서」와 함께 일제의 침략상과 불법행위를 담은 책자를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대한제국이 독립국임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배포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인 6월 29일, 특사들은 평화회의를 주재한 의장이자 러시아 대표인 넬리도프 백작을 무작정 찾아갔다.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가 없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절당했다. 그 다음날 특사들은 평화회의 부회장인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했으나 이 역시 만남을 거절당했다.
한편, 이들의 노력을 눈여겨보던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몰린 인권운동가와 언론인들이었다. 그들은 현장에서 특사들과 인터뷰를 한 뒤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열어주었다.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 셈이다. 그렇게 7월 9일자 「만국평화회보」를 통해 기사 1면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보도되면서 각 나라 신문 기자들에게 대한제국의 간절한 목소리가 널리 알려졌다.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가 전 세계 신문에 실린 것이다.
일제는 이러한 특사들의 노력에 위기감을 느껴 노골적으로 활동을 방해하며 저지하려고 했는데, 이때 이위종의 역할이 눈부셨다. 7월 9일 국제협회 귀빈으로 초대되어 이위종이 불어로 연설했는데, 그의 열성적인 호소는 참석한 각국의 언론인은 물론,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세계 언론의 도움에 힘을 얻은 특사들은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했으나, 역시나 평화회의에서의 발언은 어렵다는 통지로 거절당했다. 평화와 정의를 외치던 각 나라의 권력자들은 아무도 대한제국의 특사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당시 참가국은 46개국이었고, 약 247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 을사조약의 무효화와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평화회의에 참석시켜 줄 것을 요청하며 3인의 헤이그 특사가 각국 대표들에게 전달한 「독립호소문」(1907.6.30)
  • 만국평화회보(1907.7.9, 1면)
이준의 죽음, 그리고 일본의 태도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뒤, 이준은 숙소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당시 황성신문은 그의 자살설에 대해 보도했는데, 이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사학계에서는 이준의 죽음을 자결로 확정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준은 어릴 적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고 거리에서 시위하던 아이였고, 상급자의 부당함을 고소하고 황제에게 청원하던 청년이었으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려 일제로부터 관찰 당하던 인물이었다. 고종황제가 눈물로 호소한 국제사회를 향한 외교적 도움 요청을 위해 조국의 운명을 안고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함에도 이에 굴하지 않고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회의가 끝나는 시간마다 전단을 돌리며 회의 의장과 부의장 집을 찾아가 간절함을 호소했던 애국자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위종의 아내가 아파 이위종은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고, 입과 귀가 막혀버린 이준과 이상설은 헤이그에 체류하고 있었다. 일본 관리들은 즉시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 사실을 외교문서로 전달했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에 대한 궐석 재판(피의자나 피고인이 없는 상태에서 검사와 판사가 진행하는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때 이준과 이위종은 종신형, 이상설은 사형이 구형됐다.
조국의 운명이 걸린 임무를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 이준. 그의 사망소식을 일제는 무조건 막으려 했고, 나중에는 피부병, 건강 악화로 사망했다는 왜곡된 보도를 내보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명징했다. 이준의 자결 소식은 조선 팔도의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도화선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당수의 공직자와 의병장들은 자결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민중들을 모아 그들의 뜨거운 의지가 독립운동으로 계속해서 이어지게 했다. 통시적으로 이준의 죽음을 자결로 추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암울했던 시기, 자결을 선택한 독립운동가들의 행보는 어쩌면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준과 같은 진정한 애국자들이었기 때문인 것이 아닐까?

  • 1907년 7월 25일자 독일 신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실린 헤이그 특사 로이터 통신 인터뷰 기사 (내가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들은 특명을 다하라. 대한제국의 독립주권을 찾아라)
  • 네덜란드 헤이그 외곽 묘지에 있는 이준 열사의 흉상
(왼쪽)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 (오른쪽)이준 열사 유해봉환식 - 국민장 서울운동장(동아일보 1963.10.04, 7면)
이준(李儁) 선생
(1859.1.21. ~ 1907.7.14.)
- 구한말 검사이자 외교관
- 1896년 독립협회 평의원
- 1904년 공진회 회장
- 1906년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
-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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