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을사늑약의 부당함에 맞서
자유독립을 열망한 순국선열

‘민영환 선생’

일제의 부당한 을사늑약* 체결에 개탄하여 스스로의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 자결을 결행한 민영환 선생. 죽음으로서 자유독립 열망 의지를 보인 그의 행보는 항일 민족정신을 드높여 의병운동과 구국 계몽운동의 불씨가 되어주었다. 기울어진 대한제국의 운명을 바로잡지 못해 선택한 민영환 선생의 자결 순국은 망국에 대한 신료의 책임을 지고 속죄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 을사늑약 :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승승장구하다

민영환은 1861년 흥선대원군의 처남인 민겸호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입양됐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한 민영환은 1877년에 어린 순종을 가르치는 동몽교관이 됐으며, 이듬해 17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여흥민씨(명성황후 집안) 후광을 등에 업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1881년 동부승지(지금의 민정수석),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지금의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다.
1882년 6월,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구식군대의 불만과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시도 등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이때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됐다. 이후 1884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민영환은 오늘날의 각 부처 장관, 청와대 각 분야 수석, 국무총리, 대사 등을 두루 역임했다. 갑신정변 이후 급진개화파 김옥균 일행에게 공격당한 명성황후 조카 민영익이 가지고 있던 지위와 역할이 그에게 인계된 셈이다.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
(앞줄 왼쪽 세 번째가 민영환)
근대화에 눈을 뜨다

1894년 세금 감면과 일본 배척을 요구하는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농민 봉기인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당시 지배층에 속했던 민영환 역시 동학군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같은 해 12월 러시아에는 니콜라이 2세가 황제로 즉위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서의 세력 우위를 점하고자 1894년 청·일전쟁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요동반도를 점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연합하여 요동반도에서의 일본 철수를 요구하는 삼국간섭을 펼쳤고, 이로 인해 일본의 뜻이 좌절되면서 조선에서의 세력이 약화됐다. 이에 일본이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민영환은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그는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자기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에 파견되어 상주하면서 자기 나라 정부를 대표하여 외교 업무를 수행하도록 특명을 받은 외교 사절)로 임명되어 윤치호·김득련·김도일 등을 대동하고 참석했다. 이때 인천을 떠나 상해·나가사키·동경·캐나다·뉴욕·런던·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여장을 풀었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그해 10월 하순 귀국했다. 당시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개통하기 전이어서 총 6개월의 시간이 걸렸고, 이때의 기록을 정리한 여행기가 바로 「해천추범」이다. 이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민영환은 근대화에 눈을 뜨게 되고, 이때부터 개화파 관료로 변모하게 된다.

정치, 군사제도 개혁을 주장하다

귀국 후, 고종은 민영환을 다시 불러 군부대신으로 임명했고, 이때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했다. 이른바 ‘광무개혁(1896년부터 고종 및 정부의 개명(開明)된 집권층이 주도한 근대적 개혁이다. 고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칭하면서 자주국가임을 선포하여 고종은 광무황제로, 민비는 명성황후로 호칭을 변경했다)’이었다. 민영환은 군대의 근대화를 주장했는데, 이를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1897년 1월 민영환은 영국· 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6개국의 특명 전권공사로 발령받고 유럽에 체류하면서 공사 자격으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하던 중 손병균·김병옥 등을 대동하여 러시아에 들러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인사차 각국 외교 사절에 방문했다. 이때의 기록을 「사구속초」라는 책으로 남겼다. 이처럼 두 차례의 해외여행으로 각국의 발전된 문물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했고, 귀국 후 ‘독립, 자강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 하여 민권 신장, 의회 설치를 주장하며 정치 개혁을 위한 여론을 선도하는 등 독립협회의 취지에 적극 동의하며 후원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당시 어용 단체 황국협회(독립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수구파(守舊派)가 주동하여 조직한 단체)의 지탄을 받았는데 “독립당을 옹호하며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직당했다. 결국, 의회제도 도입은 완전히 좌절됐다. 상해 임시의정원이 1919년 4월에 설립된 것을 생각하면 약 20여 년을 앞선 행보였다.

1904년의 민영환
자결로 전한 자유독립의 열망

민영환은 일본을 매우 싫어한 온건 친러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친일파 관료인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및 일진회 회원들과 대립했다. 그리고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며 친일 내각과 대립했기 때문에 권력이 전혀 없는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한다. 1905년 잠시 참정 대신·외무대신을 역임했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난 뒤 외교권 강탈을 우려하며 무장이었던 한규설을 총리대신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를 소두(상소문에서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즉 주동이 되는 사람)로 하여 백관들과 연소(여러 명이 올린 상소문)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을사5적(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 했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비답(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가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며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재판소)에 끌려간 뒤 풀려났다.
그 뒤에도 민영환은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육의전)에 모여 소청(유생들이 모여 건의를 하거나 상소를 하던 집)을 설치하여 항쟁할 것을 의론했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달았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했다. 본가에서 자신의 명함에 유서 3통을 남기며 자결했는데, 백성들에게 보내는 유서, 광무황제(고종)에게 보내는 유서, 그리고 외국의 외교 사절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유서였다. “오호라!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민)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 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1905.12.01. 대한매일신보에 공개된 민영환의 유서-

민영환은 서구식 명함 앞뒷면에
동포, 황제, 각국 공사 앞으로 세 통의 유서를 남겼다.
당시 도화서 화원이었던 양기훈이 그린 혈죽도
(고려대 박물관 소장)
혈죽으로 다시 피어난 항일정신

조금 독특했던 것은 그의 자결 방식이었다. 당시 조선은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하여 부모에게서 받은 신체를 손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유교적 효사상이 만연했기에, 사약을 마시거나 목을 매는 형태의 자결 방식만 이뤄졌다. 그런데 민영환은 전혀 다른, 할복을 선택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병세를 비롯한 많은 인사가 연이어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했다.
그의 자결 1년 후인 1906년, 그가 자결했던 자택의 방안 마룻바닥에서 대나무가 돋아났다. 실내에서 대나무가 자라는 것이 무척 드문 일이라 사람들은 그의 피가 대나무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를 ‘혈죽(血竹)’이라고 일컬었는데, 일본은 이것을 조작으로 의심하고 조사 후 뽑아버렸으나, 그의 부인이 뽑힌 혈죽을 수습해 기증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박물관에 잘 보존돼있다. 놀라운 사실은 대나무 잎의 개수가 45개로, 순국 당시 그의 나이와 정확히 일치했다는 점이다.
사망 후 민영환은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대신(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의 최고 훈장인 대훈위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이 추서됐으며, 충정공(忠正公)의 시호를 받았다. 광무황제가 사망한 뒤에는 광무황제의 종묘에 배향됐다.
2018년, 민영환의 증손녀 민명기 작가가 민영환의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소설인「죽지 않는 혼」을 집필했다.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위정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위인임이 틀림없다.

현재 보관되고 있는 혈죽.
민영환 후손들이 보관하다 현재 고려대 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민영환의 동상(조선 말기 우편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이었던 서울우정총국 옆) 조계사 경내에 있는 민영환 집터 표석 많은 인파로 뒤덮였던 민영환의 장례식
민영환(閔泳煥) 선생(1861.8.7.~1905.11.30.)
- 독립운동가
- 한말의 문신, 순국지사,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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