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에세이

올해도 그 아이의
겨울이 따뜻하기를

「에세이」는 교사의 마음이 느껴지는 공감 에세이로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으면서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코너입니다.
※ 학생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 박미정 선생님은 교실에서 학생들과 눈 맞추며 책을 읽어 주고, 시끌벅적 책 수다를 나누다 학생들과 진하게 통(通)하는 순간,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교사입니다.
  • 글. 박미정(서울두산초등학교 교사)

“5학년 때는 어떻게 지냈어?”
“음… 그냥 엄청 재미있었지요. 하하~”
내가 타준 코코아를 홀짝홀짝 마시며 진우가 답한다. 6학년 담임이 되고서 제일 처음 한 일이 아이들과 일대일 상담을 하는 거였다. 작년 담임선생님은 진우 녀석 이름만 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 년 내내 충동적인 말과 행동으로 학급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몇 가지 에피소드만 전해 들었는데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정말 해맑게 작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친구들과 선생님을 놀려 먹은 이야기, 수업 시간을 엉망으로 만든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진우는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많이 컸고, 목소리와 몸동작도 컸다. 수업 분위기를 흩뜨리는 말을 자주 했고, 이름이나 외모로 친구를 놀리는 데 능숙했다.
“선생님, 이거 꼭 해야 해요?”, “아, 지루해요”라고 서슴없이 말했고, 교과 선생님께 버릇없이 굴어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날 나의 고민은 이어졌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냥 진우를 많이 사랑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일대일 상담을 할 때 “진우야, 난 진우를 믿고 아낄 거야. 6학년 졸업할 때 진우의 모습이 진짜 진우의 모습이 될 거야” 하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 나는 진우와 약속했다. 진우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진우의 멋진 모습을 기대하기로. 그렇게 나는 진우에게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었다.
진우가 교과 선생님께 버릇없는 행동을 한 날이면 진우와 함께 가서 죄송하다 사과 드렸다. 진우에게 “우리 진우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자주 말해줬고, 진우가 “선생님 코코아 타 주세요” 하면 언제든 주려고 코코아도 잔뜩 사뒀다. 한편으론, 진우의 말과 행동을 기록해뒀다.
정말 진우가 어떤 아이인지 알고 싶었다. 내가 ‘들었던’ 진우와 ‘직접 본’ 진우가 같은 사람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 진우의 거친 행동 뒤에 있는 진짜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우에 관한 나의 기록에는 ‘OO의 급식 디저트 에그타르트를 몰래 먹어버림’, ‘친구 OO에게 뻐드렁니라고 놀림’, ‘복도에서 야구를 함’처럼 문제 행동을 주로 적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 급식 먼저 받으셔야 한다고 챙김.’, ‘독서 기록을 쓰기 싫다고 하다가 쓰는 방법을 일러주니 끝까지 씀’, ‘하교 후 교실을 자발적으로 청소함’처럼 긍정적인 행동 기록이 늘었다.
보름 후 그동안 적은 기록을 쭉 살피는데 감동이 밀려왔다. 내가 ‘본’ 진우는 내가 ‘들었던’ 진우와는 달랐다. 진우는 원래 규칙이나 격식을 지키는 것을 못 견뎌하며, 에너지가 넘쳐 몸을 충분히 움직여야 하는 아이였다. 악의 없이 그저 충동적으로 말하고 행동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진우를 존중하고, 아끼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진우도 그만큼 나를 아끼고 존중해주었다. 진우는 그냥 진우였다. 그러고 보니 진우가 바로 하교하지 않고 교실에서 놀다가는 날이 많아졌다. 빈 교실에 벌렁 누워 옛 노래를 부르거나 나와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늦게 집에 갔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선생님, 코코아 타 주세요” 했다. 늘 내 주변을 맴돌며 이야기 나누고 싶어 했다.
그맘때였을까. 늦은 오후에 진우가 교실에 남아 “선생님은 책을 읽어서 그렇게 차분한 거예요?” 하고 물었다. 나는 무심하게 “응… 성격도 원래 좀 그렇고”라고 했다.
진우는 내 책상 가득 쌓인 책을 뒤적여 책 한 권을 골라 교실 바닥에 벌렁 누웠는데, 하필 그 책은 내가 공저한 책이었다. 교사들이 쓴 교육 에세이 모음집인데, 진우는 내가 쓴 글을 찾아 조용히 읽어나갔다. 초임 시절 6학년 담임하며 만났던 한 아이의 마음을 잘 살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마음을 담은 글이다. 한참을 읽던 진우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아, 선생님이 그래서 아이들한테 잘해주시는구나” 했다. 글에 담긴 내 마음을 다 읽었다고, 선생님 마음을 이제 알겠다고 했다. 그날부터 진우는 듬직한 내 편이 돼주었다. 내가 하는 말이면 다 좋다고 했고, 내가 하자는 것이면 뭐든 즐겁게 해줬다.
그렇게 진우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권해주는 책을 열심히 읽고,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방과 후에 운영하는 책모임에도 참여해 졸업식 3일전까지도 활동했다. 또한 선생님들은 책모임을 하자는 진우의 초대를 흔쾌히 받아들여 책을 읽고 시간을 내어 우리 교실에 와 주셨다. 진우는 선생님들이 좋아하고 아끼는 학생이었다. 나는 원래부터 진우가 그런 아이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진우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이다.
흰 눈이 내린 운동장에서 꽁꽁 언 손으로 농구공을 튀기던 진우에게 나는 따뜻한 코코아를 타 주었는데, 진우가 참 맛있게 마셨다. 진우도 그때 마신 코코아를 기억할까? 올해도 진우의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겠다.
분명 진우는 잘 지낼 거다. 진우는 그냥 진우니까.
원래 멋진 진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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