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The–K 명사 인터뷰

관념의 행복을 넘어
경험의 행복으로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 이제까지 행복을 오해해왔다.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생각을 바꾸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서은국 교수는 행복에 관한 사람들의 오랜 고정관념에 ‘왜?’라는 의문을 던진다. 행복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심리학자인 그는 행복은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새해의 첫 장을 넘기며, 진정한 행복의 기원이 궁금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The–K 명사 인터뷰」는 각 전공별 명사가 된 교수들을 인터뷰하는 코너로, 교육가족이 명사의 교육 가치관과 철학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 글. 정라희
  • 사진. 김도형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진화의 산물

여러모로 행복하기 힘든 시절이다. 대단히 성공한 인생을 바라지는 않았는데, 요즘 같아서는 행복한 삶 자체가 요원하게 느껴진다. 주변에서는 ‘생각을 바꾸라’고 조언한다.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뜻대로 행복해진 적은 없다. 그러니 지난 수천 년간 철학자들이 행복이라는 난제를 사유해온 것이 아닐까. 하지만 서은국 교수는 행복에 관한 사람들의 오랜 전제를 완전히 뒤집어서 살펴보기로 했다. 인간은 왜 행복을 경험하는지, 그리고 그 경험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관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이 말해온 틀 안에서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수천 년 전에는 그렇게 접근할 수도 있었겠지만, 인간에 관한 연구가 진척된 지금 시점으로 보면 다분히 세상을 인간 중심으로 본 것이라 할 수 있죠. 인간이 수준 높은 정신성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것은 지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언뜻 그래 보일 수는 있어도 그 역시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명체의 과제를 해결해가는 중간 경로일 뿐입니다.”
서은국 교수 역시 한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관점에서 행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에드 디너(Ed Diener) 교수의 논문을 읽고 행복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었다. 에드디너 교수는 행복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인물로, 서은국 교수는 행복 분야 권위자인 에드 디너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행복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심리학계에서 행복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곳은 에드 디너 교수 연구실이 유일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심리학자가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후속 연구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서은국 교수의 논문은 계속 인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벨상 수상자의 논문이 3~4만 번 인용되는데, 그의 논문 인용 횟수는 어느덧 6만 5천 번을 넘겼다. 이 사실만으로도 심리학계에서 이 분야의 화제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서은국 교수는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은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의 저서
「행복의 기원」 마지막 장에서
행복의 핵심을 사진 한 장에 담는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일 것이라고 서술하기도 했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

서은국 교수는 행복을 ‘이상향’으로 바라본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관점을 뒤집어 진화론의 시각에서 ‘왜 인간은 행복을 느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2014년 출간한 「행복의 기원」은 반평생 행복을 탐구해온 기록을 대중적으로 정리한 책이다. 책이 세상에 나온 지 몇 해가 흘렀지만, 변함없이 많은 사람이 행복의 기원을 찾아 이 책을 집어 든다. 막상 책을 펼치면 ‘행복은 비움이나 감사, 느림’이라는 따스한 위로는 없다. 오히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이라는 냉정한 분석을 앞서 강조한다.
“심리학은 사회과학 중에서도 과학에 더욱 가까운 학문입니다. 대표적인 심리학 연구 중 하나인 매슬로우의 ‘욕구 피라미드’에는 잠재적으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 있어요. 먹고 자는 등 기본적인 생리 욕구를 채우고 나면 자아성취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거죠. 그런데 인간도 동물과 전혀 다르지 않아요. 사람들이 의식하지는 못해도 그러한 성취 역시 생존과 재생산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진화론 관점에서 바라본 행복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고 후대에 DNA를 남기기 위한 수단이다. 고대에는 인간이 장기적으로 생존하려면 끊임없이 자원을 확보하고 매력적인 이성과 짝을 지어야 했다. 그러자면 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인간의 뇌는 두려움을 이기고 낯선 땅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찾아오는 위협을 부정적 정서로 감지했고,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 긍정적인 정서로 보상을 받았다. 쾌감과 불쾌감은 인간이 생존하는 데 유리한 신호였다. 그래서 서은국 교수는 “적재적소에 맞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행복을 위한 조건, 결국은 사람이다

행복의 조건은 더 많이 가지는 데 있지 않다. 돈이나 학력같은 외적 조건은 행복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사건을 적어보라”고 했을 때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 답은 복권 당첨이었지만, 실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행복감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당첨자와 비당첨자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물질로 얻은 쾌감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비교의식과 물질주의가 강한 한국 사회가 높은 경제 수준에도 여전히 행복감이 낮은 이유다.
5년 혹은 10년 전 그의 수업을 들은 졸업생들이 문득 그에게 메일을 보내오기도 한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교수님 이야기가 옳았다’는 반응. 서은국 교수는 의외로 “이런 메일을 자주 받는다”라고 말한다. 몇몇 졸업생은 대중이 전형적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는 상황에서 벗어난 삶을 택하기도 했다.
서은국 교수는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타고난 외향성이 행복감을 더욱더 잘 느끼게 하지만, 내향적인 사람도 혼자 있을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좀 더 행복감을 느낀다. 그는 「행복의 기원」 마지막 장에서 행복의 핵심을 사진 한 장에 담는다면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일 것이라고 말했다.
첨단기술이 발달한 문명 가운데 살아도 변함없이 원시 시대에 머물러있는 인간의 뇌가 제일 강하게 반응하는 두 가지가 ‘사람’과 ‘음식’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누군가를 만나 음식을 먹기도 어려운 시기이지만, 서은국 교수는 직접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을 “불필요한 관계를 줄이고, 그동안 소홀히 했던 중요한 사람들에게 집중할 기회”로 삼으라고 조언한다.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보다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책 속의 문장과 연결되는 한 마디. 에드 디너 교수가 논문 제목으로 삼았던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결국,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먼 곳이 아닌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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