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대한민국 공군의 초석을 세운
창공의 아버지,

‘노백린 장군’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작고한 노백린 장군. 그는 조국 독립을 꿈꾸는 청년으로 먼 타국에서 비행사가 되어 독립전쟁을 위한 항일 비행군단을 조직했다. “앞으로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며 「독립신문」에서 밝힌 그의 신념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자주국방에 있어 공중전력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하고 있다. 평생을 무인과 군인으로 항일 무장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데 헌신한 노백린 장군은 잊지 말아야 할 하늘의 독립운동가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7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청년 시절부터 돋보인 무인의 기백과 강직한 성품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난 노백린은 어릴 적부터 호탕하고 기백이 남달랐다. 메이지 유신(19세기 후반 일본의 메이지 천황 때,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중앙 집권 통일 국가를 이루어 일본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정치적, 사회적 변혁의 과정)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군사전문학교에서 군사 지식을 습득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 후 1900년 10월, 육군 참위(오늘날의 육군 소위)에 임관되어 한국무관학교 보병 교관으로 활동했다. 교관으로서 수많은 조선의 군인을 양성했고 꾸준히 승진하여 육군무관학교장 및 헌병대장을 역임했다.
이후 을사늑약(1905년에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이 체결되면서 1906년 3월 이토 히로부미는 한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 측 고관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노백린도 참석하게 됐는데 현장에 있던 이완용, 송병준 등의 역적을 향해 개를 부르는 것처럼 “워리, 워리” 하며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그때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칼을 빼들어 덤비려 하자 노백린도 칼을 빼어 대응하려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황급히 하세가와 사령관을 말려 더 큰 화는 막았으나 연회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노백린은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1906년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고향인 황해도 송화에 광무학당이라는 민립학교를 세워 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1908년에는 김구, 최명식, 김홍량 등과 함께 해서교육총회(1908년 황해도 지역의 교육을 위해 조직된 교육 계몽단체)를 조직하여 구국 교육 운동을 계속했다.

노백린의 한국무관학교 교관시절 모습 (뒷줄 왼쪽부터 3번째가 노백린)
조국 독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 그리고 비행학교의 탄생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조약(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함을 규정한 조약)이 체결되자 노백린은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 조선총독부에서 그에게 남작 작위를 내리고 은사금을 주었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던 중 중국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조명구와 함께 상해로 가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노백린은 미국 하와이에서 박용만과 함께 항일 군사단체인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해 힘썼다. 원래 미국 내 외국인의 군사 활동은 금지돼 있었으나 하와이 미군 사령관이 이를 묵인 해주었다. 군사시설과 체제는 미국식을 받아들이고 총은 목총을 사용하여 훈련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노백린은 일찍부터 항공 전력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공군력의 확보·육성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는 노백린, 최용덕, 권기옥 등을 공군의 창건 주역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 이들을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로 여기고 있다.
1916년 노백린은 일찍이 교류가 있던 김좌진, 윤치성, 유장렬, 채기중과 함께 대한광복단(1913년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비밀 결사로 조직되어 암살 등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벌였다)을 부흥시켰다. 그 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정착한 노백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잡지 「태평양 시보」를 만들어 조국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운동을 권장하는 활동을 했다. 이후 군인으로서의 선견지명으로 앞으로 전쟁은 육군력보다 공군력이 좌우할 것이라 믿고, 비행사(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지역 유지들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에 나섰다. 그의 열의에 감동한 국민회(1909년 미주 지역의 한인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단체) 중앙총회 총무 곽임대는 매달 600달러씩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이로써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북방 윌로우스에 기지를 건설하고,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할 수 있었다.

뒷줄 왼쪽 이승만, 뒷줄 오른쪽 노백린(1920년 초 워싱턴)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1919년, 노백린은 최초 한성 임시정부 군무부 총장을 역임하고 있었고, 만주를 거쳐 상해로 건너갔다. 1919년 4월 2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창설에 참여해 의원에 선출됐다. 그 뒤 4월 10일,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총장에 임명되고,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이동휘,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강화 회의(1919년에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위하여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개최한 강화 회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선발됐다. 그는 이동휘, 류동렬, 신채호, 박용만 등과 함께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쪽에 속했다.
노백린은 정치인으로의 삶을 마무리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찾아갔다. 그는 곽임대의 주선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쌀농사로 엄청난 거부가 된 김종림을 소개받았다. 노백린이 김종림을 만나 새로운 비행 군단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김종림은 양성소 건설에 필요한 각종 항공시설 일체를 도맡을 것이며 매달 3,000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비행 군단 조직은 김종림을 총재로 추대하고 노백린은 총무, 곽임대는 훈련생 감독을 맡기로 했다.
드디어 1920년 5월에는 연습용 비행기 2대와 비행사 노정민, 박낙선, 우병옥, 오림하, 이용선, 이초 등 한인 7인을 초빙하여 교관으로 삼았고, 7월 5일 캘리포니아주 북부의 소도시 윌로우스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비행학교가 문을 열었다.
16만㎡ 부지에 활주로를 갖춘 뒤 본격적으로 정식 교육이 시작됐다. 교관은 미국인 프랭크 브라이언트와 노백린 장군이 만났던 레드우드 비행학교 출신들이 옮겨 와 맡았다. 스탠더드(Standard) J–1 훈련기 2대로 학생 30명에게 비행술을 교육했고, 군사 전략과 영어도 가르쳤다. 1918년 영국에서 최초의 독립적인 공군 부대가 창설된 것에 비추어보면,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비행학교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택이었다. 이후 연습용 비행기는 5대로 늘어났으며, 1922년 6월에는 학생 수가 41명에 달했고, 1923년에는 총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해냈다. 항공술을 배운 졸업생들은 의기가 충천하여 “도쿄로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김종림은 훗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환갑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주 방위군에 입대했으며, 그의 두 아들도 미국 해군으로 태평양 전선에 나서 일본군과 싸웠다.

군무부 포고 제1호(1920).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백린 군무부총장이 군인의 양성과 군대편성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대한민국 군인으로 지원할 것을 권유하는 포고문(위)과 노백린과 김종림(아래)
1920년 2월 미국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노백린 임시정부 군무총장(가운데)과 한인 청년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비행학교 교관과 학생들(왼쪽)과 비행 훈련장(오른쪽)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별이 지다

노백린은 1922년 6월 국무총리 서리, 1923년 1월 정식 국무총리에 추대됐다. 1925년 3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당하여 면직되자, 후임자 박은식이 노백린을 다시 국무총리로 임명했고, 노백린은 교통 겸 군무부 총장직을 겸하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노백린은 1925년 4월 임시정부 국무총리직을 스스로 사임하고, 한 달 뒤 참모총장이 되어 독립군 육성에 헌신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상해 프랑스 조계지 단칸방에서 별세했다. 삶의 끝자락까지 군인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려 했던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그는 상해에 있을 때 늘 주린 배를 안고 생활해야 했지만, 낙천적인 기질을 잃지 않았다. 평소 가족에게 말하던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라”는 말이 유언이 되어버린 그는 평생 소원하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후학들은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으며 나라 없는 슬픔을 달랠 길이 없었다.
노백린은 대한민국 공군을 만든 초대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의지는 후대로 이어졌다. 장남 노선경은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했고, 둘째 아들 노태준은 광복군으로 항일전선에 나섰다. 딸 노순경은 3·1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중국에서 독립군을 지원했다. 노순경의 남편 박정식은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있을 때 독립군에게 자금을 댔고, 중국 하얼빈으로 건너가서 직접 독립군을 치료하기도 했다. 박정식은 대한제국군 해산에 항거하며 권총 자살을 했던 박승환의 아들이다. 이처럼 조국을 사랑하는 노백린 가문의 의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큰 주춧돌이 되어주고 있다.

임시정부에서 활약할 당시 촬영한 것으로
생애 마지막 찍은 사진
노백린의 묘
노백린(盧伯麟) 장군(1875.1.10.~1926.1.22.)
- 독립운동가
- 1904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학교장 역임
- 1907년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안창호, 윤치호 등과 신민회 조직
- 1920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비행학교 개교
-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취임
-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숨은 퀴즈 찾기 ①
정치인으로의 삶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찾아간 노백린은 곽임대의 주선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쌀농사로 엄청난 거부가 된 이 사람을 만나 양성소 건설에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비행 군단 조직의 총재로 추대된 이 사람의 이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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