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55] 인생 2모작

술 익듯
사는 맛이 깊어지다

전통주 연구가 김영순 회원 (前 동국대 화학과 교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랬다. 혹자는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혹자는 그래서 재미있는 거라고 말한다. 김영순 회원은 뜻대로 되는 것은 뜻대로 되는 것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또 거기에서 재미를 찾는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인생에 실패란 없다는 것. 김영순 회원이 자연을 가까이하며 깨달은 삶의 지혜다.
  • 글. 이성미
  • 사진. 김도형

배우고 익히기 좋아하는 화학과 교수님

산 좋고, 물 맑은 고장 포천(抱川). 예로부터 ‘물이 많은 골’이란 뜻에서 ‘물골(谷)’이라 불렀다는 이곳에 좋은 물과 쌀로 술을 빚는 김영순 회원이 있다.
“서울 근방에도 이렇게 물 좋고 바람 좋은 곳이 있답니다. 예로부터 지명에 천(川) 자가 들어간 곳은 산수가 좋다고 해요. 물이 맑으니 술 빚기에도 아주 좋고요.”
교수이자 연구자로 반평생을 살아온 김영순 회원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과 어울려 장을 담그고, 술을 빚어 나눈다. 천연 염색도 한다. 술 빚기나 천연 염색을 배우고 싶다며 멀리서 찾아오는 이도 제법 많다. 퇴임 후 강단을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내려오고 보니 온 세상이 커다란 강의실이다.
젊은 시절, 화상(畫像)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김영순 회원은 복사기의 인쇄 부품 개발에 몰두해, 복사 방식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는 데 족적을 남겼다. 1984년부터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동국대학교 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1994년에는 한국화상학회를 만들어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도 계속했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여학생 실장을 하면서, 그는 여학생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여학생들에게 권하기에 좋은 취미라고 여겨지거나 흥미가 이는 분야가 있으면 자신이 먼저 달려가 배웠다. 그렇게 민화를 배우고, 민화의 실용도를 높이기 위해 가죽 공예를 배우고, 천연 염색을 배웠다. 전통주 공부도 했다. 또 한 번 배우기 시작한 것은 쉽게 놓질 않으니 어느덧 10년, 20년이 지나 각 분야 전문가의 경지에도 이르게 됐다. 인생 2막의 삶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취미 활동 시간을 밤에서 낮으로 옮겨왔을 뿐이다.
“저는 지금의 삶이 인생 2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굳이 구분 지을 필요 없이 예나 지금이나 하던 일을 하는 걸요. 여전히 배우고 익히는 것이 재미있고요. 지금도 과거와 다름없는 나 ‘김영순’이에요.”

실패는 없고 즐거움만 남는 전통주 빚기

80여 가지 전통주를 담글 수 있지만, 정작 김영순 회원은 술을 못한다. 대신 남편 한상현 회원의 전통주 사랑이 각별하다. 전통주 공부도 한상현 회원이 “술을 좀 담가 먹어 봅시다”라고 권한 것에서 시작됐다. 도전을 즐기는 그에게는 반가운 소리였다. 남편에게 건강한 술을 줄 수 있다면 보람도 있을 터였다. 게다가 술 만드는 과정도 생각보다 간단했다. 먼저, 주재료인 멥쌀, 찹쌀을 여러 번 씻고 불려 고두밥을 짓는다. 밥과 햇볕에 말린 누룩, 물을 섞어 발효시킨다.
숙성되면 걸러서 맑은 술만 따라낸다. 이 방법대로 하니 첫 작품부터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기뻐하기도 잠시, 두 번째 시도는 결과물이 영 시원치 않았다. 레시피가 성공을 가르는 기준이 아닌 탓이었다.
“술 빚는 것은 농사짓는 원리와 비슷해요. 언제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지는 책을 보고도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이론보다 더 정확한 것은 경험을 통해 얻은 농사꾼의 ‘감’이에요. 하늘도 도와야 하고요.”
그는 전통주 전문가인 북촌전통주문화연구원의 남선희 선생을 찾아갔다. 그리고 5년 동안 술 만드는 법을 배웠다. 전통주는 된밥, 진밥, 죽 중 어느 밥으로 짓는지, 어떤 물을 사용하는지, 어떤 지역에서 어떤 계절에 빚는지 등에 따라 맛이 전혀 달라진다. 그렇게 쌀을 주재료로 지을 수 있는 술만 200여 가지가 넘는다. 술이 익듯 감이 익어가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술을 빚으면 저절로 깨닫는 것이 있어요. 실패해도 실패가 아니라는 거예요. 술이 잘못되어도 술지게미를 버리지 않고 물을 섞어주면 식초가 되니까요. 술 빚기가 좋은 이유도 여기 있어요. 자연에서 온 것을 버리는 것 없이 취할 수 있으니 참 좋습니다.”
현재 김영순 회원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광릉숲을 기반으로 주민 공동체 ‘숨 쉬는 우리 술’을 만들어 매년 우리 술 체험행사를 진행한다. 송파여성문화회관에서 진행하는 ‘맛있는 우리 술과 발효 이야기’ 강좌에서도 김영순 회원을 만날 수 있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함께 전통주 만드는 법을 배우던 사람들과 ‘기주회’라는 모임을 구성하고, 두 달에 한 번 모여 만든 술을 시음하기도 했다. 또 포천의 작업실 마당에서는 천연 염색도 가르친다. 완성된 민화 작품은 전시회에 출품한다. 최근 몇 해는 주춤했으나 “예나 지금이나 바쁘다”라는 그의 말은 진정 참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삽니다

김영순 회원의 취미 생활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모두 ‘자연’ 과 ‘전통’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손길에 해와 바람, 공기가 닿아 만드는 술과 자연의 색을 옮겨오는 천연 염색,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는 민화, 모두 자연에서 재료와 영감을 얻고, 전통에서 정신을 이어온 것이다.
“주변에 있는 재료로 누구나 전통주를 만들 수 있어요. 소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봄에는 어린 싹으로 송순주를, 여름에는 꽃으로 송화주를, 가을은 열매인 잣으로 송자주를 만들고, 겨울에는 소나무 마디로 송절주를 빚을 수 있으니까요. 특히 송절주는 겨우내 웅크렸던 관절의 힘을 회복하는 데 좋은 술이에요. 자연에서 난 재료로 정성을 다해 빚은 술은 향이 깊고, 맛이 좋고, 우리 몸에도 좋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색을 담아내고, 좋은 풍경을 그려내며 자연 속에서 건강하게 지내는 것. 그렇게 자연 속에서 전통을 이으며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것이 김영순 회원의 소망이다. 한 가지 더 바란다면, 늘 그래왔듯 계속 배우고, 아는 것을 나누고 싶다.
“새로운 걸 계속 도전하는 이유요? 없어요. 어차피 사는 건 그 자체가 도전이고, 그래서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흔히 말하는 인생 2막을 살고 있다면, 더욱더 도전하는 것을 주저해선 안 됩니다. 내가 주저하는 만큼 사회에서 멀어지는 것이니까요. 도전하고 배우는 걸 겁내지 마세요. 굳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해도 됩니다. 내가 재미있으면, 그게 성공이에요.”
한 가지 더 당부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미리 찾으라는 것”이다. 인생 2막이라고 해서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 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앞서 찾은 취미를 즐기며, 자연 스럽게 늙어 가면 된다. 어차피 몇 번을 다시 산다고 해도,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뜻을 세우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생기니 말이다. 그렇게 계속 걸으며, 술 익듯 깊어 가면 된다.

“흔히 말하는 인생 2막을 살고 있다면, 더욱더
도전하는 것을 주저해선 안 됩니다. 내가
주저하는 만큼 사회에서 멀어지는 것이니까요.
도전하고 배우는 걸 겁내지 마세요.
내가 재미있으면, 그게 성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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