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인플레이션 압박
늘어나는 빅스텝 금리 인상
이른바 ‘빅스텝’(big step)을 단행하는 주요국 중앙은행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실물 경제에 충격이 큰 조치지만, 이를 감수할 만큼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이 급증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빅스텝’은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설정 시 통상적인 조정폭인 0.25%P 범위보다 큰 조절을 의미한다. 금리가 인상되면 소비와 투자가 줄어들고 자산 가격이 하락하며 실업률이 높아지지만,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다. 결국 빅스텝은 실물 경제를 희생해서라도 물가 상승을 확실히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시장에 역대급 유동성이 풀렸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세계의 공급망이 붕괴하면서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으며, 올해는 대부분 국가에서 목표치를 훌쩍 뛰어넘는 인플레이션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 앞으로 세계 경제는 인플레이션과 금리의 압박으로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
글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조영무 연구위원은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미국 콜로라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으로서 지난 20년 동안 국내외 거시경제와 금융시장을 분석해왔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국토교통부, 외교부 등 여러 정부 부처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KBS, MBC, SBS, YTN 등 주요 방송사의 뉴스, 대담, 토론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와 기회에 관해 이야기하는 「제로 이코노미」라는 책을 발간했다.
쫓기듯이 금리 인상하는 중앙은행들
5월 FOMC(미국의 통화정책결정회의)에서 미 연준(미국의 중앙은행)이 0.5%P 금리를 인상하면서 이른바 ‘빅스텝’이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통상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0.25%P씩 금리를 조정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정도의 금리 조정 폭은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작은 걸음걸이’와 같이 작은 보폭이라는 의미로 ‘베이비스텝(baby step)’이라고 불린다.
베이비스텝의 2배에 달하는 빅스텝 금리 인상이 단행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미 연준이 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금리 인상 기조 속에서 다른 나라들도 금리 인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8월부터 미국보다도 먼저 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0.5% 수준까지 인하되었던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올해 2%를 넘는 수준으로 인상될 전망이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금리 인상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빠르고, 앞으로도 빠를 것으로 예상된다.
시카고 선물거래소에 상장되어 거래되는 ‘연방기금금리 선물’은 미국의 정책금리 수준을 대상으로 한 파생금융상품인데, 이 가격에 반영된 금융시장 참가자들이 예상하는 내년 중반 미국의 정책금리는 3% 중반 수준에 달한다.
결국, 미국의 정책금리가 우리나라의 정책금리보다 높아지는 ‘한미 정책금리 역전’은 시기의 문제일 뿐 현실화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금리가 더 높은 미국으로 자본이 빠져나가는 자본 해외 이탈에 대한 우려가 향후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 들어 국내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자본 이탈이 이어지고 원화 가치가 하락하면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국내 금융시장의 불안감은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예상보다 심각해진 인플레 압력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마치 쫓기듯이 이렇게 금리를 높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물가 상승이다. 올 4월 미국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8.3%에 달했고,
영국 및 유로존의 소비자 물가상승률도 각각 9%와 7.5%까지 높아졌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은 낮은 편임에도 4.5%까지 올랐다.
이들 국가의 중앙은행들이 목표로 하는 물가상승률 목표 수준이 공통으로 2%임을 감안하면 최근 물가상승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오랜 기간 저성장과 낮은 물가상승률을 경험하면서 잊혀졌지만 원래 중앙은행들의 별명은 ‘인플레이션 파이터’다.
중앙은행 시스템이 만들어진 역사적인 계기가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정부가 마음대로 돈을 찍어내면서 경험했던 극심한 인플레이션, 즉 ‘하이퍼 인플레이션’이었기 때문에,
태생적이고 근본적인 중앙은행들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물가상승률의 안정적인 관리이다.
문제는 현재 상황에서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급하게 올리고 돈을 빨아들이면 과연 인플레이션이 진정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최근 물가상승의 주된 원인이 국제 에너지 및 원자재, 곡물 가격의 급등과 코로나 확산을 막으려는 중국 봉쇄 정책의 충격임을 감안하면 전망은 밝지 않다. 미 연준이 금리를 올린다고 해서 국제 석유 가격이나 밀가루 가격이 하락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최근의 물가 상승은 경기가 좋아서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기보다는, 국제 에너지 및 곡물 가격의 급등에 글로벌 공급망 충격이 더해진 것이 크다.
그 때문에 풀린 돈을 거둬들이고 대출금리를 높여 수요를 억제하는 통화 긴축의 효과가 과거만큼 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높아지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
급등하는 물가는 경제 주체들의 고통을 가중하고 경제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물가상승세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에너지 및 가공식품 가격이다. 모두 서민들이 안 쓰거나 안 먹기 어려운 품목들이다. 결국 서민 가계가직면하는 체감 물가상승률은 공식적인 소비자 물가상승률보다 훨씬 높을 가능성이 크다.
물가가 오르면 소비도 위축될 가능성이 커진다. 명목임금 상승률이 높더라도 물가상승률이 더욱 높으면 실질임금 상승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의 경우 명목임금은 전년 대비 7% 올랐지만, 물가는 더욱 크게 오르면서 실질임금은 도리어 줄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가계는 소비를 늘리기 어려워지고 경기는 위축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물가는 더욱 오를 수 있다. 실질임금을 보전하려는 근로자들은 더 높은 임금 상승을 요구하고, 기업들은 제품과 서비스 가격 인상을 통해 높아진 비용을 수요자들에게 전가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결국, 높은 물가상승률이 임금 상승을 통해 더욱 높아지는 임금·가격 상승의 악순환(wage-price spiral)이 현실화할 수 있다.
그 결과, 물가 급등과 경기 침체가 결합하면 이것이 바로 스태그플레이션인 것이다.
금리 인상 부작용 해소를 위한 ‘재정정책’의 중요성
이런 상황에서 최근 중앙은행들이 가속도를 내고 있는 금리 인상은 마치 ‘항암제 주사’에 비유할 수 있다. 경제에 커다란 위협인 인플레라는 ‘암’을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이라는 ‘항암제 주사’를 맞은 결과,
암세포를 죽이는 효과와 동시에 경기 침체라는 항암제 주사의 부작용도 동시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팬데믹의 위기 과정에서 가계와 기업의 부채가 급증한 것을 감안하면 금리 인상으로 인한 이자 부담 증가는 경기에 커다란 부담 요인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년까지 향후 상당 기간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은 금리 인상이나 양적 긴축과 같은 통화 긴축 기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렇게 된다면 경기 둔화 및 위축의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 또 다른 정책 수단인 ‘재정정책’이 매우 중요한 역할로 떠오른다.
정부가 많은 돈을 쓰기 어렵다면 같은 돈을 쓰더라도 경제성장률 제고 효과가 높거나, 고용 창출 효과가 큰 부분에 집중적으로 돈을 주입하는 방식이다.
통화정책의 경우 특정한 지역의 금리만 낮추는 식의 선별적 정책이 불가능하지만 재정정책은 필요한 부문에만 돈을 투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향후 정부의 재정정책 운용에 있어 각별한 노력이 필요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