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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스푼

별과 함께 살아온 인생

조경철 박사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6·25전쟁의 부자(父子) 영웅 밴 플리트 장군과 밴 플리트2세
“네가 연희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물리학 공부를 버리고, 정치학이라는 학문의 외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실망이 컸다. 내가 대학에서 천문학 강의를 할 때 너의 공부하는 태도에 감명받았기에, 너를 나의 후계자로 삼아 천문학자로 만들고 싶다. 여기에 미시간대학교 대학원의 천문학과 입학 허가서를 동봉하며, 한국 국비 유학생으로 지명하니 곧 미시간대학교로 떠나거라.” 이 편지를 조경철 박사에게 보낸 사람은 그가 연희대학교 시절 은사였던 이원철 박사입니다. 이 한 통의 편지로 조경철 박사의 ‘별과 함께 살아온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사진 출처: 『과학자 조경철 별과 살아온 인생』, 출판사 서해문집 협조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돌고 돌아 천문학자가 되다

1929년 4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조경철은 6·25전쟁 전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대학생 시절 김일성 암살 모의 사건에 연루되어 곤경에 처한 조경철은 가족과 헤어져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6·25전쟁 때는 국군 장교로서 전투 부대 지휘관으로 참전해 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남한에서 어렵게 다시 대학생이 된 조경철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전공을 바꿔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계속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박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그 무렵 은사의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천문학은 비인기 학문이었지만 청년 조경철은 고민 끝에 은사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미시간대학교로 적(籍)을 옮겼고, 이후 펜실베이니아대학교를 거치며 천문학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조경철은 1962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당시 최첨단 분야였던 식쌍성(빛의 밝기가 달라 보이는 쌍성(雙星)) 관측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어람용 의궤
▲ 아폴로 11호 비행사가 달에 처음 상륙한 순간
어람용 의궤
▲ 아폴로 11호 비행사가 달에 처음 상륙한 순간
직지심체요절
▲ 달상륙 중계 방송의 해설을 맡은 조경철 박사
직지심체요절
▲ 달상륙 중계 방송의 해설을 맡은 조경철 박사
천문학 인기로 달라진 위상

미국 내에서 천문학의 위상을 바꿔놓은 것은 1957년 있었던 구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 발사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천문학과는 지원자가 몰리는 인기 학과가 되었고, 당시로는 흔치 않던 천문학자 조경철 박사는 ‘귀하신 몸’으로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소련과의 치열한 우주 경쟁에 돌입한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천문학 강좌를 속속 개설했고, 조경철 박사는 다섯 대학에서 강의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는 훗날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내가 공부하던 초반에 천문학은 그야말로 ‘파리 날리는 과’였는데 이 스푸트니크호 발사로 우리 과가 일약 인기 학과가 되어 지원자가 몰리기 시작했다. 내가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는 ‘귀하신 몸’을 영입하겠다고 사방에서 초청을 받았다.
1962년에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나 혼자였으니까 말이다.”
박사 학위취득 후 하버드대학교 천체물리연구소를 비롯한 수많은 연구소에서 조경철 박사를 영입하려 했지만, 그는 미국해군천문대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조경철 박사는 미국인이 아니었기에 공무원인 미국해군천문대 연구원이 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해군천문대는 조경철 박사에게 영주권까지 제공하며 임용했을 만큼 그는 꼭 필요한 인재였던 것입니다. 조경철 박사는 미국 항공 우주국(NASA) 우주과학부 연구원을 지내면서 미국 우주 개발 프로젝트가 역사적인 획을 긋는 현장들을 목격 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유인 우주선 제미니(Gemini) 6호와 7호가 랑데부(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우주 공간에서 만나는 일)하는 장면을 관제실에서 볼 수 있었고, 화성 탐사선 마리너(Mariner) 4호가 보내오는 화성 표면 사진을 통해 화성의 분화구를 처음 목격하는 자리에도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어람용 의궤
▲ 대학 동창들과 조경철 박사(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어람용 의궤
▲ 대학 동창들과 조경철 박사(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직지심체요절
▲ 지름 40cm 반사망원경으로 관측 실험을 하는 학생들과 조경철 박사
직지심체요절
▲ 지름 40cm 반사망원경으로 관측 실험을 하는 학생들과 조경철 박사
아폴로 박사의 여정, 외로운 별(고성)

1968년, 조경철 박사는 15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외국 유치 과학자 제1호로 ‘조국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천문학 박사는 조경철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홀로 천문학을 연구하는 ‘외로운 별’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호도 ‘고성(孤星)’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천문학과 우주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달라진 것은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 이후부터입니다. KBS가 아폴로 11호의 발사부터 귀환까지 전 과정을 중계방송했는데, 조경철 박사는 이 방송의 통역과 해설을 담당했습니다. 이후 그에게는 ‘아폴로 박사’라는 별명이 붙었지요. 중계방송 도중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는 그 역사적인 순간,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조경철 박사가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간 일화는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천문학 발전을 위한 그의 바쁜 행보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천문기상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정부의 위촉을 받아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를 창립하고 사무총장을 역임했습니다. 한국국립천문대(現 한국천문연구원) 건설위원장으로서 국립천문대 건립의 주역이 되었고, 경희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공과 대학장·부총장을 역임하면서 우주과학과를 만들었습니다.

별처럼 빛나는 연구 열정
‘자퇴 브이로그’ 들어보셨나요?
▲ 화천 조경철천문대에 세워진 조경철 박사 흉상

‘서민의 친구’라는 애칭을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감투라 여긴다고 밝혀 대중에게 더욱 친근감을 주었던 조경철 박사지만, 학계에서 붙인 ‘탤런트 교수’라는 별명은 마뜩잖아했습니다. 이 별명에는 ‘교수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반적인 교수 활동에 따르는 혜택에서 제외된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논문을 쓰고 활기차게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매일 원고지 20매를 채우고, 평생 200권의 책을 저술하겠다”라고 자기 자신에게 약속한 그는 논문 60편, 2,000편 이상의 기고문, 173권의 저서 등 엄청난 양의 원고를 집필했습니다. 그야말로 말보다는 확실한 결과로 보여준 것 입니다.
천문학 공부를 시작할 때는 ‘외로운 별’이었던 조경철 박사는 이제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명실상부한 ‘스타’가 되었습니다. 1991년 일본의 천문가 와타나베 가즈오가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에 조경철 박사의 업적을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조경철’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경철 박사는 “내가 죽어도 내 소행성은 평생 우주에 살아 있다”라며 행복해했습니다. 또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천문대가 강원도 화천군에 건립되었습니다. 광덕산에 있는 조경철천문대에는 과학의 대중화를 꾀하고, 우주과학 입국을 위해 큰 공헌을 한 조경철 박사의 열정과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조경철 박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별과 함께 살아온’ 그의 삶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며 별처럼 밝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