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성미 / 사진 김수
글 이성미 / 사진 김수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쪽방촌 골목 사이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간다. 점심이면 무료 급식을
받으러 온 사람들로 좁은 골목에 길게 줄이 이어진다. 요셉의원 안으로 들어가는 발걸음도
끊이질 않는다. 남루한 복장에 머리도 헝클어졌지만, 겉모습과 상관없이 병원 봉사자들은
밝은 미소로 환자들을 맞이한다. 이곳 요셉의원을 대표하는 사람은 고영초 원장이다. 올해 2월까지
건국대학교병원 신경외과 교수이자 감마나이프센터장, 의대학장, 의학전문대학원장등을 지냈던 이름난 의사이기도 하다.
어릴 적 그의 꿈은 의사가 아니었다. 그는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열여덟 살까지 가톨릭 신학교에서 심신을 단련하기도 했다. 대입 시험 제도가 바뀌어
어쩔 수 없이 일반고로 편입하면서, 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우선 일반고에 편입하기 위해선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했지만 그는 당당히 합격증을 손에 쥐었다.
더욱이 1년간의 대입 시험 준비만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몇 번이고 해내면서,
고영초 원장은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닐까?’라고 생각했고 운명에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길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1973년, 고영초 원장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가톨릭학생회에 입회해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난곡 지역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를 함께하던 국제가톨릭형제회(AFI, 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가 1975년 금천구 시흥동에 무료
진료소 ‘전진상의원’을 열면서부터는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의료 봉사를 했다.
시간이 흘러 고영초 원장은 대학 병원에서 환자들을 만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신경외과 특성상 열 시간 넘게 수술해야
하는 날도 많았다. 그럼에도 봉사 활동은 거르지 않았다.
수술실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워도 봉사만 하러 오면 힘이 났다. 그 힘으로 1987년부터는 요셉의원에서도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건국대학교병원 신경외과 교수로 부임하고 이듬해인 2006년에는
‘사회의학’이라는 강의를 개설해 학생들에게 의료 봉사의
가치와 의사로서의 소양을 가르쳤다. 봉사의 진정한
가치와 재미를 알게 된 학생들도 의료 봉사 동아리 ‘감사’를
조직하고, 그의 뜻을 이어갔다.
38년간 신경외과 교수로서 그가 병원에서 만난 환자 수는 1만 5,000명,
그중 수술한 환자는 8,000명이 넘는다. 병원 밖에서
만난 환자는 수조차 셀 수 없다. 환자들에 대한 기억도 별처럼 촘촘히 박혀 있다.
30여 년 전, 뇌전증으로 발작이 심한 한 꼬마가 그를 찾아왔다.
세 살 무렵 뇌종양 수술 이력이 있는 환자였다. 약으로는
차도가 없자 당시 근무하던 한림대학교 강남성심병원으로 데려가
정밀검사를 했는데,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생긴 출혈이
종양으로 발전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뇌압이 높아지면서
시력에도 문제가 생겼다. 다행히 수술을 잘 마쳐 더 이상
발작은 하지 않게 되었고, 아이는 잘 자라주었다. 이후 시각장애인
안마사가 되었다며 병원으로 찾아온 그는 따뜻하게
맞아준 고영초 원장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기도 했다.
이처럼 정밀검사나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있으면 고 원장은
상급 병원에 도움을 청해 해결해 주곤 했다. “우리 병원에 모아둔
기금이 있으니 필요하면 환자를 보내도 된다”라며 먼저
연락해 오는 곳도 있었다. 한림대학교 강남성심병원,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건국대학교병원 등 자신의 근무지를
비롯해 인제대학교 일산백병원,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등
대형 병원과 많은 사람의 도움과 배려가 있었기에 고영초 원장은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었다.
병원 밖에서 환자의 생명을 살린 적도 있다. 수두증 합병증의
하나인 요붕증(尿崩症, 소변량이 비정상적으로 많아지는
증상)을 앓던 환자였다. 약 받는 날이 되어도 환자가 찾아오지
않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고영초 원장은 함께 일하던 봉사자와
환자의 집을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환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곧바로 근무하던 건국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해 응급 수술을 한 덕분에 환자는 의식을 되찾았고,
지금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그를 찾아오고 있다. 고영초 원장은
“당시 ‘괜찮겠지’ 하고 넘어갔다면 환자를 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그 후로는 환자가 보내는 작은 신호도 놓치지 않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반세기 동안 함께 쪽방촌을 누비던 20대 청년들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고, 요셉의원을 세워 평생 가난한 자들을
돌보던 ‘영등포의 슈바이처’ 선우경식 원장은 세상을 떠났다.
고영초 원장도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올해 2월에는 교수
생활을 마치고 정년으로 퇴임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건강을 자랑한다.
쉴 틈 없이 시간을 쪼개어 의술을 펼쳐왔음에도
지친 기색조차 없다. 오히려 올 3월에는 요셉의원 원장으로
취임하며 봉사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고영초
원장은 이 모든 것이 봉사의 힘 덕분이라고 말한다.
“요셉의원은 제게 봉사하는 곳이 아닌 안식처입니다. 이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농담을 주고받고 또 환자들을
돌보며 위안을 얻고, 에너지를 충전하니까요. 선우경식 원장님께서
‘진료비가 없는 환자야말로 진정 의사가 필요한 환자’라고 하신 것처럼,
이곳에서 만나는 환자야말로 정말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고요.”
고영초 원장은 “봉사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현명한 사람”
이라고 말한다. 봉사를 통해 얻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으니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의료 봉사를 하는데
반드시 의학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도울 만큼의
재능이 없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분명
내가 설 자리가 있다.
“요셉의원만 보더라도 의료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발,
목욕, 음식 등을 담당하는 분도 계시고 옷, 담요 등 물품을
후원해 주시는 분도 계시죠. 병원 자료를 정리해 주는 분도
계시고요. 골목 한 귀퉁이 작은 병원만 해도 봉사할 일이 이렇게
많은데, 대한민국 전체에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세계로 눈을 돌리면
더더욱 많겠죠. 분명 더 큰 행복과 활력을 얻으실 겁니다.”
고영초 원장의 삶을 들여다보면, 마치 운명이 그를 이곳으로
이끈 듯 보인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항상 스스로
봉사하길 선택했다. 운명이 그를 이끈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낮은 곳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할까요?
고영초 원장의 미소에서 어떤 선택이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지
명확히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