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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돋보기

여행지를 고르지만 말고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사회과교육과 이영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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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 이 말은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용된다. 같은 장소에 가더라도 사람마다 보고 느끼는 것은 천차만별이다.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며 인증 사진을 남기는 데 급급한 여행을 할 때도 적지 않다. 낯선 장소에서의 기분 전환을 넘어 자신에 대한 성찰과 세상에 대한 탐구까지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지리학자 이영민 교수에게 그 길을 물었다.

글 정라희 l 사진 성민하

알고 떠나면 더 재미있는 여행의 지리학

여행을 다녀오면 또다시 여행을 떠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익숙한 장소에서 벗어나 색다른 장소에 이르렀을 때 느껴지는 특별한 매력이 있는 까닭이다. 이영민 교수에게도 ‘여행’은 특별하다. 그는 “지리학과 여행은 똑같이 장소를 바라보고 경험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라고 말한다.
“지리학은 크게 ‘자연경관’과 ‘문화경관’ 그리고 ‘사람으로 구성된 장소’를 연구합니다. 산과 들 같은 지형과 지명에 국한된 학문만은 아니에요. 지리학에서 다루기는 하지만,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특히 지리학 중에서도 문화지리학은 인간의 문화현상이 장소에서 어떻게 펼쳐지느냐에 관심을 두고 연구합니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도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확인한 내용을 토대로 다양한 연구 주제를 발견할 수 있죠. 덕분에 저 역시 자연스럽게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세어본 적은 없으나, 그가 지금까지 다녀온 여행지는 대략 90여 개국. 하지만 숫자로 드러나는 방문 지역을 훈장처럼 여긴 적은 없다. 오히려 몇 개국을 얼마나 다녀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다녀왔다고 해도 누군가는 시드니에서 도시경관을 즐기고 올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황량한 붉은 사막을 보고 올 수도 있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기후와 생태는 달라진다. 그래서 그는 여권에 도장 찍는 재미로 말하는 ‘몇 개국 방문’ 기록이 아닌, 여행자 스스로 얼마나 깊이 있는 여행을 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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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서 출발하는 여행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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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돋보기03 기차를 타고 떠나도 지리적 여행은 가능합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면 어디서든 나만의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은 여행을 계획할 때면 여행지를 선택하는 데 집중한다. 그래서 그는 오래전부터 대중을 위한 여행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단순한 여행지 선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곳을 어떻게 바라볼지’도 아울러 고민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다 2013년부터 교양과목 ‘여행과 지리’를 이화여대에 개설하면서, 이런 생각을 학생들과 공유할 기회가 생겼다. 얼핏 어렵게 느껴지던 지리학이 ‘여행’과 만나니 세계 각국의 자연과 문화가 흥미롭게 전해졌다. 덕분에 이 과목은 수강 신청 시작과 함께 빠르게 마감되었고, 5년 만에 2,000명의 학생이 수강한 인기 강좌가 되었다. 개설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이 과목은 학생들이 손꼽는 인기 교양 강좌다. 2019년에는 강의에서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리학자의 인문여행』 책을 집필했다.
“기존 여행 에세이나 여행 안내서는 주로 ‘여행하는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장소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는 지리학과, 장소와 사람에 대한 낯선 경험을 목적으로 삼는 여행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가 여행지에 가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조우하는 과정에 지리학자로서의 지식과 관점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그래서 어떤 즐거움을 느꼈는지 공유하고자 했습니다.”

조금만 알면 더 크게 펼쳐지는 지리적 상상력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보고 싶은 만큼 미리 알아라’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미술관에서 미술 작품을 볼 때도 느낌에만 의존해 감상할 수 있지만, 화가의 이력이나 기법, 당시 사회적 상황 등을 미리 알고 보면 그 감상이 더 풍성해지게 마련이다. 이영민 교수는 여행 역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여행지를 미리 알고 가면, 여행지에서 스쳐 가는 풍경도 새롭게 다가온다.
“미국 남서부의 사막지대 모뉴먼트밸리에는 돌기둥이 군데군데 서 있습니다. 붉은색 사암층으로 구성된 퇴적암 지대로, 오랜 지질시대를 겪으면서 차별 침식에 의해 뷰트(Butte, 작은 비석 모양의 암석 구릉), 메사(Mesa, 규모가 큰 암석 구릉) 같은 돌기둥이 형성되었습니다. 지리학 용어로 말하면 어렵기만 하죠? 여행자들이 이런 전문 지식을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모래언덕으로 된 사하라사막과 달리 붉은색 암석으로 구성된 사막이라는 점과, 그 사이에 돌기둥이 우뚝 솟아 있다는 점만 알고 간다면 누구든 멋지게 지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모뉴먼트밸리는 낮에 가면 뙤약볕을 견디면서 황량한 모습만 봐야 하지만, 늦은 오후에 천천히 주변 경관을 감상하다 보면 붉은 암석에 석양빛이 드리워 이글이글 타오르는 장관과 검은 물감 번지듯 퍼져가는 태양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이영민 교수는 “여행하기 위해 많은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알고 가도 여행의 즐거움이 달라진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2023년에는 『지리학자의 열대 인문여행』을 펴냈다. 그는 열대를 주제로 삼은 이 책을 통해, 여행과 지리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전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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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떠나도 지리적 여행은 가능합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면 어디서든 나만의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주는 여행,
‘오감’을 동원하라

물론 여행에 모두가 따라야 할 정답은 없다.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에 따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여행이 곧 각자의 올바른 여행법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유적지나 멋진 휴양지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영민 교수는 ‘지리적인 여행은 어디서든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익숙한 동네도 호기심을 갖고 살펴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여행이 ‘좋은 여행’인가 묻는다면 저는 ‘오감을 활용한 여행’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리적 여행의 핵심은 자연경관과 문화경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직접 경험하는 것인데요. 눈으로 보이는 경관뿐만 아니라 소리와 냄새, 맛 등 오감을 통해 다양한 것을 느낀다면 여행에 대한 기억이 더 오래 남을 것입니다.”
별다른 계획 없이 기차를 타고 아무 도시에 이르러 배회하는 여행에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나 현상의 특징을 살피고 ‘왜’라는 호기심의 고리를 따라가며 상상력을 펼치다 보면 자연스레 재미와 의미가 찾아온다. 목적지를 정해 놓고 이동하는 과정이 아닌, 그 자체로 재미있는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셈이다.
“기차를 타고 창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리적 여행을 할 수 있어요. 기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저는 ‘차창 지리’라고 표현하는데, 차창 지리에서 발견한 다양한 요소의 연결성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지식의 한계가 느껴진다면 여행 후에 다시 자료를 찾아보며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는 한 여행지를 갈 때마다 ‘세 번의 여행’을 한다. 떠나기 전 준비 여행, 현지에서 하는 여행 그리고 돌아와서 하는 정리 여행이다. 이렇게 세 번의 여행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여행은 각자의 추억을 넘어 미래의 훌륭한 자산으로 남는다. 이처럼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주는 여행을 위해, 이영민 교수가 추천하는 여행의 동반자는 ‘지도’다. 여행지의 맥락을 알면 세계를 통찰하는 능력도 생긴다. 그렇게 이영민 교수는 지리를 통해 더 많은 이가 새로운 여행의 세계를 경험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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