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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스푼

국민 동요를 만든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동요 작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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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동심을 지켜주는 동요는 대를 이어가며 구전되는 신기한 힘을 지녔습니다. 그중 “푸른 하늘 은~하수”로 시작하는 ‘반달’은 1924년에 발표된 우리나라 창작동요의 효시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윤극영 선생은 아이들을 위한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노래 속 아름다운 선율과 가사는 일제강점기라는 가혹한 현실에 한 줄기 위로가 되었습니다.

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제공처: 윤극영 가옥

*사진 제공처: 윤극영 가옥

꾸준히 사랑받는 윤극영 선생의 창작동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우리나라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동요 ‘반달’을 불러봤을 것입니다. “쎄쎄쎄”라는 예비 박자를 헤아린 후 역동적인 손동작으로 두 사람이 호흡과 박자를 맞춰가는 놀이도 함께 말입니다. 전 국민이 들어 본 이 노래는 1924년 윤극영 선생이 발표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여러 편의 동요를 지었지만 그중 ‘반달’은 ‘국민 동요’ 라고 할 정도로 많이 불렸고, 지금까지도 애창되는 곡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반달 할아버지’라 부르기도 합니다.
‘반달’ 외에도 윤극영 선생이 만든 국민 동요는 많습니다. ‘설날’, ‘고드름’(유지영 작사), ‘고기잡이’, ‘할미꽃’, ‘우산 셋이 나란히’, ‘따오기’(한정동 작사) 등 기성세대의 기억에 남아 있는 많은 동요들이 그의 작품입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로 시작하는 동요 ‘설날’은 ‘고드름’과 함께 꾸준히 사랑받는 우리나라 창작동요입니다. 창작동요는 번안곡이나 번역곡이 아닌, 우리나라 작가가 지은 동요를 뜻하는데, 이는 작사자와 작곡자가 공식적으로 밝혀져야 창작동요로 인정됩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일본 노래를 부르며 한 해를 시작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는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우리 고유의 명절, 설날과 관련된 노래인 ‘설날’을 만든 것입니다. 윤극영 선생은 1924년 한 해에만 오래도록 애창될 동요 수십여 편을 지었는데, 그의 나이 21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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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에 세워진 노래비 앞에 선 윤극영 선생. 현재는 서울어린이대공원으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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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달’ 악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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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방문한 지인들과 윤극영 선생
(오른쪽에서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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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에 세워진 노래비 앞에 선 윤극영 선생. 현재는 서울어린이대공원으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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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달’ 악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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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방문한 지인들과 윤극영 선생
(오른쪽에서 두번째)

우리의 정서를 노래한 동요 작곡가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선생은 1903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다니던 그는 중퇴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학교, 동양음악학교 등에서 바이올린과 성악을 전공했습니다. 선생은 1923년 도쿄에서 방정환, 마해송 등과 함께 ‘색동회’ 창립 동인으로 참가했고, 이후 어린이를 위한 노래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창작동요가 거의 없어 어린이들은 창가나 일본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윤극영 선생은 어린이의 감정과 정서에 맞는, 우리말 창작동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1924년 윤극영 선생은 동요 단체 ‘다리아회’를 조직해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어 노래도 가르쳤습니다. 또 동요 악보를 인쇄해 서울의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동요를 부르게 하자는 생각으로 노래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보급하는 데도 많은 힘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그런 윤극영 선생의 뜻이 담긴 노래는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스며들어 전국 각지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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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극영 선생이 사용하던 책상과 필기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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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극영 선생이 사용하던 풍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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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극영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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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극영 선생이 사용하던 책상과 필기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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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극영 선생이 사용하던 풍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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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극영 가옥

만주에서 톈진까지 이어진 고초

그 시대를 산 많은 사람이 그랬듯, 윤극영 선생의 삶 역시 파란만장했습니다. 1926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음악 교사를 하며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가르쳤고, 1936년 서울로 돌아와서는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거처를 옮겨 1937년 극장 가수로 취직했고, 1940년에는 중국에서 하얼빈예술단을 창립했으나 실패하고, 하얼빈에서 예술 활동을 이어가던 중 경비대에게 붙잡혀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복역 중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1947년 톈진에서 우리나라로 탈출했습니다.
이후 윤극영 선생은 ‘노래동무회’를 조직해 음악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87년에는 동화·동요·그림·연극 등의 활동을 통해 어린이의 심성 계발과 순화를 꾀하는 단체 ‘동심문화원’을 설립·운영했습니다. 동심문화원은 훗날 ‘반달문화원’으로 이름을 바꿔 윤극영 선생을 기념하는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구슬픈 선율 속 희망의 메시지

윤극영 선생의 대표곡 ‘반달’의 가사에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처럼 서글픈 상황이 담겨 있고, 멜로디도 구슬프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어진 가사에서 그는 푸른 하늘과 반달, 은하수, 샛별(금성), 구름을 이야기합니다. 달이 떠 있고 은하수가 보이는 밤하늘이지만 ‘검은 하늘’이 아니라 ‘푸른 하늘’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이렇게 꿈과 용기, 희망을 전파하는 윤극영 선생의 동요는 세대를 넘고 넘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암울하던 시대에 어린이를 위해 동요를 만든 그의 뜻이 아직도 우리 가슴에 따뜻하게 스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