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장
글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장
경북 칠곡군 약목면, 무궁화 열차가 지나가는 낙동강 작은 농촌 마을에는 평생 문맹으로 살아온
1930년대생 할머니들이 산다. 지독한 가난과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고,
시집간 후에는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를 낙으로 삼고 살았다. 이제 자식들은 도시로 떠났고, 남편도
세상을 떠나 홀로 남았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은 이들 일곱 할머니가 성인문예반 ‘늘배움학교’에서
한글을 익히는 내용을 담았다.
“시장, 식품, 채소, 캄보디아, 필리핀, 보리촌 식당. 크게 읽어 봐.” “보뤼촌… 보리밥… 보루찬… 보리촌 식당.”
할머니들은 간판을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그저 신기해 한다. 강금연 할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부치기
위해 난생처음 우체국을 찾았다.
“내 아들, 내가 낳아서 씻긴 물도 안 버리려 했다 / 이제 그 아들한테 미안하다 / 내 몸이 성치 않으니 /
아들과 며느리한테 미안하다 / 자나 깨나 걱정해 주는 / 아들이 참 고맙다 / 밥 잘 먹어라”
- ‘아들아’, 강금연 할머니
곽두조 할머니는 어릴 적 가수를 꿈꿨다. 묵혀두었던 가수의 꿈을 이제 슬며시 꺼낸다. 한글을 배우고
나니 가사 외우는 것도 한층 쉬워졌다.
“어릴 적 가수 하고 싶었을 때가 좋았지”
- ‘가수’, 곽두조 할머니
때로는 옆 사람 답안지를 훔쳐보고, 숙제를 빼먹는 ‘농띠’를 치며 ‘기역·니은·디귿·리을’을 배웠더니 세상엔
놀거리가 가득하다. 열일곱 여고생으로 돌아간 듯한 할머니들은 말한다. “그냥 사는 게, 배우는 게 왜 이렇게
재밌노.” 즐거움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움도 있다. 할머니가 되어도 여전히 엄마가 그립고, 먼저 간 남편도
미우면서 그립다. 할머니들은 한글로 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리움을 비로소 세상 밖으로 꺼냈다.
“80이 넘어도 / 엄마가 좋다 / 엄마가 보고 싶다 / 엄마라고 부르고 싶다 / 아이고 오이야 오이야 /
이렇게 반갑다”
‘엄마’, 이원순 할머니
“내가 글 쓰는 걸 / 영감한테 자랑하고 싶다 / 여기 좀 보이소 / 내 이름 쓰는 거 보이지요? /
내 이름은 강금연, 그러려니 영감이 없네”
- ‘영감이 없다’, 강금연 할머니
김재환 감독은 ‘칠곡 가시나들’ 촬영을 위해 3년간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했다. 한 달에 두어 번씩
칠곡으로 가서 할머니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KBS와 나눈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칠곡
할머니들의 ‘설렘’을 담은 작품”이라며 “노년을 문제로 보는 선입견과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일상을
재해석하면 설렘이 보인다”라고 말한다.
평생교육의 일환으로 칠곡군은 2008년부터 마을별로 성인 문예반을 운영했다. 김재환 감독은
학교들을 하나하나 참관한 후 약목면을 택했다.
“내 나이 팔십팔세 / 마음은 팔팔하다 / 우리 사위가 / 장모님 글씨 참하네요 하니 / 마음이 또
팔팔하다”
시를 읽으며 카메라 앞에 선 박금분 할머니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친다. “나는 박금분 할매면서
학생이다!”
할머니들의 유쾌한 설렘은 스크린에 앞서 세상과 만났다. 2015년 강금연 할머니 등 89명의 할머니는
시집 『시가 뭐고?』를 펴냈다. 2016년에는 강봉수 할머니 등 119명이 쓴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2018년에는 권연이 할머니 등 92명이 쓴 『내 친구 이름은 배말남 얼구리 애뻐요』가 나왔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2019년 영화로 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기세를 몰아
2020년 할머니들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할머니들의 개성 만점 글씨체를 한글 글꼴로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칠곡군은 한글을 깨친 할머니 400여 명 중에서 권안자, 이원순, 김영분, 이종희, 추유을 다섯 할머니의 글씨체를 골랐다. 할머니들은 4개월간 2,000여 장의 종이에 글씨를 썼고, 군은 이를
바탕으로 글꼴을 완성했다. ‘칠곡할매글꼴’은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피스와 한컴오피스 등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탑재됐고, 칠곡군청 소재 학교와 관공서 등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 할머니들의 글꼴을 좋아한다. ‘따뜻하고 정겨운 느낌’ 때문이다.
할머니들이 사는 칠곡군 약목면 두만천에는 ‘칠곡 가시나들 벽화거리’도 조성됐다. 벽화에 있는
QR코드를 스캔하면 할머니들의 시 낭독을 직접 들을 수 있다.
바야흐로 고령화 시대, 노인이 많은 시대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지금 배워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노년은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이 더 많은 시기다. 정말로 노년은 새로운 것을
할 수 없는 ‘인저리 타임’*일까.
영화 ‘칠곡 가시나들’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젊었든 늙었든 ‘새로움’은 사람을 설레게 하는 마법이
있고, 노년의 설렘 역시 매력적이다. 김재환 감독은 “내가 원했던 ‘칠곡 가시나들’은 ‘재미있게 나이
듦’이라는 7자로 압축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당신의 노년은 어떤가? 여전히 무언가에 설레며 판을 벌이는 시간일까, 벌였던 판을
접는 정리의 시간일까? 영화는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저리 타임: 경기 종료 이후 심판 재량으로 부여하는 추가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