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행복찾기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대한민국을 지킨 800km,
100년 전 그 길을 걷다

땅 위에서 시작되지 않은 역사는 없다. 사람이 만들지 않은 역사 또한 없다. 매일 아침 당연하게 맞이하는 대한민국 역시 어딘가의, 누군가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2019년 오늘, 그날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새로운 여정이 시작됐다.
  • 글. 박혜인
  • 사진. 김도형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 로드 서울-중국 상하이-자싱-항저우-난징
1일차
100년 전 오늘을 찾아 떠나다

지난 10월 14일 오전 7시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에선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3박 4일간 펼쳐질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의 시작을 알리는 참가 학생들의 목소리였다. 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올해 총 6회의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을 마련했다. 지난 7월 1일부터 21일까지 공제회 회원 598명, 7개 학교의 학생과 인솔교사 등 단체 265명이 응모했고, 이중 1회차 36명, 2회차 35명이 각각 선정되어 역사탐방을 다녀왔다.
어느덧 3회차인 이번 탐방에는 경상남도 거제시의 외포중학교 야구부 15명과 교사 2명, 서울시 구로구 천왕중학교 누리단 14명과 교사 3명, 그리고 탐방단의 안전을 책임질 소방관 1명과 간호사 1명까지 총 36명이 참가했다. 탐방단은 ‘상하이’에서 출발해 ‘자싱’, ‘항저우’를 거쳐 ‘난징’에서 일정을 마무리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동했던 전체 경로의 절반 정도다. 역사로는 1919년부터 1937년까지, 거리로는 800km에 달한다. 이 여정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서는 <임정로드 4000km>의 저자이기도 한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가 해설가 역할을 맡았다.
상하이에 도착한 첫째 날, 탐방단은 제일 먼저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지인 홍커우공원으로 향했다. 홍커우공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짚어보는 데 중요한 장소다. 일본은 1932년 4월 23일에 천황탄생일을 위한 경축행사를 열었다. 스물다섯의 윤봉길은 도시락형 폭탄과 물통형 폭탄을 준비했고, 그가 투척한 물통형 폭탄이 터지면서 시라카와 요시노리 사령관이 즉사했다. 이후 일본과 중국은 대한민국의 항일투쟁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홍커우공원은 중국 작가인 루쉰의 묘가 옮겨오면서 현재 루쉰공원이라 불린다. 안쪽에 윤봉길 의사의 생애사적 전시관인 매헌기념관과 의거 기념비가 세워져 있지만 실제 의거지는 기념비가 있는 곳이 아니라 루쉰의 동상이 서 있는 들판 근처로 추정된다. 탐방단의 다음 목적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식탁과 집무실, 침실이 가지런히 복원된 3층짜리 기념관은 도로변에 있어 자칫 지나치기 쉽지만, 내부는 결코 가볍지 않다. 1층에서 임시정부와 관련된 내용의 비디오를 시청한 뒤, 2~3층에서 당시 청사의 모습을 가늠해볼 수 있다.
탐방단은 이어서 송경령능원을 찾았다. 외국인들의 공동묘지로써 상하이 만국공묘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중국의 정치가인 쑨원의 부인인 송경령 여사의 유해가 안장된 후부터 송경령능원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탐방단은 예관 신규식 선생을 만났다. 김종훈 기자는 “예관 신규식 선생은 임시정부의 아버지”라며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자리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하고 한인 커뮤니티를 조직한 분”이라고 설명했다. 송경령능원에는 신규식 선생과 함께한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잠들어있다.

(왼쪽)홍커우공원에 마련된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기념관 전시실 (오른쪽)윤봉길 의사의 생애를 경청하는 탐방단 (왼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오른쪽)송경령능원에서 묵념을 하기 위해 모인 탐방단
그래도 걷는다, 길이 될 때까지

해가 저문 뒤에도 탐방은 계속돼, 탐방단은 1919년 4월 11일 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한 서금이로 20호에 도착했다. 비록 정확한 장소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100년 전 이 거리에 귀한 발걸음들이 있었고, 그들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호와 정치 체제, 헌법 등의 첫 단추를 꿰었으며, 첫 번째 청사가 1919년 8월 18일까지 여기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길을 걷다 보면 큰 규모로 입점해있는 의류매장 H&M이 눈에 들어온다.
김종훈 기자는 “옛 지도와 비교해본 결과 이곳이 ‘임시정부 2청사’가 있던 자리”라고 설명했다. 1919년 8월부터 10월까지 청사로 사용되어 외벽에 크게 태극기를 걸어두었던 이곳은 100여 년이 흐른 2018년 4월에서야 임시정부 2청사의 터로 확정되었다. 김종훈 기자는 힘주어 말했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하지만 함께 걸으면 길이 된다”고. 이어서 신규식 선생의 거주지를 방문했다.
리모델링으로 옛 모습은 남아있지 않지만 을사조약에 항거하며 독약을 마시고,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을 때도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세상을 바로 보겠느냐”며 자신의 호를 ‘예관(睨觀)’으로 바꾼 그의 정신만은 또렷하다. 이후 탐방단은 윤봉길 의사가 의거 직전 김구 선생과 자신의 시계를 교환했던 원창리 13호를 찾았다.
여기서부터 의거가 일어났던 홍커우공원까지는 차로 한 시간 거리. 윤봉길 의사가 김구에게 남긴 “제 시계는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의 저의를 파악해볼 수 있었다.
첫날 일정은 의열단원들의 항일의거지인 ‘황포탄 의거지(현재 와이탄공원)’로 마무리됐다. 황푸강의 서쪽인 와이탄은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이 가득하며, 덕분에 야경이 아름다워 유람선을 운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의 공공마두(접안시설)는 1922년 3월 28일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이 목숨을 걸고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한 곳이다. 그러나 작전의 실패로 오성륜과 김익상이 체포되었고, 오성륜은 탈옥에 성공했지만, 김익상은 20년 2개월간의 수감생활을 했다. 지금은 화려한 야경으로 관광지가 된 이곳에서, 독립을 열망한 그들의 숨결을 잠시나마 느껴보았다.

둘째날 밤에 진행된 역사강의
  • 김구 선생의 피난처인 매만가 76호 기념관에서 설명을 듣는 탐방단
  • 김구 선생이 주푸청 양아들의 집 매만가 76호에서 남북호로 나가는 비밀통로였던 배의 모습을 관찰하는 탐방단
2일차
자싱에서 하이옌 그리고 항저우를 향해

이튿날 탐방단은 김구의 도피 경로를 따라 상하이에서 자싱으로 이동했다. 당시 김구는 중국의 정치가인 주푸청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그가 자신의 아들, 양아들, 며느리까지 동원해 1932년부터 1935년까지 김구를 숨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쉼 없이 도망 다닐 수밖에 없던 김구의 처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실제로 주푸청 아들의 집과 김구 가족이 머물던 곳이 불과 200m 떨어져 있었음에도, 김구와 가족들은 서로 같은 지역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고 한다.
김구는 언제든 몸을 피하기 좋도록 물과 인접한 곳에서 머물렀다. 주푸청 양아들의 집에서 지낼 때는 남북호로 갈 수 있는 비밀통로를 만들고, 낮 동안 선상생활을 하며 국무회의 등을 준비하다가 안전이 확인된 날만 귀가해 눈을 붙였다. 1932년 7월부터 12월까지 머물렀던 하이옌의 재청별장 역시 뒤쪽으로 남북호가 펼쳐진다. 후에 김구의 아들인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은 주푸청 가족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재청별장에 ‘음수사원 한중우의(飮水思源 韓中友誼, 물을 마시며 근원을 생각하듯 한국과 중국의 우정을 생각하자)’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이후 탐방단은 항저우로 이동하여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사용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로 향했다. 이곳은 유일하게 중국 정부에서 관리 중인 임시정부로, 복원작업 이후 2007년 11월 30일에 상하이와 충칭 청사에 이어 세 번째로 개관했다. 그리고 1930년 임시정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운동 정당인 한국독립당의 사무실 사흠방과, 사흠방으로부터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 임시정부 요원들의 가족 거주지 오복리를 차례로 들렀다.
둘째 날의 마지막 일정은 김구가 머물렀던 숙소 군영반점이었다. 당시에는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이전해 처음으로 사용한 청사 ‘청태 제2여사’였지만 현재는 국영여관 겸 음식점인 군영반점이 있다. 그러나 아직도 옛 모습이 남아있고, 지난 사드 사태 전까지는 김구가 머물렀던 객실에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국무원이었던 김철도 이곳 32호실에서 머물며 임시 국무위원회를 주관했다.

  • 회청교에서 헌화하다
  • 천녕사에 모이다
3일차
잊지 말아야 할 역사, 계속되어야 할 발걸음

셋째 날 아침이 밝자 탐방단은 난징 시내에서 교외로 1시간을 달려 천녕사에 도착했다. 천녕사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유적지로, 당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장제스 총통에게 군 양성을 지원받아 설립한 학교다. 18~25세 청년 125명이 6개월간 군사 훈련과 정치 토론 등을 배우고 국내와 만주로 파견됐으나 대부분이 잡혀 들어갔다. 대표적인 이가 저항시인 이육사다.
지금도 대중교통으로는 찾아가기 어려운 외딴곳, 좁은 산길을 따라 인적을 피해 마련된 이곳에서 김종훈 기자는 제사상을 준비하고 학생들과 함께 125명의 청년에게 음복주를 올렸다. 어떤 기도를 드렸냐는 그의 질문에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기도했어요.”
탐방단은 다시 차를 타고 난징대학살 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 입구에는 어머니가 죽은 아이의 주검을 안고 하늘을 보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다. 건물의 외관은 날이 중간에 끊어진 일본 군도를 형상화했는데 학살로 인한 난민, 조난자들의 피해를 상징한다. 동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마주하게 되는 광장에서는 매년 한번씩 국가가 주도하는 제사가 열린다. 이명 현지 가이드는 “이 역사를 뼈에 새기겠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난징대학살을 ‘난징대도살’이라고 부른다. 평민을 사살한 일이 짐승을 대상으로 한 것만큼이나 잔혹했음을 뜻한다. 출구로 나오자 엄마가 비둘기를 하늘로 날리며 기뻐하는 모습의 동상이 반긴다. 함께 적힌 문구는 ‘평화’. 중국이 지나온 역사를 통해 궁극적으로 염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다음 장소는 한인특별반 학생 100~200명이 살았던 교부영이다. 윤봉길 의사 의거 후 김구 선생과 장제스 총통은 1933년 5월에 회담을 열고, 첫 번째 결실로 한인 특별반을 만들었다. 학생들은 그곳을 거치며 군사훈련을 받아 중국 장교가 되고 훗날 광복군이 되는데, 이들이 남경에 돌아와 머물렀던 집단 거주지가 바로 교부영이다. 여기서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는 김구가 고물상을 운영해 신분을 위장하며 살아갔던 다리인 회청교가 있다. 현재는 확장 공사를 한 상태라 김구가 살았던 곳을 추측해볼 뿐이다. 이날 김종훈 기자는 학생들에게 국화꽃을 한 송이씩 선물했고, 학생들은 그 꽃을 다리 밑에서 나라를 지켰던 지도자 ‘고물쟁이 김구’에게 헌화했다. 이날 일정을 마친 탐방단은 1933년 5월, 김구가 장제스 총통과의 회담을 위해 머물렀던 중앙반점에서 하루를 묵었다. 김구는 이곳에서 치밀하게 회담을 준비한 덕분에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독립을 위한 유의미한 결과를 끌어냈다.

중앙반점 앞에서 기념사진
4일차
마르지 않는 눈물을 닦다

넷째 날의 공기는 사뭇 달랐다. 탐방의 마지막 일정이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이곳에 기록된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인이다.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고 14세 미만은 입장할 수 없다. 나이 제한으로 이곳에 들어가지 못한 탐방단 학생들은 숙소 뒤편의 총통부로 향했다. 총통부는 김구와 장제스가 만난 회담장이다.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에 들어서면 한쪽 벽을 가득 메운 피해자 70여 명의 사진이 먼저 눈에 띈다. 내부는 여러 채의 건물이 연결되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다. 피임도구와 생식기 검사 기구, 콘돔 등이 전시된 곳을 지나 한층 더 올라가니 약병이 빼곡했다. 군인들이 성병에 걸리지 않도록 피해자들에게 처방했던 예방, 치료 차원의 약이다. 김종훈 기자는 “처음 여기에 왔을 때는 들어서자마자 약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속 이곳을 방문하면서 그 냄새가 희석되어가는 것 같다. 역사는 이렇게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발전해간다”며 소감을 전했다.
탐방단은 다음 건물로 가는 길에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의 동상을 마주했다. ‘마르지 않는 눈물’을 표현한 것이다. 학생들은 저마다 수건을 손에 들고 하염없이 흐르는 할머니의 눈물을 한참 동안 닦았다. 끝으로 향한 곳은 한국관, 조선반도 피해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공간이다. 이곳엔 우리나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과 함께 액세서리, 거울, 화장품 등 한국에 돌아갈 날을 꿈꾸며 자신을 단장했던 열여섯 소녀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다시 기록하고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지금 세대의 수요집회가 기록되어 있다. 김종훈 기자는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있다”고 운을 뗐다. 역사는 우리의 생활과 같은 공간을 점유하기 마련이다.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은 난징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은 온통 고층 건물이다. 난징에서 재개발이 이뤄지던 도중 이 유적을 복원하는 일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 김종훈 기자가 ‘선택’과 ‘기록’을 자꾸만 역설하는 이유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난징 공항으로 향하는 길, 탐방단은 버스 안에서 “오늘 우리가 겪은 역사의 체취를 잊지 않겠다”, “탐방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독립운동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100년을 맞이하기 위한 마중물이 채워지고 있었다.

Mini Interview
‘임시정부 100주년’
역사탐방을 마치며

  • “학생들에게 두고두고
    기억될 시간으로”
    황재필(천왕중학교 교사)

    사실 아침부터 밤까지 빠듯한 역사 탐방 일정에 학생들이 소화하기 힘들 것 같아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노파심과 달리 마지막 날까지도 적극적으로 탐방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교육 효과도 만족스럽고, 4일간 듣고 경험한 내용이 학생들에게도 오래 기억될 것 같아요.

  •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의 이 길을 걷게 되길”
    심기주(천왕중학교 2학년)

    잘 몰랐던 독립운동가와 역사를 많이 알게 됐습니다. 특히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가 시계를 주고받았던 장소가 기억에 남아요. 나라를 위해 죽는다는 게 말이 쉽지 행동으로 옮기긴 어렵잖아요. 또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역사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고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진 나라라는 걸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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