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55] 인생 2모작

나는 펜으로
노후의 행복을 그린다

펜화가 김욱성

도면을 그리고, 중요한 것을 받아 적고, 필요한 곳에 서명하며 그는 평생 ‘펜’을 손에 쥐었다. 퇴직 후 펜을 들 일은 자연스레 줄어들 줄 알았다. 그러나 김욱성 작가는 퇴직 후인 지금 더욱 열심히 펜을 든 손을 움직인다. 그는 펜화가로서 오늘도 펜으로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다.
  • 글. 이성미
  • 사진. 김도형

퇴직 후 이뤄낸 두 번째 꿈

건설회사에 입사해 국내외를 오가며 그는 청춘의 대부분을 보냈다. 책임자로서 건설 현장의 전반을 챙겼고, 중동에 나가 대한민국의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다 56세의 나이에 명예퇴직을 했다. 회사를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부터 건축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 일에 충실히 임하느라 퇴직 후 어떻게 살지는 생각지도 않았고요. 그러다 퇴직을 앞둔 어느 날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어요. 도면 그리는 일을 계속해왔으니 무언가 그리는 일 자체는 제게 익숙했거든요. 대신 노후에는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려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러고 나니 그리고 싶은 것들이 꼬리를 물며 늘어나더라고요. 특히 전국 팔도를 다니며 마음에 담았던 풍경들이 속속 떠올랐습니다.”
많이 그리기 위해선 많이 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퇴직하자마자 휴직계를 낸 아내와 둘이 함께 전국을 여행했다. 종이 위에 아름다운 풍경을 간략히 스케치하고, 그리지 못한 것은 사진으로 담아왔다. 가장 소중한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은 정말 달콤했다.
그 원동력으로 1년 반의 시간 동안 160점 가까운 그림을 그려냈다. 이렇게 그리고 싶은 걸 어찌 참고 살았냐는 듯. 색연필, 붓, 펜 등 그리는 재료도 바꿔가며 도화지를 채웠다.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계속 그리다 보니 자연스레 실력이 늘었다. 가족의 응원 역시 김욱성 작가가 계속 펜을 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김욱성 작가의 세상은 무한으로 확장됐다.
펜화가가 되고, 처음 보는 사람과 자연스레 친구가 되는 일.
처음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물론 지금과 같은 결과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그에게 그림은 여가를 채우는 취미활동일 뿐,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온전히 그리는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림으로 연결된 무수한 인연들

그림 그리는 일을 취미로 삼으며 유유자적하던 어느 날, 우연히 그에게 작가로 데뷔할 기회가 생겼다. 국내 펜화 장르를 개척한 한국펜화가협회 김영택 회장으로부터 정식으로 그림을 그려보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올 초 열린 한국펜화가협회 전시회를 보기 위해 인사동에 갔어요. 마침 김영택 작가님이 계셔서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레 그림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제가 그린 그림을 보시더니 그림 몇 점을 본인에게 보내보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펜화가협회에 등록해 함께 활동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의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엉겁결에 ‘펜화가’라는 타이틀까지 달게 되었습니다.”
‘펜화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김욱성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개인전을 열 정도로 성장했다. 지난가을 그는 인사동에 있는 작은 갤러리 사차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 서촌과 북촌, 인사동 등 도심 속의 옛 풍경과 경북 문경 교귀정, 강원 양양 낙산사 홍련암 등을 그린 그림이 갤러리의 벽을 채웠다. 충북 음성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충남 아산 공세리성당 등 오래된 성당 그림도 전시되었다.
동료 작가와 지인들은 물론 그동안 SNS에 올린 그림을 보고 응원을 보내주었던 사람들도 시간을 내어 전시회를 찾아왔다.
“제가 그리는 것을 보고는 아들이 SNS에 올려 보라고 추천해주더라고요.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사용 방법도 배웠지요. SNS에 제가 그린 그림을 차곡차곡 올렸더니 열 달 만에 팔로워 수가 천 명이 넘어섰어요. 강의 요청도 오고요. 전시회를 하면서도 ‘SNS 친구’라며 찾아오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소셜 네트워크의 파급력을 그때 알았죠. 그림을 그리면서 이렇게 새로운 문화를 알아가는 것도 참 좋습니다.”

무한히 확장되는 제2의 인생

그림을 그리면서 김욱성 작가의 세상은 무한으로 확장됐다. 펜화가가 되고, 처음 보는 사람과 자연스레 친구가 되는 일. 처음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물론 지금과 같은 결과를 얻지 못했더라도, 그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그에게 그림은 여가를 채우는 취미활동일 뿐,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온전히 그리는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는 노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목적’을 위한 일이 아닌 그 나름으로 ‘목표’가 될 수 있는 일을 하라”라고 조언한다. 물론 그 전에 경제적인 점검은 꼭 필요하다.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전에 가족과 미리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 상의를 했어요. 그러고 나니 제가 어느 선까지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을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죠. 단,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가족과 충분한 상의를 거쳤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정할 때는 다른 사람의 동의와 조언을 구하지 않았어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언가만 생각했죠.”
노후를 현명하게 계획하기 위해선 혼자 선택해야 할 일과 함께 결정해야 할 일을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작가로서 실력이 여문 그는 이제 재능기부를 계획한다. 문화센터나 퇴직자를 위한 강의에 나가 사람들에게 재능을 나누는 일을 하고 싶은 것. 또 개인적으로는 신앙인으로서 국내의 오래된 성당들을 화폭에 담겠다는 계획도 있다.
“작가로서 부지런히 살아왔지만 서두르지는 않으려 해요. 저보다 먼저 퇴직하신 인생 선배님들께서도 ‘천천히 가야 한다’라는 조언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앞으로도 뒷걸음질 치지만 않게, 천천히 나아가려 합니다.”
화가 윤석남은 40세에 데뷔해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가 되었고, 화가 해리 리버먼(Harry Lieberman)은 76세에 그림 공부를 시작해 ‘미국의 샤갈’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는 일에 늦은 나이란 없다.
게다가 펜은 강하다. 미래를 그려내고, 행복을 그려낼 수 있는 펜은 분명 칼보다 강하다. 앞으로도 김욱성 작가의 펜도 강하게 그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 것이다.

services s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