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한평생 광복과 통일을 열망한
민족의 작은 거인

‘조완구 선생’

“백범만 죽이지 말고 우리도 다 죽여서 같이 파묻어라!”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임시정부의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자 조완구 선생은 절규했다. 평생 대종교의 신앙을 갖고, 오직 광복과 통일만을 꿈꾸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조완구 선생. 작은 키에 몸은 수척했지만, 광복과 통일을 열망했던 그의 사상만큼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큰 민족의 거인이었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특히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입니다. 3·1운동 정신에 따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세계에 널리 선포한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을사늑약 첫 장(위)과 전문 일부(아래)
을사늑약 체결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자들

조완구 집안은 조선후기 이래 대대로 큰 벼슬을 했다. 말 그대로 명문가 집안이었다. 혼인 역시 당시 명문가였던 풍산 홍씨와 맺었다. 조완구는 14세인 1895년 예조판서 홍승목의 장녀이자, 「임꺽정」의 작가 홍명희의 조카인 홍정식과 결혼했다.
그는 21세 되던 1902년에 한성법학 전수 학교를 졸업하고 승훈부 내부 주사로 대한제국 정부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3년 뒤인 을사년(1905년) 11월, 일제의 강요로 을사늑약(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 체결되며 국권을 침탈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대한제국의 많은 이가 을사늑약을 거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알게 된 시종 무관장(지금의 육군 대장 중 참모총장) 민영환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큰 변곡점이 됐다. 당시 시종무관장은 1명이었다. 많은 이가 일본 헌병의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릴 때 조완구는 민영환이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리는 걸 보았고, 그러한 민영환에게 “대감 왜 헌병에 잡혀가실 각오로 상소를 올리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당시 세상은 매우 단순해 보였다. 불의에 타협하는 자와, 타협하지 않는 자로 구분된. 몸을 사리던 조완구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1905년 11월 30일, 오늘날 육군 참모총장 격인 민영환이 다시 한번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린 뒤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긴 채 자결 순국한 것이다. 곧이어 기존에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올렸던 대한제국의 애국자들이 줄지어 자결을 선택했다. 원로 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 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 등 시대의 애국자들이 모두 자결했다.

34회 임시의정원 의원들(1942년 10월 25일,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조완구 선생)
대한민국 국호와 임시의정원의 탄생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에 조완구는 곧바로 관직을 사퇴했고, 매국노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의열투쟁 단체 ‘오적 암살단’을 찾았다. ‘오적 암살단’은 을사오적(을사늑약 체결 당시 일제에 옹호하며 조약 체결에 찬성한 5명의 대신)을 암살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로, 본거지는 대종교 교단이었다.
대종교는 단군을 섬기는 민족종교로, 무장독립 투쟁에 활발히 참여하며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조완구는 대종교 간부로 활동하다, 1914년 북간도(동만주)로 향했다. 북간도로 망명한 것은 대종교 총 본사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1917년 국내에 남아 있던 조완구의 가족도 북간도 용정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구멍가게를 열어 두어 달 장사를 했는데 그사이 조완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헤이그 특사(고종이 을사늑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국권 회복을 이루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한 특사) 이상설이 사망하자, 신한촌(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 잡고 있던 한인집단 거주지) 주변의 정세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조완구가 떠난 이후 시어머니와 자녀들을 데리고 삯바느질 등으로 연명한 부인은 1945년 2월 타계할 때까지 다시는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한편, 1919년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완구를 포함한 민족의 선각자들은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대한국민의회를 대표기구로 선포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의 소식이 러시아 연해주에 전해지자 조완구, 이동녕, 조성환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김동삼, 조소앙 등과 함께 상해로 이동했다.
1919년 3월 말 상해에는 1천 명이 넘는 독립운동가가 모였다. 전례가 없는 숫자였다. 이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4월 10일 29명의 대표가 밤새 회의를 했다. 모임의 명칭은 ‘임시의정원’이었고 곧바로 의장(이동녕), 부의장(손정도), 서기(이광수, 백남칠)가 선출되었다. 격렬한 회의 끝에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했다. 1919년 4월 11일, ‘제국’에서 ‘민국’으로 민주공화국이 탄생된 순간이었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이며,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행정부였다. 이를 중심으로 27년 동안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세계 독립운동사에서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20세기를 전후하여 세계 8할에 가까운 민족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부흥 운동이나 독립전쟁을 치렀지만,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민족은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었다.

  • 임시정부 요원들(1941년 9월, 뒷줄 맨 오른쪽이 조완구 선생)
  • 광복 후 경교장 앞 뜰에서 김구와 조완구(1947년 5월)
완전한 대한독립을 향한 끝없는 열망

거창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지만, 출발부터 문제가 많았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는 미국에 있는 등 핵심인사 대다수가 상해에 거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지금의 국무위원 격인 이시영과 이동녕만 있었고, 그들 사이에 조완구가 있었다. 그 후 임시정부는 여러 번 개헌이 일어났으며, 끝내 무정부 상태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의 존립이 위태로워졌다. 이때 조완구를 포함한 민족의 선각자들이 주장한 것은 ‘민족유일당 운동’이었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대단결을 이루어 민족의 유일한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유지·운영하자는 방안이었다.
민족유일당 운동은 상해에서 일어나 북경을 비롯한 중국 관내 지역 그리고 만주와 국내에까지 확대되며 전개되었다. 그러나 유일당의 조직 방법론을 둘러싼 이견이 노출되었고, 결국 좌익계열이 탈퇴하며 민족유일당 운동은 결렬되었다. 이후 1930년 1월 이동녕, 김구, 조소앙, 김철 등과 함께 조완구는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결성한 정당으로, 한국독립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이후 김구는 조완구와 함께 비밀 공격을 통한 주요인물 제거를 목표로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단원인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최흥식의 의거에 참여했다. 조완구는 계속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장 독립군인 한국광복군 창설을 위해 김구를 도왔고, 1944년 좌우 연합 내각에서 재무부장으로 취임했다. 그렇게 중경 임시정부에서 마지막까지 백범 김구와 함께 활동했던 그는 1945년 8월 10일 저녁 8시 라디오 뉴스를 통해 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해방 이후 곧바로 여당과 야당의 싸움이 시작됐다. 당시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부의 총 사직을 요구했는데, 이때 조완구의 답변이 참으로 존경스럽다. “나 27년 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잘나서 그런 것보다 못나서 그렇습니다. 누가 잘난 사람이 그것을 지키고 있겠소, 나 조선가서 27년 했으니 한자리 달라하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마시라입니다.” 그는 27년간 임시정부를 지켜오면서 그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았다. 오직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만이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역시 문제가 많았다. 미군 측에서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아 공무원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국하게 되었고, 동시에 들어오는 것도 반대하여 1진과 2진으로 나누어 입국을 허락했다. 조완구는 1945년 12월 2일 조소앙 등 국무위원들과 함께 2진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12월 3일, 김구가 머무는 경교장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이미 38선으로 한반도가 나뉘어 있었고,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자 소련과 미국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괴로웠을까?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싸워온 평생이었으니 말이다.

조완구 선생은 임시정부가 설립되던 시절부터 이후 30여년 간, 안팎으로 불어 닥쳤던 위기를 해결해나가며 임시정부 존속을 위해 헌신했다.
설 자리를 잃어버린 비극의 애국인사

조선인민공화국·한국민주당 등이 저마다 입지 구축에 여념이 없는 속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년 3월 20일부터 1947년 10월 21일까지 한반도의 임시정부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개최한 회의)의 개최와 결렬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했고, 극좌와 극우의 대립은 심각한 상황에 부딪혔다. 이때 민족 분단의 위기를 절실히 느낀 김구, 김규식, 조완구 등은 통일을 위한 최후의 시도로 남북협상을 촉구했다.
1947년 3월 11일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성환, 홍명희, 조완구 등 7명은 ‘남북형제간의 유혈극이 머지않아 빚어질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고, 다음 해인 1948년 4월 20일 조완구는 김구, 김규식과 함께 평양길에 올랐다. 그러나 평양에서의 남북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남한만의 선거를 치르며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됐다. 김구의 뒤를 이어 한국독립당 의원장(지금의 국회의장)에 오른 조완구는 6·25전란 중 피난 권유를 뿌리치며 “인민군이 나를 반동이라고 쏘면 죽을 뿐이고 국방군이 나를 공산당으로 몰아도 죽을 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1950년 9월 18일 인민군에게 납북됐고, 1954년 10월에 조완구는 용성에 있는 중앙병원에서 72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아직도 조완구의 유해는 북한 땅에 묻혀 있다. 유일한 후손인 딸 조규은 여사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유해를 고향 충북 괴산에 모셔와 어머니 유해 옆에 합장해 드리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 전했다.

조완구(趙琬九) 선생
(1881. 3. 20. ~ 1954. 10. 27.)
-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 1921년 임시정부 내무차장
- 1923년 상해 한국인거류민단의사회 의사장
- 1936년 한국국민당 결성
- 1944년 임시정부 내무부장, 재무부장
- 1945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
-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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