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공간의 재구성

라온, 샘터에 찾아온 봄

광주 첨단고등학교 “평판이란 남이 아는 당신의 모습이다. 명예는 당신 자신이 아는 스스로의 모습이다.” 미국인 소설가 로이스 맥마스터 부욜(Lois McMaster Bujold)의 말이다. ‘명예존중(名譽尊重, 명예를 존중하는 명예로운 사람)’을 교훈으로 내세운 첨단고등학교에서는 학교가 곧 학생의 명예요, 학생이 곧 학교의 명예다.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학교의 공간 혁신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 글. 이성미
  • 사진. 김도형

  • 첨단고등학교 안에 있는 혁신 3교실, 라온, 샘터, 아키 놀이터
  • 라온은 아이들이 공연, 휴식 등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즐거운’이라는 뜻의 순우리말 ‘라온’. 라온 안의 벽에는 리모델링에 참여한 건축 동아리 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첨단고등학교 속 최첨단의 변화

새봄과 함께 학생들을 맞이하는 첨단고등학교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새롭게 바뀐 학교를 보며 좋아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교직원들은 가슴이 벅차오른다. 코로나19로 인해 개학일이 연기된 것은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그동안 더 완벽하게 새 학기를 준비해 학생들을 맞이하겠다’며 각오를 다진다.
올해 고교학점제를 도입하면서 첨단고등학교는 대대적인 공간 혁신을 이루었다. 학생들이 관심 분야에 따라 수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 학급당 하나의 교실과 몇 개의 특별실만 필요했던 기존과 달리 더 많은 수업 공간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에 첨단고등학교는 규모의 확장보다는 기능의 확장에 주목했다. 하나의 교실이 여러 개의 기능을 해낼 수 있는 고효율·다목적 교실을 만들고, 전 학년에 홈베이스를 확보해 이동 수업에 맞는 환경을 조성한 것. 대대적인 변화에 따라 학교에는 토론 학습실과 매체 학습실, 온라인 학습실, 이동 수업실 등 멀티 학습 공간이 대거 생겨났다. 교실 안도 ‘첨단’의 이름에 맞게 바뀌었다.
먼저, 모든 교실에는 빔프로젝터와 전동 스크린을 설치하고, 교실 뒷면에는 자석 게시판이 부착됐다. 토론 학습실에는 전동 모니터, 매체 학습실과 시청각실 등에는 전자 교탁과 음향 시설, 유리 보드도 설치됐다. 또 학생들이 수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노트북과 탭, 3D 프린터 등도 지원한다.
“첨단고등학교는 학교 전반에서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학습이 이루어지도록 학생들의 다양한 체험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번 공간 혁신 역시 학생들의 편의와 자율성, 그리고 학생들을 ‘교양 있고 명예로운 민주시민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한다는 교육 목표에 걸맞게 이루어졌습니다.”
김형철 교장의 말처럼, 이번 공간 혁신을 통해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 자유자재로 자기주도적 학습과 토론 수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 교실에는 전자 교탁, 유리 보드 등 첨단 기능을 더했다.
  • 자연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교정
  • 학교 안에는 학생 중심의 공간혁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영광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 가사실에서 멀티 놀이터로 바뀐 ‘아키 놀이터’
학생들이 직접 만든 혁신 3교실! 라온, 샘터, 아키 놀이터

학생들의 자율성과 자립심을 중요시하는 첨단고등학교의 철학은 ‘라온’과 ‘샘터’, ‘아키 놀이터’로 대표되는 혁신 3교실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학교의 주인은 분명 학생이라고 해도 학교라는 공간을 만드는 주체는 어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광주 첨단고등학교는 그 당연한 공식을 깼다.
학교 1층에 자리한 ‘라온’ 교실은 본래 체력단련실로 쓰이던 곳이었다. 그러다 ‘공연실이 필요하다’는 학생들의 의견에 따라 변신을 꾀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미술 시간을 활용해 주도적으로 벽화 아이디어를 냈고, 기술 시간에는 교실 모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투표를 통해 공간을 어떻게 바꿀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 후에는 건축 동아리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직접 벽에 페인트칠하고, 가구와 조명을 설치해 공간을 완성했다. 마음에 드는 가구와 조명을 고르기 위해 학생들은 서울에서 열리는 인테리어 박람회에 답사까지 다녀왔다고. 학생들의 노력 덕분에 라온 교실은 언제든 찾아오고 싶은 공간, 함께 머물며 문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
라온 교실 옆 창고와 가사실도 각각 학생회의실 ‘샘터’, 공유 주방 및 다목적실인 ‘아키 놀이터’로 재탄생했다. 특히 아키 놀이터는 카페를 연상시키는 세련되고 친근한 공간 구성과 인테리어가 특징이다. 덕분에 이곳은 학생들이 언제든 요리와 취미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이름 그대로의 ‘놀이터’가 되었다.
과거 학생들과는 먼 곳이었던 가사실이나 창고가 학생들의 손으로 다시 살아난 것. 작품이 완성되면 맨 마지막에 작가의 이름을 넣는 것이 당연지사다. 벽 한 편에는 이 공간을 만들어낸 학생들의 이름도 적혀 있다. ‘내 손으로 직접 교실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은 벽화보다 오래도록 학생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 ‘아키 놀이터’라는 간판을 내걸고 카페 분위기를 낸 공유 주방
  • 역사동아리가 주축이 되어 마련한 작은 소녀상
하나의 교실이 여러 개의 기능을 해낼 수 있는
고효율·다목적 교실을 만들고, 전 학년에 홈베이스를 확보해 이동 수업에 맞는 환경을 조성한 것.
대대적인 변화에 따라 학교에는 토론 학습실과 매체 학습실, 온라인 학습실, 이동 수업실 등 멀티 학습 공간이
대거 생겨났다. 교실 안도 ‘첨단’의 이름에 맞게 바뀌었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 명예로운 학생들

교실 이외에도 학생들은 학교 곳곳에 긍지(矜持)를 심어놓았다. 그중 하나가 1층 출입문 앞에 놓인 작은 소녀상이다. ‘평화의 소녀상’의 축소판인 ‘작은 소녀상’은 일제의 만행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첨단고등학교 학생들은 자발적인 모금으로 기금을 마련하고, 학교에서 가장 발길이 많이 닿는 곳에 작은 소녀상을 두었다. 이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역사동아리를 포함하여, 학교에는 50개가 넘는 창의적 체험 활동(동아리 활동)이 존재한다. 주도적인 활동과 학습을 통해 학생들은 타인이 달아준 불편한 날개가 아닌, 자신의 날개로 비상(飛上)할 준비를 한다.
2층에 위치한 쉼터인 학생자치공간에서도 학생들의 감수성과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은 인조 잔디가 깔린 바닥 위로 나무 의자를 두어 마치 자연 안에 들어와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천장에는 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조명을 설치했다. 학교 안에 또 다른 자연을 만들어낸 것. ‘실내 속의 실외’라는 콘셉트와 천장, 바닥, 가구 인테리어 하나하나 모두 학생들이 낸 기획안 그대로다.
고급 바리솔(벽이나 천정에 고정시킨 레일에 맞춤재단 형태의 특수 PVC시트를 당겨 거는 천장 시스템)을 이용해 천장을 곡면으로 만든 것도 학생의 의견이라고. 조미형 교무부장은 “설계 전문가가 자재가 매우 비싸다며 걱정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학생들이 꼭 해야 한다기에 결국 받아들여졌습니다. 학생들의 의견을 수용하느라 꽤 힘들었어요”라며 웃는다. 그래도 학생들의 고집 덕분에 학교 안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공간이 탄생했다.
이번 공간 혁신을 통해 학생은 자신의 재능을, 학교는 성장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었다. 어떤 공간이 필요할지 고민하고, 선택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연구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앞으로의 꿈을 펼쳐나가는 데에 귀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첨단고등학교 학생들이 만든 가장 첨단화된 변화. 덕분에 첨단고등학교에 찾아온 봄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다.

학생들이 직접 기획하여 만든 학생자치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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