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개성 지역 3·1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

“내 몸은 묶을지언정 내 마음은 묶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일본 경찰에게 끌려갈 때 어윤희 선생이 남긴 명언이다. 모두가 선뜻 나서지 못했던 독립선언서 배포에 고민과 두려움 없이 나서 개성 지역 3·1만세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 어윤희 선생. 개성 ‘어장부’로 불리던 그는 우리 민족정신이 최고로 발휘되었던 3·1만세운동에서 대한독립과 조국 사랑의 열망을 활활 불태웠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개성 남부교회 외관(위, 아래)
근대적 여학교의 교육을 받다

어윤희는 1880년 6월 20일, 충북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에서 어현중의 무남독녀로 출생하여 1886년 한문과 국문을 수학했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6세에 결혼했으나 얼마 후 남편은 동학 혁명군이 되어 집을 떠나 전투 중에 전사했다. 18세에는 아버지마저 여의면서 참으로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10여 년을 황해도 평산, 해주 등지를 전전하다 서른둘의 나이에 개성에 정착하게 된 어윤희는 이전에 개성에서 보지 못하던 큰집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일었다. 그 큰집은 바로 교회당이었다.
어윤희는 교회당을 찾아 여러 사람 틈에 끼어 설교를 들었는데, 이때 설교를 하던 이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정춘수 전도사였다. 그때부터 어윤희는 기독교인이 되었고, 이후 미국에서 온 선교사 갬블(Rev Gamble)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뒤이어 당시 젊은 과부들과 불행한 여성들을 위해 설립된 학교인 미리흠 여학교를 졸업하고 성경학교에 다닌 후 그 학교 사감으로도 일했다. 또 개성 동부에는 부속 소학교가 있었는데 어윤희는 그곳에서 교장으로 일한 뒤 북부교회 전도부인으로 교회를 도우며 15년간 봉직했다.

개성을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가 되어

어윤희가 미리흠 여학교 사감으로 있던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오화영 목사는 개성 지역의 연락을 책임지고, 자신의 아우 오은영과 독립선언서 배부 계획을 짠 후 개성 북부교회 목사 강조원에게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 100매를 비밀리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강조원 목사가 병석에 눕게 되어 아무런 기별이 없으니, 서울에서는 이화학교 안병숙을 개성으로 보내 독립선언서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게 했다. 결국, 강조원 목사는 신공량 전도사에게 자신의 임무를 위임했으나 아무도 직접 나서지 않았다.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 학생 중 지도 인물들은 함께 모여 목숨을 나라에 바치기로 하고 엎드려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 기도 끝에 그들의 지도자로 어윤희가 정해졌다. 어윤희는 항상 교회에서 핍박받는 겨레와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어린 여학생들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지도자를 어윤희로 모시겠다는 말을 듣고 호수돈여학교 기숙사로 달려온 어윤희는 자신이 독립선언서를 개성 시가지에 돌리겠다고 말했다.
그는 미리흠 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꺼내 개성 시가지로 내려오면서 집집마다 선언서를 돌리고, 3월 1일을 기해서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 당시 개성 거주 시민은 4만 명 정도였고, 헌병들이 한국 사람이었으며, 일등병만이 일본 사람이었다. 개성 지역은 상업 위주의 도시였는데, 조선상인들이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왼쪽)오사카 아사히신문의 경성 특파원이 1919년 3월1일 서울 광화문 기념비문 앞에 운집한 군중을 촬영한 사진 (오른쪽)1919년 3·1만세운동 때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태화관 전경
  • 3·1만세운동 직후 체포된 어윤희 선생 모습
  • 서대문 형무소 수감카드
개성 3·1만세운동 선봉에 서다

3월 1일 오후 2시경부터 어윤희는 신관빈(호수돈여학교 사감이자 독립운동가)과 함께 조선독립선언서를 인근 주민에게 배포했고, 독립선언서를 자세히 읽어 본 개성 사람들 모두가 격동하기 시작했다. 어윤희는 미리흠 여학교 학생 신명철과 함께 소리높여 만세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일본 형사가 그를 찾아왔다.
“당신이 내 집에 올 줄 알았소. 내가 준비를 다 한 후에 같이 갑시다.” 어윤희의 반응은 너무나 담담했다. 저녁을 먹고 솜옷으로 갈아입은 후 방문을 잠그고 나섰다. 일본 형사가 수갑을 채우려고 하자 “천하 만방에 여성에게 수갑을 채우는 법이 어데 있느냐”고 외치고는 곧바로 땅에 원을 그려 보이며 “여기서 며칠을 서 있으라고 해도 서 있을 사람인데 왜 나를 묶으려느냐”하며 경찰서까지 들어갔다.
며칠 있다가 서장이 심문하기를 “누가 시켜서 선언서를 돌렸느냐?”라고 묻자 어윤희는 “세계에서 5대 강국에 드는 일본이 그것도 모르느냐. 한 고을에 닭이 새벽이 되어 울 때 누가 시켜서 우느냐. 나는 한국의 딸이니 일할 때가 돌아와서 한 것이다.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리고 마음대로 하라”고 답했다. 그의 대답이 이러하니 더 물을 것도 없이 가두었다가 서울로 압송했다.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은 어윤희에게 모욕을 주려 했다. “발가벗겨라” 이를 들은 어윤희는 곧바로 “내 몸에 손댈 필요 없다. 내가 벗으마”라고 외치고, 스스로 발가벗은 후 재판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 봐라. 실컷 봐라. 너희 놈들이 이렇게 야만인인 줄은 몰랐다. 네 어미도 나와 같고, 네 여편네도 나와 똑같다. 실컷 봐라.” 이렇게 소리 지르니 재판장도 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당황하여 “어서 옷 입혀 데려 가라”고 말했다.
어윤희는 결국 보안법(1907년 7월 24일 집회와 결사·언론의 자유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가 구한금 정부에 제정, 반포하게 한 법률)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 받았는데, 약 2년간의 형을 치르고 석방이 됐다. 당시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북부교회 강조원 목사, 신공량 전도사는 7개월 형을 선고받은 점을 고려하면 3·1만세운동 당시 일제에게 어윤희의 역할과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 3·1독립선언서(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김완규, 나용환, 이종훈, 홍병기, 이종일, 최린, 한용운, 백용성, 이승훈, 박희도, 이갑성, 오화영,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신석구, 박동완, 신홍식, 양전백, 이명룡,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이 읽은 독립선언서)
민족계몽과 여성교육에 힘을 쏟다

어윤희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형을 치른 후, 개성으로 내려와 전도사업에 열중했다. 그가 받은 월급이라고는 좁쌀 소두 5말로 시작해서 돈으로 5원, 7원, 15원을 받았는데 이 가난한 처지에 그를 찾아 주는 이들은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는 이들이었다. 독립군이 작전 수행을 위해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하여 어윤희를 찾아왔을 때, 그는 은신처를 제공하고 밥을 지어 그들을 잘 대접했다. 이와 관련하여 알려진 사건이 ‘대한독립의군부(일제 강점기인 1912년, 전라도 지방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 군자금 모집사건’이다.
이런 일들로 인해 다시 일본 형사가 집에 찾아왔다. 어윤희는 “당신 올 줄 알았소. 그런데 그가 지금 막 송학산으로 넘어갔으니 그리로 가보시오.” 이렇게 일러 보내고는 독립군더러 “지금 형사가 왔다 갔으니 빨리 밥을 먹고 가라”고 말하면서 노잣돈까지 쥐어주며 형사와 반대 방향으로 가게 했다. 결국, 어윤희는 은닉죄로 황해도 남천 경찰서에 여러 번 잡혀갔다. 이렇게 그를 찾아온 독립군 중 어윤희가 양아들로 삼은 사람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봉명석으로 대만에서 독립운동 중 순국했다.
그 후 어윤희는 ‘개성여자교육회(3·1만세운동 직후 여성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조성하려는 분위기 속 신교육 여성들이 주도해 여성의식·여권 신장을 계몽시키려는 목적으로 창립한 단체)’ 회장으로 여성 의식·인권·계몽운동에 앞장섰고, 1937년 개성에서 독립운동가 오기환, 한철호와 그 외 지역유지 몇 사람과 함께 ‘유린보육원’이라는 이름의 고아원을 설립해 70명의 고아를 보호했다. 해방 후 1949년에는 서울 마포로 내려온 뒤 다시 유린보육원을 설립, 운영하며 이후 고아원 원장으로 삶을 보냈다.
그는 측근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방에 있는 장롱은 절대 열어보지 말고, 장례비 걱정은 하지 말라며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1961년 11월 18일 토요일 아침, 어윤희는 3·1만세운동의 공로자이자 유린보육원을 보살펴 주는 스코필드 박사를 방문한 다음 유린보육원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평소 그와 가깝던 지인들은 방에 있던 장롱을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교회에 헌금할 돈 2만 환, 그리고 장례비로 쓰라며 4만 환과 금반지가 있었고, 수의와 신발은 물론이고 관의 길이와 폭의 치수까지 적혀 있었다. 유골은 화장해서 한강 깊은 곳에 뿌려달라는 유언과 함께 뱃삯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왼쪽)어윤희 선생 노년 (오른쪽)어윤희 선생과 유린보육원 어린이들(오른쪽 첫 번째가 어윤희 선생)
어윤희(魚允姬) 선생
(1880.6.20. ~ 1961.11.18.)
- 여성 독립운동가
- 개성여자교육회 회장
- 신간회, 근우회 개성지회 간사
- 개성 지역 3·1만세운동 주도
-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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