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종교 지도자에서
애국 지도자가 독립운동가

의암 ‘손병희 선생’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구한말 동학과 천도교의 지도자이자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인 손병희 선생.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혼을 전 세계에 알리고, 나아가 이후 독립 투쟁과 대한민국 건설의 뿌리가 된 3·1운동의 불꽃을 일으킨 그는 민족의 독립성을 지키고자 헌신했던 애국자였다.
다시 봄, 3월을 맞이하며 우리는 손병희 선생의 애국정신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7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동학에 입문하며 맞은 인생 전환기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1861년은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한 바로 다음 해로 포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해이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동학에 입문해 최제우의 제자가 된 해이기도 하다.
고종 19년(1882년), 스물둘의 손병희는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문했다. 그는 입문 3년 만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됐고, 이 사이 동학의 교세는 날로 퍼져갔다. 1892년 손병희는 최시형 등 간부들과 함께 교주 최제우의 신원 운동(동학교도들이 교주 최제우의 죄명(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임)을 벗기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펼친 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무렵 정부의 부정부패가 심화되어 전라도 지역에서는 전봉준이 동학교도들과 함께 일대 항쟁을 전개했다. 손병희는 1894년 호서지방 중심의 북접(北接) 사령관인 통령 관직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했다.
손병희가 이끌던 북접군은 관군을 연파했고, 전봉준과 합세해 남북접연합군을 형성했다. 그러나 관군의 진압과 일본군의 개입으로 공주 우금치 전투(1894년)에서 패전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은 사실상 종결됐고, 손병희는 도망자 신세가 됐다. 전봉준을 위시한 우두머리들은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오직 손병희만 살아남았다. 손병희는 원산, 강계 지역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그는 관군의 추격을 피해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교세 확장 및 포교에 힘썼고, 최시형에게 성실한 태도와 역량을 인정받아 ‘의암(의로운 암자(사찰) 같은 인물이 되라는 뜻)’이란 호를 받았다.
1897년 손병희는 스승 최시형으로부터 동학 제3대 교주로 임명됐다. 1898년 관군은 최시형을 붙잡아 단성사 뒤편에서 교수형을 거행했고, 1901년 계속되는 탄압을 피해 손병희는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이상헌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

청주시 북이면 금암리에 있는 손병희 생가와 기념관
천도교를 창건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다

손병희는 일본에서 망명 중인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이 구국의 길을 모색했다. 또한, 1904년에는 갑진혁신운동(甲辰革新運動)을 추진하여 교도들에게 양복을 입게 하고, 단발을 지시하는 등 서구적 문명 개화운동을 전개했다. 아울러 심복인 이용구를 국내에 파견, 진보회를 결성케 하여 중추기관으로 삼았다. 진보회는 회원이 11만 명에 달하는 큰 단체로 발전했지만, 많은 회원이 참살, 익사 당하기도 했다. 결국, 이 단체가 동학교도들인 것이 밝혀지자 정부의 탄압이 더욱 극심해졌다.
그는 진보회를 앞세워 농민층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을 규합해나가려 했지만,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버린 이용구가 이끄는 진보회는 손병희의 뜻과 달리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로 변질되면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매국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손병희는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함으로써 친일화된 진보회와의 단절을 서두르는 한편, 1906년 1월 귀국했다. 이후 동학 내부에서 활동하던 일진회의 친일 인사들을 출교시켰고,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 교세 확충에 전력을 다했다.
이때 손병희는 동학의 본질인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일깨워, ‘사람이 곧 한울(하늘)이니 지금의 세상이 이처럼 혼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혼란한 때문’이라면서 ‘먼저 사람의 마음을 고쳐 세상의 혼란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민족대표 33인
비통과 절망을 통감해온 애국자의 선택

손병희는 민족의식에 뿌리를 둔 천도교에서 살아왔기에 민족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계몽운동으로 눈을 돌렸고, 각 학교에 의연금을 지원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해 갔다. 또 보성사(普成社)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천도교월보」(1910년 8월 15일 창간되어 1937년 5월 폐간되기까지 통권 제295호를 낸 천도교회의 월간 기관지)와 「만세보」 등 각종 서적을 발행하여 계몽과 문화사업에 관한 관심도 늦추지 않았다.
국내 상황은 1904년 망국 사태를 인식한 의병의 궐기가 눈부셨고 한편으로 교육, 문화 등 국민계몽을 통한 실력양성 운동이 전개됐다. 천도교단의 처지에서 볼 때 대체로 동학과는 사상이 상충하여 의병에 합류하기는 어려운 처지였고, 더욱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무력투쟁에 대한 실패의 경험을 겪은 처지에서 또 다시 무력항쟁의 방략을 구사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실상이었다.
1907년 손병희는 일본 망명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임을 깨닫고, 귀국 후 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아 먼저 여러 학교에 후원했다. 당시 문창학교, 보창학교, 양영학교, 창동학교, 합동소학교, 광명소학교, 석촌동소학교 등 경영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교에 일정액의 후원금을 매월 지원했다. 나중에는 당시 최대의 사립학교였던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를 인수해 경영하며 민족의 동량을 육성했다. 이밖에도 대구의 교남학교(현 대륜고등학교), 일신보통학교, 청주 종학학교 등 7~8개 학교를 후원하거나 설립했다.

서울 송현동에 건립된 천도교중앙총부 건물
3·1운동의 불꽃을 일으키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강화회의(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에 관한 회의로, 1919년 1월 18일, 프랑스 외무부에 전승국인 27개국 대표가 모여 시작됨)가 열리려던 때에, 손병희는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現 보성중·고등학교)장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사항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1919년 1월 동경유학생 송계백이 손병희를 찾아왔다. 2월 8일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2·8 독립선언을 학생들이 외칠 것이고, 이미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또한, 이때 고종이 승하하며 반일감정이 극에 달했고, 국내에서도 독립선언 계획이 급속히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손병희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하여 독립의 열망을 알리고, 일본의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의 열국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와 청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손병희는 최린, 권동진, 오세창과 3·1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3대 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나갔다. 최남선에게 독립선언서 초안 작성을 지시했고,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이 완성되자 손병희는 직접 이를 검토했다. 그리고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검토가 이루어진 후, 천도교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손병희를 중심으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의 총 33명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3월 3일이었던 거사일은 고종의 장례식과 겹쳤기 때문에 혹여 장례식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으로 앞당겨지며 최종 확정됐다.
1919년 3월 1일. 총 29명의 민족대표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진행했다.
나머지 4명(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의 민족대표는 각 지역에서 민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배포하고 함께 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피운 대한독립의 불꽃은 남녀노소·지역·국경을 초월해 퍼져나갔다. 이는 한 달 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인도·중남미 등 제국주의에 신음하는 수많은 나라로 퍼져나갔다.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체포된 손병희는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년 8개월 만에 뇌출혈로 풀려났다. 그러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19일 천도교 건물 상춘원(종로구 숭인동 72번지)에서 요양 중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서울 우이동 언덕에 안장됐고, 1966년 종로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위)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아래)
손병희 동상(종로 탑골공원)
3·1독립선언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이 선언은 오천 년 동안 이어 온 우리 역사의 힘으로 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은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영원히 자유롭게 발전하려는 것이며, 인류가 양심에 따라 만들어가는 세계 변화의 큰 흐름에 발맞추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고 시대의 흐름이며, 전 인류가 함께 살아갈 정당한 권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 독립을 가로막지 못한다. (후략)
손병희(孫秉熙) 선생(1861.4.8. ~ 1922.5.19.)
- 구한말 독립운동가
- 1894년 9월 통령으로 동학농민운동 참여
-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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