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55] 인생 2모작

묵향 가득한,
없는 배움의
삶을 살다

서예가 김용 회원

천천히 묵을 간다. 짙은 먹빛이 우러나오면 붓에 먹물을 적신다. 어떤 글자를 어떻게 쓸 것인가. 그의 고민은 하얀 화선지 앞에서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서예 붓을 잡은 지 어언 40여 년. 서각과 와각으로까지 작품 영역을 넓히며 오늘도 끝없는 배움의 길을 정진하고 있는 김용 회원을 만나 보았다.
  • 글. 이경희
  • 사진. 김도형

붓과 먹으로 쌓는 자기 수양

김용 회원의 집에 방문하면 먼저 그만의 갤러리를 한 바퀴 돌아야 한다. 안방, 작은방, 거실까지 빼곡하게 채운 그의 서예 작품, 문인화, 서각, 와각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은 채 방문객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고아한 선비 같은, 그러면서도 어딘가 엄격해 보이는 김용 회원의 느낌은 서예와 참 잘 어울린다. 37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군위정보고등학교에서 퇴임을 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아이들에게 무섭게 대하는 선생님도 아니었고, 말수가 많은 선생님도 아니었지만 조용한 카리스마를 풍기면서 꼼꼼하게 아이들을 살피던 그를 학생들은 무척이나 따랐다. 돌이켜보면 자신에게 참 잘 맞았던 교직생활이었다고 김용 회원이 읊조린다.
“서예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한창 교사 생활을 하던 40대 초반쯤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저는 미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런 제게 처음으로 붓글씨를 가르쳐주신 분은 아버지였죠. 지역에서 정미소를 운영했던 아버지는 그 시절에도 신문을 구독해 읽고 7명의 아들을 모두 대학에 보냈을 만큼 남다른 교육열을 보이셨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교사가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과 권유가 컸지요.”
40대에 접어들면서 서예를 시작한 것은 경북지역으로 발령받아 이동하며 다닐 때 여유 있는 저녁 시간을 이용해 학원에 다니며 서예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예의 장점은 굉장히 많습니다. 자기수양은 물론, 교양을 쌓는 데도 크게 도움이 돼요. 글씨를 쓰려면 고서와 책을 많이 읽어야 해요. 좋은 글귀들을 발췌해서 써야 하니까요. 「명심보감」, 「채근담」 등도 전부 서예를 시작하면서 읽은 책입니다. 저는 한글보다 한자를 더 많이 쓰고 공부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독을 했습니다. 「서예의 길잡이」라는 책도 열심히 봤지요.”
그렇게 배운 서예는 그에게 학교에서는 서예반 지도교사를 맡게 했고, 지금도 그의 기억에는 학생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치고 함께 화선지에 글을 써 내려갔던 시간이 생생하다.

여전히 치열하게 도전하는 순간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노년의 삶을 고민하지만 김용 회원은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서예를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퇴직 이후에 그는 서각, 와각 등으로 작품의 범위를 넓혀가며 더 치열하게 다양한 분야에 도전했다.
“나무에 새기는 것은 서각, 기와에 새기는 것은 와각이라고 합니다. 서예를 하다 보니 모든 작품들을 표구해서 보관하는 게 불가능했고, 종이만으로는 보관이 쉽지 않더라고요. 나무나 기와에 작품을 남기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각과 와각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의 서각 작품은 보통의 서각 작품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바로 자신만의 것이다. 서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이들의 글씨로 서각을 하는데 김용 회원은 이를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생각한다고 단호히 말했다. ‘자필’과 ‘자각’이 하나가 됐을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죽은 나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서각은 재료 준비부터 꽤나 까다롭다. 일단 재료인 나무를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나무를 구할 수 있는 제재소가 거의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조심해야 할 부분도 다르다.
느티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을 주로 쓰는데 오동나무 같은 경우는 매우 가볍지만, 조금만 실수를 해도 글자가 모두 부서지는 대형사고가 나기 때문에 나무 각각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한다. 칼과 망치를 이용한 작업이라 체력과 집중력을 안배해서 작업은 하루에 2시간 정도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소음 때문에 공원이나 하천변으로 나가 작업을 한다니 예술가의 길은 확실히 쉽지 않다.

“서예를 하고 싶은데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개를 심으려 하지 말고 한 가지를 심어라, 그리고 많이 심어라, 거기서 추수하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콩을 심지 않은채 콩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연습을 안 하면서 잘 쓰기를 바라는 것이나 비슷하거든요. 무엇이든 결국은 많이 심어서 공들여 가꾸면 많이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종두득두(種豆得豆)로 나아가는 삶

김용 회원은 서예와 서각, 와각 작업 외에도 관련된 의미있는 활동들을 두루 하고 있다. 삼성현대미술대전 서예부문 우수상, 대구경북미술대전 특선을 비롯해 다양한 공모전에서 수상하면서 경산의 명예를 높였고 경산 정평성당에서는 주민들에게 재능기부로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 액수는 크지 않지만, 작품을 통해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개인적으로 의미를 두고 있다. 중평성당, 대구가톨릭사회복지회, 밀알후원회 등 여러 기관의 푯말들은 그가 작품료를 받고 직접 써준 것들이니 오갈 때마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혹자는 말한다. 가만히 앉아서 화선지와 붓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으냐고. 하지만 김용 회원은 미소로 고개를 흔든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제대로 쓰는 데 걸린 시간이 10년이었다며 지금도 자신의 글씨는 완성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고 여전히 배울 게 많다는 것이다.
“저만의 서체를 만드는 과정은 평생공부입니다. 예술은 다 마찬가지지요. 이게 어디까지 하면 완성이겠습니까? 어디까지가 경지겠습니까? 지금 글씨를 써도 제 마음에 100% 들지 않아요. 상을 받고, 전시회를 열고, 주변에서 대단하다고 칭찬을 받아도 제 마음에는 늘 뭔가가 부족합니다.”
한 글자를 제대로 쓰기 위해 100번씩 쓰고 또 쓴다는 그에게 서예란 언제나 다다를 수 없는, 다다르기 위해 오르고 또 오르는 높은 산봉우리다. “시간이 잘 가요.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라는 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닌 이유이다.
서예는 참 어려운 예술이다. 무엇보다 하루아침에 글씨가 완성되는 것이 아닌 만큼 끈기와 인내심은 서예 활동을 이어나가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종두득두(種豆得豆)’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난다’라는 뜻이에요. 서예를 하고 싶은데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개를 심으려 하지 말고 한 가지를 심어라, 그리고 많이 심어라, 거기서 추수하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콩을 심지 않은 채 콩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연습을 안 하면서 잘 쓰기를 바라는 것이나 비슷하거든요. 무엇이든 결국은 많이 심어서 공들여 가꾸면 많이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김용 회원은 오늘도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앉아 깊게 먹을 갈고 정성을 다해 붓을 잡는다. 그리고 묵향 가득한 공간에서 오롯이 자신만의 세계로 몰입한다. 나이를 잊고, 세월을 잊는 침전과 배움의 시간, 그는 여전히 공부하고 도전하는 아름다운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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