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자주적 역량 강화에
평생을 바친 불멸의 투사,

‘신익희 선생’

“우리는 현실을 직시, 정시하여야 한다. 우리가 구적을 몰아내고 나라를 도로 찾는 데는 부질없이 감상에만 흐르지 말고, 현대로 개화 진보한 일본에 가서 배워 그 놈을 이기고 일어서야 한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돼 망국으로 치닫게 되자 역설적으로 독립운동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극일의 심정으로 일본 유학을 단행한 신익희 선생. 그는 해방 전에는 투철한 독립운동가로, 해방 이후에는 민족교육운동가로 한평생을 자주적 역량 강화에 피땀을 쏟은 불멸의 투사였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7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신익희(申翼熙) 선생(1894.6.9.~1956.5.5.)
- 독립운동가
- 1917년 중동학교 교사, 보성 법률상업전문학교 교수
-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내무차장 겸 내무총장 서리
- 1946년 국민대학 초대학장, 대한반공연맹 총재, 자유신문사 사장
- 1948년 제헌 국회 국회의장
- 1955년 민주당 창당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실력 양성으로 국권 회복을 꿈꾸다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신익희는 5세 때 둘째 형 신규희에게 한학을 배웠다. 7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7~8세 때 「삼국지연의」와 「수호전」을, 10세 이후 「반계수록」, 「연려실기술」 등을 모두 독파했다. 또 10세 때 조카들,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들의 자제들을 불러 모아 한글을 가르쳤다. 어릴 적 그의 모습은 요즘 말로 천재였으나, 가정은 불우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형편이 여의치 않아 조카와 함께 하숙하며 가정교사로 일해 직접 학비를 벌어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1908년 서울로 상경한 신익희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그는 일제로부터 국권을 되찾고 민족적 수모를 설욕하는 방법은 서구의 진보한 문명을 수용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임을 깨닫고 영어과를 선택했다. 당시 학우들은 사회주의 노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신익희가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자 ‘영국식 젠틀맨’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조국의 운명은 나날이 쇠락하더니 결국 그가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해에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망국의 상황에 당면한 신익희는 역설적으로 일본 유학을 꿈꾸고, 이때 참판 이명재의 딸 이승희와 결혼했다. 훗날 신익희와 이승희의 아들 신하균 역시 독립운동가로 자라 광복군으로 활동했고 건국훈장을 받았다.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본격적으로 시작한 독립운동, 3.1만세운동 확산의 도화선이 되다

1913년 3월 신익희는 와세다대학 정치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유학생의 통일 조직인 ‘학우회’를 조직해 총무·평의회 의장·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리고 유학생들은 물론 국내 청년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13년 귀국하여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어 신문화와 개화사상을 보급했으며, 1917년 보성 법률상업전문학교로 옮겨 비교 헌법·국제공법·재정학 등을 강의했다.
그러던 중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의 강화 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를 천명하자, 신익희는 이를 기회로 우리 민족도 독립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국내 독립운동을 밀의하고, 같은 해 11월 말 국외 독립운동 단체 및 지도자들과 연락할 사명을 띠고 해외로 나갔다. 그는 우리의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시작될지라도 결국에는 군사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먼저 만주지방으로 가서 독립군 지도자 김좌진을 만났다.
1918년 11월 말 상해에 도착한 그는 국내의 독립운동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다음 해 2월 중순 상해를 떠나 천진·북경·심양을 거쳐 3.1만세 운동 발발 직후인 3월 2일 국내로 귀국했다. 평양을 지나면서 3.1만세운동을 목격한 그는 곧 서울에서의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이에 따라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된 제2차 독립 만세 시위가 남대문 역 앞에서 대규모로 전개됐는데, 이 시위는 3월 3일 고종의 장례에 참배하고 귀향하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줘 3.1만세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경찰로부터 지명수배를 당했다. 보성 법률상업전문학교 법학 교수 및 중동학교 교사직을 사직하고 일본 옷과 신발을 신은 뒤 도망치는 등 우여곡절 끝에 1919년 3월 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용산역을 빠져나와 중국 망명에 성공했다.

1945년 상해 임시정부수립 기념사진
한·중 합작을 꾀한 다방면의 노력

만주·봉천을 거쳐 3월 19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독립 임시사무소를 찾아갔다. 이곳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가 된다. 각지에서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헌장을 제정한 뒤 4월 13일 임정의 수립을 대내외에 공포했다. 이때 신익희는 임시의정원 의원(지금의 국회의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했다. 임정이 만들어지자 그는 초대 내무 차장 겸 내무 총장(현 행안부 장관) 대리로 선임됐다. 이후 그는 임정의 분열을 방지하는 데 심혈을 쏟았다.
특히 그는 독립운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중국 정부의 협조가 필수임을 인식하고, 1921년 4월 독립운동 단체인 한중호조사를 창립해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 후 1923년 임정의 개편을 둘러싸고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첨예했던 때에 대일 군사 항쟁을 한·중 합작으로 실현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군에 들어갔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난 중국 국민당군 육군 대장 호경익을 찾아간 신익희는 한·중 합작 투쟁의 명분과 승산을 설명했고, 호경익의 추천으로 제2군 육군 중장으로 임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중국 청년 6백 명과 한국 청년 5백 명을 모집하여 유격대의 일종인 분용대를 편성하고, 군사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1924년 가을 신익희의 후원자인 호경익이 사망함에 따라 한·중 합작에 의한 국내 진공작전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후 신익희는 조선의용대 병력이 모여 있는 낙양으로 가서 1941년에 한·중 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상임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다시 임정에 합류했다.
1941년 6월 그는 임정에서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잠행중앙관제(이하 ‘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에서 활동했다. 잠행관제란 임정이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하면서 헌법을 개정했는데 이때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제정, 공포한 관제를 말한다. 1944년 4월 잠행관제로 내각이 개편되자 신익희는 임정 내무부장에 다시 선출되었고, 1945년 2월 임정 내무부 산하 경위대(임정 요인 경호와 청사경비 담당)를 조직했다. 1945년 8월 10일 쓰촨성 충칭에서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 소식을 접했고, 8월 15일 임정 요원의 귀국 절차를 중국 정부와 주중 미군 당국의 교섭 대표로 위촉받아 주중 미군사령부에 찾아가 교섭했다. 교섭은 성공했으나 대한민국 임정은 참전국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유엔군 측은 임정 소속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게 했다.
참전국으로 인정됐다면 정부 자격으로 여러 대의 비행기 지원이 이뤄져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두 함께 귀국했을 것이고, 환영 나온 국민들의 환대를 받았을 터였다.

1945년 임시정부 국내 연락원으로 임명되어 선발대로 귀국한 요원들(가운데가 신익희)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 육군제1훈련소를 방문한 신익희 국회의장
교육 계몽과 민주화 운동에 끝까지 힘쓰다

광복 이후 그는 1945년 12월 2일 임정 요원의 제2차 환국 때 벅찬 감격과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 회의(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를 포함한 7개 분야의 의제를 다룬 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를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했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1946년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을 설립하여 민족국가 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 초대 사장이 되어 민족 자주성을 함양해 갔다. 1948년 5월 제헌의원 선거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하여 당선됐고, 이후 초대 국회 부의장과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발전시켜 당 대표와 최고위원이 됐으며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평소 즐기던 홍차를 마시던 중 뇌내출혈로 급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945년 귀국 환영사를 낭독하는 신익희
1956년 5월 3일 한강 백사장에서 대선 연설 중인 신익희 국회의원을 지낸 모습 대통령 선거 후보 출마 선거 유세차 신익희 장례식의 시가행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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