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의열 투쟁으로 민족의
아픔을 치유한 의학도

‘나창헌 선생’

일제의 무력통치 아래에서 만세시위 같은 비폭력적 방법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무기와 피로써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철혈주의에 기반한 의열 투쟁을 평생의 독립운동 방략으로 실행한 나창헌 선생. 안정된 미래와 안락한 삶이 보장된 의사라는 직업을 뒤로 하고, 독립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스스로 선택한 그는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는 데 일생을 바친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7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나창헌(羅昌憲) 선생(1896.1.29~1936.6.26)
- 의사, 독립운동가
- 1919년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조직·활동
- 1922년 한국노병회 활동
-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차장 등 역임
- 1926년 병인의용대 활동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독립운동에 굳은 뜻을 품은 청년시절

1896년 평안북도 희천에서 태어난 나창헌은 유년시절에 근대교육을 받고 식민지 하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독립만이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서울에 올라와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의 그 어떤 의료계 종사자보다 과격한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이었던 나창헌은 의사 선배들과 함께 3·1운동 추진 계획에 참여한다. 나창헌을 포함하여 서울의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서울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방에 모여 독립선언에 대해 논의했다. 그 후 나창헌은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가까스로 일제의 검거를 피한 후, 서울에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결성한다. 그와 뜻을 함께한 학생 대표들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해가는 3·1운동을 지원하고, 상해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에 국내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한다. 1919년 5월, 나창헌은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특파원 자격으로 상해에 가서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특수 임무를 수행한다. 이미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의사가 아니었다. 한 명의 독립투사로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던 것이다.
상해에서 임무를 마친 나창헌은 국내로 들어와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과 조선 말기 문신 김가진의 국외 탈출 계획을 추진하게 되는데, 실제로 같은 해 10월 김가진을 상해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의친왕 이강을 변장시켜 경의선을 이용해 중국 안동역(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단둥역)까지 데리고 갔으나 그곳에서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실패하게 된다. 그런데 애초에 왜 이들을 상해로 탈출시키려 했을까? 의친왕 이강은 대한제국의 왕족이고, 김가진은 대한제국의 귀족이었다.
이것이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 것일까?

대한민국청년외교단원의 핵심 인물들(1919년)
전 세계에 독립열망과 의지를 공표하기 위한 노력

김가진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북간도군정서(1919년 북간도에서 만든 무장독립운동 단체) 고문으로 생애 마지막까지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1910년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뒤 식민지 지배층을 포섭하기 위해 김가진에게 남작 작위를 수여했는데, 그는 일제로부터 연금과 은사금을 일절 받지 않았고, 오히려 그 시기에 독립운동 비밀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 사학계에서는 일종의 위장술을 펼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70대 중반의 노인이 목숨을 걸고 상해로 망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김가진의 상해 망명사건으로 인해 일제는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타격을 받는다.
동시에 임시정부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당시 일제는 3·1운동을 일부 무지몽매한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에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들의 망동’ 이라고 국제적으로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에 대한 반격으로 대한 제국의 왕족(의친왕 이강)과 귀족(김가진)을 해외로 망명시켜 이들도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일제가 원하고 만들던 이미지인 ‘불령선인’의 오명을 벗고,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는 간결하고 진실된 이야기를 전 세계에 알리려 했다.
김가진의 임시정부 망명은 초기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기틀을 형성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수행했다. 상해로 망명한 김가진은 1894년 청일전쟁 종전 후 일본에 보빙대사(報聘大使)로 간 것을 비롯해 특파대사 자격으로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 1900년부터 5년간 미국에 유학하는 등 국제 정세에 밝은 의친왕 이강이 임시정부에 참여한다면 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해 10월 말부터 11월 초에 걸쳐 서울·평양을 비롯하여 의주·선천·정주·영변 등지에서 대대적으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김가진은 임시정부 특파원 이종욱과 1919년 8월 조선민족대동단(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한 나창헌을 통해 의친왕 이강을 탈출시키려 했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이종욱이 나창헌과 함께 한반도에서 의친왕 이강을 안동역까지 데리고 가는 역할을 수행했다. 1919년 11월 10일 나창헌과 의친왕 이강을 포함, 5명의 임시정부 요원이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의친왕 이강은 평소 독립운동가들과 서한을 주고받는 등 자주 왕래를 했다. 이로 인해 일제는 의친왕 이강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기록하고 있었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의친왕 이강이 사라진 것을 알아챈 뒤 곧바로 국경지대에 비상 명령을 내렸다. 의친왕 이강 일행이 탑승한 열차는 안동역에 도달할 무렵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체포됐다. 이 일은 일제를 경악시킨 사건이 됐다. 3·1운동에 이어 남작 김가진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의 왕족이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하려 했던 사건이었다. 만약 이 탈출 작전이 성공했다면 임시정부의 초기 위상은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일제가 남작 지위를 주었으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가진의 법부대신 시절 모습(1904년)
독립 투쟁은 철과 혈로! 무력 투쟁 중심의 철혈단을 결성하다

결과적으로 의친왕 탈출 사건은 수포가 되어 조선민족대동단은 거의 일망타진(一網打盡)되었다. 망명이 좌절된 후, 의친왕은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가 상해에서 발행되는 중국 신문인 「민국일보」 1919년 12월 4일 자에 ‘한국 태자의 일본에 대한 반감’이란 제목으로 보도됐다. 이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한 친왕(親王)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한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를 원한다(…)” - 「독립신문(1919.11.20.)」 의친왕 친서
그 후 나창헌은 3·1운동 같은 비폭력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력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의열투쟁을 시작했다. 1920년 봄, 나창헌은 동지들과 뜻을 모아 독립은 철과 혈로 쟁취한다는 독립운동단체 철혈단을 결성했다. 다음은 철혈단 선언서의 일부이다.
“우리 독립은 우리의 사활문제임은 췌언(贅言)을 기다릴 것이 없을 것이며, 우리 들의 독립은 총과 검과 혈이 아니면 성공할 수 없다. 고로 우리들은 금후 한 사람이 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철과 혈로써 저 간악하고도 악독한 왜구(倭仇)를 배제할 것이다.”- 기원 4253년(1920년) 6월, 철혈단 선언서 중에서
이 선언서를 보면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또한 선언서의 날짜를 기원 4253년으로 쓴 것은 단군, 홍익인간 등의 한민족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는 예수가 탄생한 해를 원년으로 삼는 연호인 반면, 단기는 단군기원의 약자로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해(B.C. 2333년)를 원년으로 삼는 우리나라의 연호다.
당시 서기는 일본인들이 흔히 쓰던 표현인데 반해, 단기는 임시정부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자주 사용한 표현이며, 일제에 강렬히 저항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원동임시위원부 단원 현황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나창헌 선생의 주소가 기록되어 있고 직업은 의업(醫業)이며 병원을 개설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서거 전까지 지속된 철혈주의에 기반한 독립운동

나창헌은 꾸준히 철혈단의 이름으로 상해에서 일본고위관료 및 민족반역자 암살·파괴 활동을 벌였고, 1922년 결성된 한국노병회에도 참여했다. ‘1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전비를 마련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된 것이 한국노병회인데, 나창헌은 이곳의 이사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1925년 6월 독립운동단체인 정위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가를 사칭해 동포들의 금품을 강탈하는 자들을 처리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 후 정위단을 기반으로 1926년 독립운동단체인 병인의용대를 결성하고, 실추된 임시정부의 권위 회복 및 의열 투쟁에 매진했다. 여기서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병인의용대 대원들을 지휘하여 세 차례 일본총영사관을 폭파시키는 의거를 전개 했다. 비록 총영사관 전체가 폭파되진 않았지만, 건물의 유리창과 부속 창고와 건물들이 크게 파괴되었고,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1933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의 배후 주도자 중 한 명으로 안창호가 일본 경찰에 지목되기도 하는데, 나창헌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상해에서 흥사단 (1913년 안창호가 신민회의 후신으로 조직한 독립 단체) 활동을 하는 등 의열 투쟁을 지속해갔다. 그러나 1936년 봄부터 위암 때문에 고생하던 그는 같은 해 6월 26일 40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병인의용대의 일본총영사관 폭파 의거에 대한 당시 신문 보도(「동아일보」 1926년 9월 24일 자 기사 사본)
대전 국립현충원에 있는 나창헌 의사의 묘(출처-대한의사협회)
흥사단의 기념 사진(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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