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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22 Vol.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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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우리 말, 우리 역사를 알리기 위해 목숨 바친 교육자

한글을 지킨 독립운동가 한뫼(桓山) 이윤재 선생


한뫼 이윤재 선생은 한반도 전역은 물론 만주까지 곳곳을 찾아다니며 한글을 알리고 「우리말큰사전」 편찬 작업 중 순국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다. 조선어학회 사건 80주년을 맞은 2022년 한글날을 기념해 한글을 통한 민족정신 계승과 조국의 독립이 자신보다 소중했던 이윤재 선생의 삶을 기리고자 한다.

이경훈 보라고등학교 역사 교사

이경훈 역사 교사는 보라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일 간 역사 갈등과 화해를 연구하면서 「쟁점 한일사」, 「마주 보는 한일사」(공저) 등을 출간했다. 동아시아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원교사,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가 꼭 바라고 나아갈 희망 한 가지가 있다. 오늘부터 우리가 전 민족적 대방침을 세우고 대계획을 정하자. 그리하여 너니 나니 가리지 말고 오직 한 깃발 아래 모여서 저기 보이는 한 목표를 향하여 서로 손목 잡고 나아가자.”(중략)

- 1927년 신년의 희망을 밝힌 글 중에서
(「동광」 제9호, 1927. 1)

역사와 민족 정체성을 가르치는 독립운동가

한뫼(또는 환산) 이윤재(1888~1943) 선생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인 1894년부터 10여 년간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이후 김해 공립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와 대구 계성학교 고등과정을 다니며 신학문을 배웠다.
이 시기는 조선이 일제의 침략을 본격적으로 받으며 식민지로 전락한 때였다. 선생은 이 같은 상황이 민족의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졸업한 청년 이윤재 선생은 마산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현 마산의신여중)에서 우리말과 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 정체성과 독립 정신을 교육했다.
이윤재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21년 11월에 개관한 김해한글박물관
[출처: 김해한글박물관]
이윤재 선생은 평안북도 영변 숭덕학교에서 근무할 때 ‘조선독립선언서’를 등사, 배포하면서 3·1운동을 앞장서 계획하고 주도했다. 이 일로 체포되어 재판정에 선 선생은 “조선 민족이 조선 민족의 독립을 자결하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우리가 독립을 획득하는 것은 강탈당한 물건을 돌려받는 것과 같으므로 죄가 아니다. 독립선언서는 불온한 문서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배포하는 것도 보안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변하며 3·1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역사 연구로 민족의 얼과 정신을 알리다

결국 이윤재 선생은 3·1운동으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판결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출옥 후에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베이징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한매일신보」와 「권업신문」 등에서 민중에 의한 독립을 주장하며 민족 사학을 연구하던 신채호 선생의 영향을 받아 역사를 좀 더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1924년 베이징 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신채호 선생이 재직하던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민족운동 단체 ‘수양동우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선생은 수양동우회 기관지인 「동광」에 ‘쾌걸 안용복’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역사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에는 조선의 역사와 지리, 어문에 관한 글을 주로 다루는 잡지 「한빛」을 창간하며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또 1930년부터 「동아일보」에 ‘성웅 이순신’, ‘세종과 훈민정음’을 연재하고 「신동아」에 ‘충의 의인 민충정공’, ‘강감찬의 귀주대첩과 권율의 행주대첩’ 등을 발표했다. 선생은 이처럼 국난 극복의 영웅과 민족문화 창조의 위인을 소개하며 독립의 희망을 고취하려고 노력했다. 선생은 “희망과 용기가 없는 인간은 산송장으로 볼 수 있다. … 조선 사람은 역경에 처해 있을수록 더욱 정신을 진작하여야 할 것이다. 역경을 극복하려는 부단한 노력 앞에는 반드시 광명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질없는 ‘팔자 타령’을 버리고 이 사회를 위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일하기로 결심하자”라고 외치며 민족의 얼과 정신을 강조했다. 이런 취지에서 일본의 식민 사관에 의해 한국사가 왜곡되는 현실을 바로잡고자 1934년 7월 ‘진단학회’의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이윤재 선생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성웅 이순신’ 1회 기사 (「동아일보」 1930.10.03.) [출처: 네이버 뉴스]

민족문화와 한글을 보존하려는 노력

1927년 8월 서울 협성학교에 근무하던 이윤재 선생은 조선 사람에게 조선말 사전이 한 권도 없다는 사실에 통탄하며 ‘조선어연구회’에 가입해 「조선어 사전」 편찬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1929년 조선어연구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했을 때 집행위원과 수정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기획했을 때 제정위원으로 참여했다. 선생이 한글 연구에 이처럼 빠르게 핵심 역할을 맡아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1913년 마산 창신학교에 재직할 때 함께 근무하던 주시경 선생의 제자 김윤경으로부터 주시경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전해 들은 뒤 오랫동안 우리 말과 글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 왔기 때문이다.
이윤재 선생의 한글 연구에 대한 의견은 발기인으로 참여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취지문에 잘 나타나 있다. “… 인류의 행복은 문화의 향상을 따라 증진되는 것이요, 문화의 발전은 말과 글의 합리적 정리와 통일로 말미암아 촉성되는 것이다. … 오늘날 세계적으로 낙오된 조선 민족이 갱생할 빠른 길은 문화의 향상과 보급을 급선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문화를 촉진하는 방편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말과 글자의 정리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즉 이윤재 선생이 생각한 한글 연구와 사전 편찬을 통한 한글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아래 민족의 언어인 한글을 정리하고 보급함으로써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해방 이후 민족 국가 건설의 초석을 다지려는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발행 「한글」 제1권 제1호 창간호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브런치]
이윤재 선생이 저술한 「한글공부」 표지와 내용(일부) [출처: 국립한글박물관 디지털한글박물관]
‘조선어학회(1931년 11월 조선어연구회에서 단체명 변경)’가 사전 편찬을 위해 어휘의 수집,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제정 등의 작업을 추진할 때 선생은 적극 참여했다. 1931년부터 4년간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조선어학회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개최한 한글 강습회에도 단골 강사로 나섰다. 또 1932년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을 복간할 때 편집과 발행을 도맡았다. 특히 한글 보급을 위해 「동아일보」가 신설한 ‘한글질의란’에 1930년부터 2년 동안 독자의 질문에 답변해 주었고, 1931년부터 브나로드운동* 이 전개될 당시 방학마다 고향으로 돌아가 한글 보급 운동을 전개하는 ‘학생계몽대’ 학생들의 한글 교재 「한글공부」를 저술해 제공하기도 했다. 이윤재 선생이 전국 각지에서 열린 조선어 강습회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한글 계몽운동을 위한 교재를 발간하는 등 한글 보급 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과거처럼 소수 엘리트 중심의 독립운동 시대가 가고 ‘민중의 시대’를 열어 모든 민족과 민중이 깨어나야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다.
* 브나로드운동: 1931년부터 1934년까지 4회에 걸쳐 「동아일보」사가 전개한 전국 규모의 농촌계몽운동.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 가자’라는 뜻의 러시아어이다.

끊임없는 옥고에 스러진 육체

이윤재 선생이 활발하게 한글 운동을 전개하던 1937년, 일제는 계몽 운동에 앞장섰던 180여 명의 지식인을 검거하는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민족운동 세력에 대대적 탄압을 가했다. 중·일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이른바 ‘총후(銃後, 후방)의 안정’을 위해 자행한 행위였다. 선생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회원으로 ‘일찍이 민족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던 자’로 간주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뒤 1년 6개월간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러나 출옥 이후에도 선생은 활발하게 사전 편찬 사업에 매진했다. 1940년 4월, 「한글맞춤법통일안」 개정안 발표를 주도하고, 6월에는 「외래어표기법통일안」 결정에도 참여했다. 1941년부터는 「기독신문사」 주필로 일하면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기반으로 한 「성경」 편찬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 일로 ‘한글 장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밤낮없이 사전 편찬 작업과 한글 운동을 전개하던 이윤재 선생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함경남도 함흥의 한 여학생이 일기장에 쓴 ‘국어(일본어)를 사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는 내용을 트집 잡아 발생했다.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에서 우리 말과 글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한 교사가 조선어학회 사전편찬위원임을 안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하고 주요 회원을 대거 체포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 ‘민족운동의 한 가지 형태로서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 깊은 꾀와 먼 장래에 대한 생각)를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의 형태’라고 탄압하며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했다. 일제 경찰은 내란죄를 자백받기 위해 ‘육전’, ‘해전’, ‘공중전’이라고 하는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가했다. 특히 이윤재 선생은 3·1운동에 참여한 일, 중국에서 유학한 일,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한 수양동우회에 가담한 일, 불온사상 단체인 ‘진단학회’에 가담한 일, 이순신을 성웅으로 신봉하는 글을 비롯해 민족사와 관련한 글을 여러 편 발표한 일 등으로 더욱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1943년 12월 8일 새벽, 55세를 일기로 함흥 감옥의 차가운 독방에서 옥사, 순국했다.
1937년 서대문 형무소 투옥 당시 이윤재 선생의 수형자 기록 카드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글 보급을 위해 일생을 바친 학자이자 교육자

의미하는 순우리말이고, 또 다른 호인 ‘환산(桓山)’의 ‘환’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생의 한글과 민족에 대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우리 말과 글, 역사 연구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그의 노력은 해방 이후 그의 동료들과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에 의해 현재 까지 면면히 남아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책임자로 체포된 이극로 선생은 1946년 신문사 인터뷰를 통해 “(이윤재 선생은) 일생을 통하여 조선말과 조선글을 연구, 보급하기에 일생을 바치신 분이다. … 조선어학자 가운데 문자의 통일과 보급을 위한 실제 운동에서는 이윤재 선생이 으뜸”이라며 그를 추모했다.
1948년 조선어학회에서 함께 활동한 동료들은 이윤재 선생이 뜻을 풀이하고 정리한 원고를 모아 「표준한글사전」을 편찬했다. 1953년 대한성서공회는 ‘한글 장로’의 영향으로 조선어학회가 완성한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맞춰 성경을 개정, 발행했다. 1962년, 한국 정부는 이윤재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1992년 10월의 문화 인물, 1998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등으로 선정해 선생의 한글 운동을 기리고 있다. 한편, 서울시는 2014년 광화문 일대를 한글 역사 문화 중심지로 조성해 세종로공원에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을 세워 이윤재 선생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한글 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케이 로고 이미지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제막식(2014) [출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