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말과 글의 힘을 세상에
보여준 언어 독립운동가

‘한징 선생’

한징 선생은 이윤재 선생과 함께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던 중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중 순국한 한글학자다. 당시 시대 분위기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이며 애국 활동이라고 믿었던 지성인들. 그들의 신념이 오늘의 한글 사용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면 이분들의 생애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호에서는 한글운동으로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노력한 ‘한징’ 선생을 소개한다. 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왼쪽)한글사전을 편찬하기 위하여 가나다순으로 모은 원고 (오른쪽)조선어사전
(왼쪽)한징 선생 (오른쪽)한징 선생 유품(조선어사전)
우리 말을 지켜라, 말모이 작업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에 사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항 직후 1874년 <로한사전>, 1880년 프랑스 파리 선교사들이 종교 홍보를 위해 출판한 <한불사전>, 1890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집필한 <한영사전>, 1897년 영국인 선교사 데일리가 집필한 <한영사전> 등이 있으나 이는 모두 외국인들이 한글을 배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한글에 대한 정리, 표준어 통일, 조선 8도 말이 정리된 사전은 없었다.
1907년 당시 고종 황제는 우리 글자를 널리 보급하려고 국문연구소를 만들었다. 즉, 오늘날의 국립연구소이다. 이 연구소의 이름은 배달말, 글모음, 조선언문회 등으로 바뀌었고 회장은 주시경 선생이었다.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은 초등, 중등, 고등으로 ‘조선어강습원’을 개설하고 전국 지방을 돌며 한글강습회를 개최하고 지역과 지방의 말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말모이’ 작업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작업이 한순간에 중단됐다.
을사늑약(1905년) 반대 운동을 주도하고 을사오적 처단(1907년~1909년)을 모의한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일제 요시찰인물로 감시받던 중, 주시경 선생이 갑작스럽게 사망(1914년)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후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힘을 합쳐 다시 ‘조선어연구회’를 만들고 사전편찬 작업에 힘썼는데, 이 과정에서 매우 크게 이바지했음에도 상대적으로 역사에 가려진 인물이 바로 ‘한징’ 선생이다.

민족성 유지에 힘을 모은 국어사전 편찬활동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극로 선생은 1929년 1월에 귀국한 후 우리 민족의 사전을 편찬하자는 이윤재 선생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어사전 편찬회를 조직했다.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영구히 유지하는 방법은 국어사전을 편찬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추진했다. 한징 선생은 사전 집필을 맡아 이극로, 이윤재 선생과 함께 참여했다. 이극로 선생은 순수 조선어를 맡았고, 한징 선생은 한문 계통의 어휘를 총정리 했다.
역사 기록에는, 해방 뒤 한글날을 맞이하여 조선어학회의 동지 이중화 선생은 한징 선생에 대해 “한징 씨는 그 집안이 400여 년 서울에 근거를 가진 집이니만큼 정확한 발음을 압니다. 발음과 한자말 주석에 공적이 큽니다. 이 사람 역시 빈한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의 부모에 대한 효성은 유명한 이야기로 참으로 모범적인 인물이었지요.”(「존귀한 희생자」 『자유신문』, 1945년 10월 9일)라고 쓰여 있다. 당시 사전 편찬원으로 함께 일했던 권승욱 선생도 한징 선생이 “언제나 쉴 새 없이 원고 쓰시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라고 전했다. 일제 말기 조선어학회 서기로 근무했던 이석린 선생은 당시 조선어학회에서 받는 월급이 박봉이어서 한징 선생은 퇴근한 뒤에도 인쇄소에 가서 교정 보는 일을 했다고 회고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한글날 행사가 금지되자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사무실에서 몰래 한글날 행사를 거행한 뒤, 신문지를 펴놓고 북어를 안주 삼아 먹으며 막걸리를 한잔씩 마셨다고 한다. 이때 한징은 “원고를 속히 마치도록 합시다. 그래서 큰 사전을 하루 빨리 활자화하여 얼른 세상에 퍼뜨려야지, 까딱했다가는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소. 왜놈들 하는 짓이 날로 수상합니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순우리말 사전, 조선어사전을 빨리 세상에 내놓고 싶어 했으며 우리말을 보존하고 우리 민족을 영원히 유지하고자 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 선생의 이런 신념과 태도는 함께 사전을 편찬한 이윤재 선생의 태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 일본이 조선의 글과 말을 없애 동화정책을 쓰고 있으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글과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 길이 후세에 전해야 한다. 말과 글이 없어져 민족이 없어진 가까운 예로 만주족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써두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해두면,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후에 이것을 근거하여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말과 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되고 또 민족운동이 되는 것이다.” (이윤재 선생이 젊은 청년들에게 한 말)

  • 12월 27일부터 30일까지 4일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우리말강습회를 개최한다는 광고(조선일보 1926년 12월 16일자)
  • 조선어학회 인사들(1935년)
말과 글의 의지에 담은 민족문화의 계승

일제는 당시 민족말살정책을 펼치고 있었고, 우리말과 한글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했다. 조선어학회 학자들은 사전의 완성을 통해 우리말과 조선의 혼을 영원히 유지하고자 했으며 사전이 완성되는 그날, 언젠가 조국이 광복되는 그날 우리 민족어를 되살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1942년 10월 일제는 사전 편찬위원 전원을 긴급체포하고 사전 원고 및 서적을 전부 압수했다. 이것이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민족의 언어를 영원히 유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민족정신의 유지, 즉 투쟁의 씨앗이 될 수 있기에 언어 독립운동에 해당한다. 국어학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도 나라를 지키려는 행동의 하나였던 것이다. 한징 선생도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자로 1942년 10월 1일에 체포되었다.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어 매일 난타를 당하고 물고문을 당했는데 왜 사전을 편찬했느냐는 일본 순사의 질문에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쓰고, 조선말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선생은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2월 22일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고문 속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조선어학회장 이극로 선생은 광복 후 이렇게 말했다.
“한징 선생은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에 종시일관 관계하여 사전편찬에는 누구보다도 그의 공로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극로, 「이미 세상을 떠난 조선어학자들」 『경향신문』, 1946년 10월 9일)
마지막으로 한징 선생의 말을 남기며 결론을 갈음한다.
“말과 글은 민족정신의 가장 중요한 소산인 동시에 민족정신이 거기에 깃들이는 둥주리다. 민족문화의 창조 계승 발전은 그 말과 글의 의지에 있다.”

  • 조선어학회가 엮은 한글(1942년) (사전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선어학회 사람들(1946년)
한징(韓澄) 선생 (1886. 2. 20 ~ 1944. 2. 22)
- 한글학자, 언어 독립운동가
- 순 조선어 대사전 편찬 전임위원
-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옥중 순국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services se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