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55] 인생 2모작

앙코르 커리어, 앙코르 라이프

서울대학교 미술관 도슨트 유장근

이름 유장근. 만 65세. 그는 이제 노인이라 불리기로 한다. 은퇴 후 중국어 강사, 호스피스 병동의 봉사자, 또 도슨트로 활동하는 유장근 씨에게 노인이라는 배역 하나쯤 늘어도 나쁠 것 없다. 노년의 삶은 자유와 기회로 가득 차 있고, 그는 어느 길로 걸어갈지 선택할 수 있다. 앙코르!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 글. 이성미
  • 사진. 김도형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나’를 찾다

고령자를 위한 비영리단체 시빅 벤처스(Civic Ventures)의 설립자 마크 프리드먼(Marc Freedman)은 자신의 저서 <앙코르(Encore)>에서 은퇴 이후 의미 있는 제2의 인생을 ‘앙코르 커리어(Encore Career)’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앙코르 커리어란 ‘일’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생산성’과 ‘헌신’을, 은퇴와 함께 생기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 선택할 ‘자유’와 결합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앙코르’라는 말에서 연상할 수 있듯 은퇴 후의 삶은 인생의 클라이맥스 후에 찾아온다. 그러나 여전히 무대의 연장 선상에선 주인공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또 환호를 받을 수 있다.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활동하고 있는 유장근 씨의 앙코르는 이전의 무대와 전혀 다르다. 유장근 씨는 1980년 LG그룹에 입사해 LG 유플러스 부사장 직위까지 올랐다가 만 30년 만에 퇴직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인생이었다. 그 역시 은퇴 이전의 삶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열심히 살았고, 잘 살았다. ‘올바른 삶’을 신조로 삼아 그것을 지켜왔고, ‘성공’이라 불릴만한 위치까지 올랐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은퇴는 유쾌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수로 여가를 보내며 헛헛함을 달랬다. 그러다가 뒤늦게 시작한 신앙생활이 새로운 물음을 제시했다.
“피정에서 신부님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화두를 던지셨어요. 생각해보니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았죠. 퇴직 후 이렇게 백수로 살 내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흐름을 깨뜨릴 도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아내가 평소 이야기했던 산티아고 순례에 나섰습니다.”
800km 남짓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는 많은 것을 얻었다. 세계 각국의 여행자 친구가 생겼고, 아내와 평생의 추억거리도 생겼다. 무엇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는 ‘가치 있는 삶을 살자’라고 다짐했다. 퇴직 전 온전히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 살았다면, 퇴직 후에는 ‘남을 위해 살아야겠다’라고 결심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난 것은 참 잘한 일 같아요. 그곳에서 제 과거를 정리해볼 수 있었으니까요. 돌이켜보면 참 열심히 살았어요. 그렇게 내 과거에 대해 ‘잘했다’라고 정리하고 나니 비로소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어요. 다른 퇴직자분들에게도 ‘과거를 정리하는 시간을 꼭 가져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과거를 잘 정리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헌신과 자유의 앙코르 커리어

산티아고에서 돌아온 후 그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백수가 아니었다. 학생이자 선생님이고 또 봉사자였다. 우선 아내가 봉사하고 있던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외국인 환자들에게 통역을 해주는 일을 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호스피스 자원봉사자 교육을 받고 봉사자들의 팔과 다리가 되어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쓴 일기와 아내가 찍은 사진을 정리해 <산티아고 길의 소울메이트>라는 책도 발간했다. 또 중국어와 미술사를 새롭게 공부했다. 새로이 배운 것은 그대로 두지 않고 사람들과 나누었다. 주민 복지관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중국어를 가르치고, 서울대학교 미술관에 도슨트로 일했다. 도심권 50+센터 이룸학교에서 ‘도슨트의 재미있는 그림 이야기’ 강좌를 신설해 강의도 했다. 퇴직 전보다 더 바쁘지는 않았지만 분명 더 행복했다. 어떤 일을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에 ‘헌신’을 더해 완벽한 앙코르 커리어가 되었다.
“요즘은 금요일마다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도슨트 활동을, 일요일에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을 해요. 도슨트 활동을 할 때는 사람들에게 ‘작품 한 편을 볼 때마다 시 한 편을 읽은 듯한 감동을, 전시 전체를 관람한 후에는 문학작품 한 권을 읽은 듯한 감동을 주자’라는 생각으로 작품을 설명하고요. 다행히 전시 관람객들도 “좋다”라고 평가해 주세요. 더 큰 감동을 드리고 싶으니 미술 공부도 계속할 수밖에요. 책도 많이 보고요.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기계발이 되는 거죠.”

저도 퇴직 후 스스로한테 놀랄 때가 많았어요.
나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지 평생 몰랐거든요.
무언가 정해서 열심히 공부했더니 할 일이 생겼고,
나에게 잠재되어 있는 재주도 찾게 된 거예요.
열정은 결코 은퇴하지 않는다

마크 프리드먼은 저서 <앙코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공적인 앙코르 커리어 개척자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은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유장근 씨도 똑같이 말한다. “우선 배우라”라고.
“퇴직 후 사람들은 ‘무엇을 배울지 모르겠다’, ‘배운 걸 어디에 어떻게 써먹나?’라고 고민해요. 저는 우선 첫 번째, 서두르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시간은 많아요. 우선 자신부터 찾으세요.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먼저 얻으세요. 두 번째, 무엇이든 열심히 해보세요.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럴 땐 우선 뭐든 열심히 해보는 게 좋아요.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 좋아지는 게 생깁니다. 세 번째, 돈에 얽매이지 마세요. 돈에 얽매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현저히 좁아져요.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돈은 자연스레 따라옵니다. 저도 퇴직 후 스스로한테 놀랄 때가 많았어요. 나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지 평생 몰랐거든요. 무언가 정해서 열심히 공부했더니 할 일이 생겼고, 나에게 잠재되어 있는 재주도 찾게 된 거예요.”
유장근 씨가 지금 하는 일은 그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열정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돈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그것이 ‘봉사’라는 이름이 되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환호를 얻는다. 가치 있는 삶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만 벌써 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어요. 책 발간도 준비하고 있고요. 호스피스 봉사는 65세가 정년이라 이제 또 어떤 일을 할까 그것도 고민이에요. 시간은 많고 배울 것도 많아요. 그러니 계속 걸어야지요. 부엔 카미노!”
‘일어나 앞으로 네가 가는 곳이 길이다… 너의 어깨에 잠자고 있는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라’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이 부른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노랫말이다. 유장근 씨가 가는 곳이 길이고, 그가 앞으로 펼칠 날개도 서너 개쯤 더 남아 보인다.
열정은 퇴직이 없고, 계속 ‘앙코르’를 외칠 뿐이다. 그에게 보낼 환호를 준비하기 위해 손을 모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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