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55] 인생 2모작

신인이지만 노련한
이 배우를 주목하세요

연극배우 신강균

따지고 보면 인생 2모작이 아니라 3모작이다. 광고인으로 22년, 대학 교수로 18년을 보낸 그는 이제 배우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그에게 배우는 되찾은 꿈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가온 기회다. 놀 듯이, 즐기듯이 연기하지만 무대에 펼쳐지는 그의 연기는 프로페셔널 그 자체다. 배우로서는 신인이지만, 지나온 세월이 가져다준 경험과 경륜이 연기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 글. 정라희
  • 사진. 김도형

소문난 광고 뒤에는 그가 있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카피만 들어도 ‘아, 그 광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 광고로 인해 침대는 가구가 아닌 ‘과학’이 되었다. 그 광고를 전혀 보지 못한 요즘 아이들도 이 카피를 구전으로 접했을 정도다.
“침대회사의 연구소에 가보니 엄청난 무게의 쇠공을 침대 스프링 위에 8만 번씩 떨어뜨리면서 연구를 하고 있더라고요. 매트리스 스프링이 몇 mm만 줄어도 폐기 처분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침대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그 속에 엄청난 공학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뿐이랴. 유한킴벌리의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동원산업의 ‘바다가 좋다’ 등 한국 광고사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 광고 뒤에도 그가 있었다. 국내 최초로 칸 광고제 동사자상을 받았고, 런던광고페스티벌에서도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광고인으로서는 최고의 성과와 영예를 모두 이룬 것이다. 국내 굴지의 광고대행사 오리콤에 입사해 기획이사까지 오른 후에는 대학으로 향했다. 때마침 교수로 임용된 한세대학교에 광고홍보학과가 생겼고, 그곳에서 학생들과 동고동락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지금이야 토론 수업이 보편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토론 수업을 전격적으로 도입해 학생들과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나누었다. 제자 중 70%는 지금도 광고홍보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제자 농사 하나는 제대로 지은 셈이다.

광고 전문가에서 대학교수 그리고 연극배우로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연극부 활동을 했고, 정년퇴임 전 서울대 총연극회 ‘관악 극회’에서 2~3회 공연을 하긴 했지만, 배우에 도전할 계획은 없었다.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이후, 교사였던 아내와 세계 일주를 하던 중 서울대 총연극회에서 같이 공연했던 후배 정진영 배우로부터 본인의 감독 데뷔작에 꼭 참여해달라는 섭외 전화를 받았다. 아직 여행 일정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다가온 운명의 갈림길에서 그는 ‘이 나이에 무슨’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기회를 잡았다.
그 후로 그의 이력은 자연스럽게 배우의 길로 가고 있다. 배우 정진영의 영화감독 데뷔작 「사라진 시간」에 출연했고, 극단 관악극회 회원 자격으로 연극 「망자 죽이기」 무대에도 올랐다. 한 달 동안 이어지는 장기 공연에 주연배우로 무대에 오르는 일은 그야말로 ‘도전’이었다. 우선 소화해야 할 대사부터 만만하지 않았다. 다른 배우와 호흡을 맞추려면 자신의 대사는 당연하고 상대역의 대사까지도 외워야 했다.
“서브 주인공의 대사가 130마디였는데, 제 대사가 330마디였어요. 대사를 외우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상황의 전후는 물론 동선까지 모두 기억해야 했지요. 덕분에 농담 삼아 ‘이제 치매 걸릴 일은 없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기대 이상의 호연을 펼쳤다는 평을 얻었지만, 이제 와 되돌아보면 당시의 연기는 아쉬움이 많다. 감정도 몸짓도 연구할수록 깊어진다는 것을 하루가 다르게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요즘은 드라마를 볼 때도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감탄한다. 하나의 대사를 구현하기까지 노력한 배우의 내공을 연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이다.
“같은 대사도 누가,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더 세밀한 감정과 몸짓을 표현할 수 있게 두 배 이상 연구를 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어요. 연기를 하면 할수록 그 깊이가 상당하다는 걸 느낍니다.”

배우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배역을 따는 일에 매달려 일상을 보내지는 않는다.
일흔에 은퇴한다고 가정해도 30년은 더 살아야 하는 100세 시대에 그의 계획은 ‘황진이처럼 사는 것’이다.
시·서·화·창(詩·書·畵·唱) 그리고 악기, 춤까지 두루 섭렵하는 것. 누구도 자신의 수명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예상보다 오래 살 수도 있는 만큼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세운 청사진이다.
우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걸침의 미학’

인터뷰가 진행된 날도 그는 영화 섭외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제작하는 단편영화에 출연해달라는 요청이다. 노년에 이르러 새로운 분야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시니어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때, 앞으로 그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현대물리학에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빛이 파동으로 가다가도 어떤 우연에 의해 갑자기 입자로 바뀐다는 거예요. 저는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실버 세대일수록 이제까지 안 해본 일에 도전해보는 것이 필요해요.”
배우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배역을 따는 일에 매달려 일상을 보내지는 않는다. 일흔에 은퇴한다고 가정해도 30년은 더 살아야 하는 100세 시대에 그의 계획은 ‘황진이처럼 사는 것’이다. 시·서·화·창(詩·書·畵·唱) 그리고 악기, 춤까지 두루 섭렵하는 것. 누구도 자신의 수명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예상보다 오래 살 수도 있는 만큼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는 바람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세운 청사진이다.
“일본에서 100세 노인에게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 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으면 일흔 살에 30년 계획을 세웠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말했다고 해요. 그래서 저도 입버릇처럼 ‘30년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런데 요즘 생각하니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큰 그림만 그려 놓고 나머지는 우연의 법칙대로 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우연을 행복한 운명으로 이어가는 비법 중 하나는 ‘걸침’이다. 오래전부터 그는 자신의 호를 ‘걸침’으로 정해두고 이를 실제 생활에도 적용해왔다. 지금도 그는 하루는 시를 쓰고, 또 하루는 악기를 다루며, 어떤 날에는 그림을 그리고 운동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생각과 기회들이 생겨난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인 ‘호이징가(John Huizinga)’가 이야기한 것처럼, 저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유희적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은퇴한 시니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대부분 대화 주제가 건강과 돈이에요. 인생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죠. 저는 시니어일수록 놀 거리를 다양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상에서 즐거움을 얻을 방안을 하나 아닌 여러 개를 만들어 두면, 한쪽에서 문제가 생겨도 다른 데서 재미를 찾을 수 있죠.”
한 인터뷰에서 그는 “예술가는 똑같아 보이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모두가 예술가로 살아갈 수는 없지만, 예술가적인 삶을 살아갈 수는 있다. 사소한 것에서 발견하는 색다름. 그 묘미를 알기에 배우로서의 연기도 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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