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운규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회령보통학교를 졸업 후 간도의 명동중학(明東中學)에서 수학했다. 그가 수학했던 간도의 명동중학은 겉으로는 민족학교지만 실제로는 독립군양성 기지로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던 장소이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을 때에는 명동중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회령의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나운규 역시 이곳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당했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던 그는 구사일생으로 연해주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1917년)이 일어나 백군(하얀 군대)과 적군(붉은 군대)의 내전이 한창이었고 러시아에 연고가 없던 그는 시베리아를 방랑하던 중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입영하게 된다. 그러나 목숨을 건 용병 생활에 대한 회의로 탈영한 뒤 홍범도 장군을 만나 대한국민회에 가입 후 연해주 지역에서 의병생활을 시작한다.
3·1운동 이후 간도 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나운규는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에 가입했는데, 이 단체는 그의 은사이기도 했던 박용운이 책임자로 있으며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일제의 추격을 막거나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청산리 인근으로 갔던 나운규는 그곳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독립군에게 ‘당신 똑똑한데 군대 말고 공부를 해라’라는 조언을 듣게 된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독립운동 방략이 있다는 생각에 공부를 통해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를 받아들인 나운규는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로 돌아간다. 서울에 온 그는 공부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했다. 그러나 훈춘사건(1920년 일본이 중국 마적(馬賊)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한 사건)을 일으켜 북간도로 출병한 일제는 도판부 관련 비밀문서를 획득하였고, 도판부 책임자인 박용운 등을 곧바로 체포한 뒤 곧이어 나운규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하게 된다. 재판에 회부된 나운규는 보안법 위반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영화배우, 영화감독 나운규의 청년 시절 모습이다.
1923년 3월 출소한 나운규는 회령에서 머물던 중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1924년 1월 북선지역(오늘날 북한)을 순회하던 극단 예림회가 공연차 회령을 방문했을 때 예림회에 가입한 것이다. 예림회는 함흥에 동명극장과 함흥극장이라는 주식회사 형태의 두 개 극장이 설립되는 것을 계기로 20여 명의 청년이 조직한 소인극단이었다. 예림회 단원 대부분은 관동대지진(1923년)의 여파로 고향으로 돌아온 도쿄유학 출신의 학생들이었기에 연극 공연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때 윤백남이 만들었던 민중극단 출신의 전문 연극인인 안종화가 문예부장으로 초빙되어 이들을 이끌었다.
신입회원으로 가입한 나운규는 연구생으로 예림회 무대에서 본격적인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예림회는 북선공연을 마치고 자금난에 직면하여 문을 닫게 된다. 문예부장 안종화는 민중극단 출신들이 주축이 된 무대예술연구회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그는 연극 활동에 관심이 많던 김태진(예명 남궁운), 주인규와 함흥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안종화를 배웅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예림회가 문을 닫은 후 서울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중 그는 반가운 인물과 조우한다. 부산으로 내려갔던 안종화였다. 안종화의 소개로 나운규는 부산으로 내려가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입사한다. 이미 부산에는 주인규와 김태진이 연구생으로 있었다.
나운규는 이들과 함께 제2촬영반의 영화감독으로 초빙된 윤백남의 집에 하숙하며 영화배우로 첫발을 내디딘다. 나운규의 영화 데뷔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두 번째 작품인 윤백남 연출의 <총희의 연(寵姬의 戀)>에서 가마꾼 중 한 명으로 출연한 것이다.
윤백남을 따라 서울에 온 나운규는 <심청전>, <흑과 백>, <장한몽>등에 연이어 출연하면서 특색 있는 배우로 주목받게 된다. 이후 백남프로덕션은 문을 닫고, 윤백남을 따라나섰던 사람들 중 나운규, 주인규, 김태진 등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했다.
1926년, 이곳에서 나운규의 <아리랑>이 제2회로 제작되었다. 나운규의 <아리랑>은 당대의 현실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서양 활극영화와 같은 박진감 있는 장면들이 포함되어 흥미를 돋웠다. 항일민족정신을 주제로 한 <아리랑>은 그야말로 이 땅의 민중들에게 일대 충격을 안겨준 혁명적인 영화가 되었다. 관객이 쏟아져 들어왔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은 큰돈을 벌었다. 나운규는 일약 조선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아리랑>의 성공에 고무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에게 곧바로 다음 작품을 만들 기회를 주었다. 나운규가 선택한 작품은 <풍운아>였다. <아리랑>보다 활극적 요소가 강했던 이 작품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로도 나운규는 인기 작품을 만들어내며 조선영화계의 스타로 군림한다. 그야말로 흥행의 보증수표와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한 나운규에게 단성사 운영주, 박승필은 독립을 권한다. 1927년 9월 나운규는 단성사의 후원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딴 나운규 프로덕션을 세운다.
이후 나운규가 만들어낸 작품은 여전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벙어리 삼룡이>가 대구 만경관에서 상영될 때에는 너무 많은 관객이 들어 극장 2층이 붕괴되었고 진주에서는 무대에까지 들어찬 관객들로 배우들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나운규의 시대였다. 1935년을 전후하여 조선영화계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강 건너 마을>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나운규는 한양영화사의 두 번째 작품으로 조선 최초의 토오키(Talkie, 유성영화) 영화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기술적 문제로 실패하게 되고, 추가 비용이 들었던 <아리랑 제3편>역시 실패하며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폐병으로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지만 큰 빚을 진 상황에서 쉴 틈이 없었다. 나운규의 병은 급속도로 악화됐고, 잠시 차도가 있자 또다시 무리를 해 폐병이 악화된다. 1937년 8월 9일 나운규는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영결식은 11일 <아리랑>이 개봉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