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공간의 재구성

아이들의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서울 풍문고등학교

1937년 종로의 옛 안동별궁 터에 세워진 이래 82년간 역사를 이어온 풍문여자고등학교가 2017년 강남 자곡동으로 자리를 옮겨 남녀공학인 풍문고등학교(이하 풍문고)로 재개교했다. 정독도서관까지 이어지는 단정한 감고당길 돌담, 교정을 물들이던 노오란 은행잎 등 ‘풍문’ 하면 떠오르던 풍경도 덩달아 바뀌었다. 어디서나 햇빛을 맞이하며 자유롭게 토론하고, 마음껏 꿈을 키우는 학생들의 모습이 오늘날 풍문고의 상징이 되었다.
  • 글. 이성미
  • 사진. 김도형

“기존의 ‘학교’라는 공간이 가진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고자 노력했습니다.
획일화된 교정, 낡고 딱딱한 교실 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교과교실제, 토론 학습, 창의 인재 양성 등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를 공간에 담자는 것이었죠.”
풍문고의 어제를 담은 보석함 같은 공간

풍문고의 전신인 풍문여고는 과거 조선 왕실 가족이 혼례를 올린 안동별궁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다. 이에 풍문고는 2013년부터 매년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전통문화 체험 및 순종·순정효황후 가례 재현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학교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학교가 강남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풍문의 역사와 가치가 계속 보존·계승되길 바라는 마음이 공간 곳곳에서 드러난다.
풍문고 진입로 정면에 위치한 행정 및 특별교과동 입면 디자인은 한국 전통 담장의 모습을 차용해 옛 학교의 정체성을 살렸다. 또 학교 뒤뜰에는 감고당길 돌담과 기와를 그대로 재현하고, 산책로 군데군데 기반석(基盤石)과 은행나무 그루터기를 가져와 두었다. 안동별궁 터에 있던 하마비(下馬碑)도 학교 출입문 오른편에 옮겨놓아 등하교 시 학생들이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게 했다.
“학교 건물을 설계하면서 기존의 ‘학교’라는 공간이 가진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고자 노력했습니다. 획일화된 교정, 낡고 딱딱한 교실 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교과교실제, 토론 학습, 창의 인재 양성 등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를 공간에 담자는 것이었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의 추억이 깃든 풍문여고의 옛 정취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의 옛 모습을 기억해달라’라고 말하면서요.”
김길동 교장의 말처럼 학교 건물은 주변 풍경과 친근하게 살을 맞대었던 과거의 온기까지 닮았다. 숲을 마주 보고 있는 일반교과동 외벽은 굴곡진 형태로 숲의 형태에 맞추어 있고, 창문마다 형형색색의 루버를 부착해 꽃이 핀 듯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졸업생들은 풍문고에서 옛 학교를 잃어버린 슬픔보다는 추억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기쁨을 먼저 만끽하게 된다.

어디서나 ‘통’하는 열린 학교

미국의 철학자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참된 교육의 비결은 학생들을 존중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생들을 존중하는 공간에서 참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풍문고도 모든 공간을 학생 중심으로 지었다. 풍문고는 행정 및 특별교과동과 일반교과동 2채, 기숙사, 실내 체육관으로 크게 구성되어 있다. 교내 다섯 동의 건물은 겉에서 보기엔 분리되어 보이지만 원형 중정과 지하 통로 등을 통해 내부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덕분에 학생들은 궂은 날씨에도 불편함 없이 지하 2층부터 지상 5층까지 각 층, 각 동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또 학교는 교내 통행로 폭을 넓히고 사물함을 교실 밖으로 빼놓아 학생들이 언제든 필요한 물품을 들고 원하는 교실로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교과교실제(교과마다 특성화된 전용교실을 갖추고 학생들이 수업시간마다 교과교실로 이동하며 수업을 듣는 학교운영방식)’에 맞춘 최적의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일반교과동과 특별교과동을 잇는 원형 중정도 공간 간의 소통을 말한다. 중정을 향해 낸 창문으로 모든 공간은 서로를 마주 본다. 또 중정 덕분에 건물 어디든 바깥의 공기와 햇빛의 침입을 허락할 수도 또 막을 수도 있다. 중정의 둥근 외벽을 통해 학생들의 웃음소리는 하늘에 닿는다.
이외에도 학교 안에는 열린 공간이 속속 자리해 있다. 학생들이 직접 꾸미고 관리하는 학습카페, 도서관 안에 마련된 토론실, 버스킹 공연이 가능한 크고 작은 야외공연장 등이 그것. 또 인성을 중시하는 학교답게 ‘밥상머리 교육’의 일환으로 급식실 한편에 교사와 학생이 함께 이야기하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마련해두었다.

모두에게 열린 공간, 모두가 사랑하는 학교

학생 중심으로 지어진 이 학교는 ‘2017년 교육부 선정 대한민국 우수시설학교 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풍문고가 우수시설학교로 선정된 데에는 최첨단 시설도 한몫했다. 학교가 가장 자랑하는 공간은 풍문콘서트홀이다. 풍문콘서트홀은 총 403석의 넓은 공간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최고급의 음향, 조명 및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안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는 방송실을 통해 전교에 생중계된다. 교사의 역량 강화 및 수업 질 향상을 위한 최첨단 공간도 있다. 수업분석실 안에 배치된 카메라는 교사와 학생들의 동작을 촬영하고 기록하여 교사가 자신의 수업을 스스로 분석할 수 있게 돕는다. 이를 통해 교사는 수업 방식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동료 교사들과 공유한다.
전 교실에 설치된 무반사 유리 칠판과 빔프로젝터, 교내 공지사항을 알려주는 LCD 게시판, 완전한 방음이 가능한 개인 악기 연습실과 전자 칠판이 설치된 음악실 등 학교 전체가 보석함과 같다. 교실마다 깨끗한 공기를 공급하는 공조기, 공기청정기와 ‘지열(땅 표면으로 흘러나오는 열)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한 냉난방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것 또한 풍문고의 자랑이다.
“학교는 지역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야 합니다. 교문을 닫고 학교를 우리만의 공간으로 두는 게 아니라, 이 안에서 주민과 소통하고 함께 발전해나가야 하죠. 동시에 학교에서도 지역의 자원을 활용하여 학생들이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김길동 교장의 말처럼 풍문고는 이토록 좋은 교내 공간을 지역사회와 함께 쓰고 있다. 운동장에서는 주민과 함께하는 전통문화 체험 행사 시 다양한 주민 참여가 가능하고, 가정실에서는 ‘따봉(따뜻한 봉사활동)’ 회원 및 학부모들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줄 반찬을 만든다. 풍문콘서트홀도 주민들과 문화를 나누는 열린 공간이다. 또 앞으로 행정동 옥상에 천문대가 지어져 풍문고 학생들은 물론이고, 지역 주민과 관내 학생들이 활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모두가 사랑하는 학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이 공간에서 학생들은 노란 은행잎처럼, 밝은 햇살처럼 환하고 건강하게 자라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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