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55] 인생 2모작

인생 2막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된다

도보여행가 이영철

프랑스의 선사학자인 앙드레 르루아 구랑은 그의 책 <세계의 뿌리>에서 “인간이라는 종(種)은 두 개의 발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인류는 두 발의 쓰임을 알게된 이후부터 수천 년 동안 이를 요긴하게 사용했다. 많은 부분을 바퀴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발은 우리에게 최고의 이동 수단이다. 이영철 작가는 이 두 발을 인생 2막에서 열정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유’와 ‘전문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 글. 이성미
  • 사진. 김도형

매일 더 건강해지는 ‘걷기’의 매력에 빠지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자는 여행한다’고 했다. 방황하기 쉬웠던 시기, 여행을 택한 덕에 바보는 면했다. ‘걷는 여행’을 택한 것은 더더욱 행운이었다.” 이영철 작가의 <죽기 전에 꼭 걸어야 할 세계 10대 트레일> 서문에 적힌 글이다. 그의 노후를 정리하는 문장이기도 할 것이다. 노후란 육체의 고단함을 거부할 수 있는 시기다. 길고 긴 휴식의 안락함에 빠진다 한들 비난할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고단해지기로 했다. 걷는 여행을 하면서 ‘고단함과 행복은 공존한다’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2,500년 전 서양 의학의 선구자인 히포크라테스는 ‘최고의 약은 웃음, 최고의 운동은 걷기다’라고 말했어요. 그렇다면 아름다운 곳을 걸으며 여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건강과 웃음 모두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의 걷기 예찬은 2005년부터 시작됐다. 어느 날 직장에서 얻은 고뇌를 잊을 요량으로 밖으로 나간 그는 집 근처의 산을 넘고 하천을 따라 40여 km를 걷고 돌아왔다. 그러자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걸으면서 계절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덤이었다. 걷기가 근본적인 고민을 해결해주진 않지만, 생각의 무게를 덜어줄 수는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 후로 그는 걱정거리가 없어도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퇴직을 하면 본격적으로 세계의 아름다운 길들을 걷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버킷리스트를 짜기 시작했다. 세계 사람들이 인정하는 아름다운 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고 가고 싶어 하는 길. 개인의 관심과 취향에 잘 맞는 길. 이렇게 세 가지 기준에 따라 네팔 안나푸르나 서킷,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뉴질랜드 밀포드 트랙 등 10대 트레일을 리스트에 올렸다. 국내 트레킹 코스와 집 주변을 걸으며 체력을 다지고, 여행지를 공부하고, 여행을 다녀온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예습을 철저히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자 직장생활에도 더욱 충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1년 12월 퇴직과 함께 그의 본격적인 해외 트레킹이 시작됐다.

힘든 만큼 여행의 노하우가 생기고,
길에서 보낸 시간에 비례해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여행하며 경험한 것을 매일 기록하고 한국에 돌아와 정리했다.
여행에서 얻은 지식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언제든 쉬어갈 수 있어서 나는 노후가 좋다

첫 해외 트레킹 코스인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서킷에서는 설렘과 두려움이 서로의 지분을 두고 다투었다. 고산병과도 싸워야 했다. 그러나 막상 해내고 나니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 후로는 한 번도 두려움이 설렘을 앞서지 못했다. 그렇게 5년 만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782km), 영국 횡단길 Coast to Coast Walk(315km), 유럽 몽블랑 둘레길(176km) 등 계획했던 세계 10대 트레일 모두를 걸었다. 총 2,032km에 달하는 대장정의 길이었다.
“사람들이 ‘계속 걸으면 힘들지 않느냐?’라고 묻곤 해요. 물론 힘들어요. 가파른 산길과 해안길, 낯선 나라의 여행지를 걷는다는 건 분명 힘든 일이죠. 하지만 걷다가 힘들면 쉬어가면 돼요.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서두를 필요도 없고요. 노후란 그래서 좋은 것 아니겠어요?”
힘든 만큼 여행의 노하우가 생기고, 길에서 보낸 시간에 비례해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여행하며 경험한 것을 매일 기록하고 한국에 돌아와 정리했다. 여행에서 얻은 지식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그리하여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2013), <동해안 해파랑길, 걷는 자의 행복>(2014), <영국을 걷다, 폭풍의 언덕을 지나 북해까지>(2017), <투르 드 몽블랑>(2017), <죽기 전에 꼭 걸어야 할 세계 10대 트레일>(2019) 이렇게 총 5권의 책을 펴냈다. 어느새 그에게는 ‘작가’, ‘도보여행 전문가’라는 칭호가 생겼다.
“처음 걷기 여행을 떠났을 때는 저조차 ‘도보여행가’로 살아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어요. 걷는 것이 좋아 계속 걸었을 뿐인데 이것이 새로운 인생을 열어줄 줄은 몰랐죠.”
여행은 그의 도착점을 계속 바꾸었다. 평범한 직장인에서 여행가, 작가, 강연자 등으로 수없이 걸어야 할 길을 만들어냈다. 지금 그는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삼남길, 의주길, 영남길 등 경기옛길을 복원하고 안내하는 사업에 참여하여 글을 쓰고 있다. 단순히 옛길을 찾아서 걷는 것이 아니라 길목마다 깃들어 있는 우리 문화와 역사를 글로 풀어내는 것이다. 끊임없이 걷고 배우며 그의 지식은 나날이 더 깊어지고, 그는 매일 더 건강해진다.

노후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

도보여행가이자 작가로서 살아온 8년. 이영철 작가는 인생 2막을 여는 데 가장 필요했던 것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응원’을 꼽는다.
“많은 사람이 ‘퇴직 후 잘 살기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라고 물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노후에 돈, 건강보다 먼저 준비되어야 할 것은 가족의 응원이에요.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던 응원과 격려를 받을 수 있도록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신뢰와 애정을 쌓아두는 것이죠. 가족의 반대를 무릅써야 한다면 어떤 일을 하든 온전히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요.”
덧붙여 이영철 작가는 노후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명심하라고 말한다. 첫째, 선택과 집중을 해라.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하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다. 인간관계에 있어 특히 그러하다. 모든 모임에 참여하며 체력을 낭비하지 말라. 대신 내게 유익하고, 내가 좋아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해야 한다. 둘째,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적어보고, 그중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 분야의 숙련도를 올리는 데 집중해야 한다. 특히 그는 사람들에게 “눈앞의 이익을 좇아 노년을 계획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열심히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셋째, 잊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퇴직 후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고독이다. 이것이 마음을 병들게 하고 불필요한 관계를 만들게 한다. 고독은 노후에 누구나 만나게 되는 친구다. 고독을 즐겁게 받아들이되 대신 혼자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만드는 것이 좋다. 걷는 것 또한 고독을 받아들이는 데에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진리는 노년에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프랑스의 사상가 쟝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그의 책 <에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착하기만을 원한다면 달려가면 된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걸어서 가야 한다.”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줄곧 도착점을 향해 달리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퇴직이라는 도착점에서 우린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한다. 고민할 것 없다. 이제부터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면 된다. 걷다 보면 분명 무언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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