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생각하기
[+55] 인생 2모작

꿈은 돌고 돌아
다시 캔버스로

실 그림 화가 조석희 회원

꽃이 웃으면 화가도 웃는다. 아이들이 웃어도 화가는 웃는다. 화가로 살면 웃을 일이 많아진다. 물리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식을, 조석희 회원은 화가가 되고 나서 배웠다.
  • 글. 이성미
  • 사진. 김도형

물리선생님의 이유 있는 취미 생활

조석희 회원은 지난 1977년 충남 금산여자중학교에서 과학교사로 처음 교단에 섰다. 그리고 2012년 대전 성모여자고등학교에서 물리교사로 35년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올해 나이가 일흔이니 생의 반절을 교사로 산 셈이다.
조석희 회원은 교직 생활을 떠올리면 눈앞에 밤하늘이 펼쳐지는 것만 같다. 대전성모여자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천문 동아리를 꾸려 학생들과 함께 별을 보러 다녔기 때문이다. 별을 관측하며 학생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가 그는 참 좋았다.
그러다 1997년, 선배 교사를 따라 그림 모임에 나갔다가 망원경 대신 연필을 더 자주 들게 됐다. 모임 사람들이 그에게 처음 권한 것은 크로키였다. 짧은 시간 빠르게 그림을 그려내며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데생에 빠져들수록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어릴 적 동심이 되살아났다. 주변 사람들도 “소질이 있다”라며 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어릴 적 그에게 그림이란 비 갠 뒤 만나는 무지개 같은 것이었다. 학교 앞에 살던 그는 비가 그치고 나면, 밖에 나가막대기를 들고 운동장 가득 그림을 그리곤 했다. 종이와 연필은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운동장 모래밭과 나무막대기는 공짜였다. 만화책도 좋아했다. 어쩌다 한번 만화책이라도 하나 손에 들어오면 그것을 성경 책 다루는 듯했다.
그리곤 비가 그치고 나면, 운동장 위에 책에서 본 만화 캐릭터를 한가득 그려냈다.
교사가 된 후 조석희 회원의 그림은 운동장에서 칠판으로 옮겨졌다. 물리교사였던 그는 교과서에 나오는 물리의 원리를 그림으로 풀어 학생들에게 설명해 주곤 했다. 입시에 지쳐 꾸벅꾸벅 졸던 학생들도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이 예뻐서 그림을 그릴 때마다 조석희 회원도 덩달아 신이 났다. 어린 시절부터 교사가 되어서까지, 그림과 관련된 좋은 추억은 그에게 ‘화가로서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했다.
“예전에 물리교사로 일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아해해요.
‘미술교사가 아니고요?’ 하고 되묻죠. 하지만 생각해 보면, 물리와 예술은 통하는 데가 있어요. 물리적으로 색은 곧 파동이고, 진동수의 차이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거든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화가도 과학자잖아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시작하세요.
새로운 걸 도전하는 시기를 퇴직 후로 못 박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할 일을 찾으세요.
열정적으로 사는 퇴직자를 보며 ‘부럽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여러분도 지금 하십시오.
인생을 즐겁게 사는 비결은 지금 시작하는 것, 단지 그것뿐입니다.”
* 「신의 눈물」 (2021년 作)
국내 1호 벨크로를 이용한 실 그림 화가

물리교사로 일한 흔적은 작품에서도 묻어난다. 첫 번째는 ‘주제’다. 조석희 작가는 학생들과 별을 보러 간 기억을 종종 캔버스에 옮긴다. 별이 반짝이던 밤하늘, 그리고 우주를 추상적으로 그려내는 것. 두 번째는 ‘재료’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그는 우연히 벨크로(velcro)를 보고 ‘미술 재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벨크로는 흔히 ‘찍찍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옷이나 신발의 두 폭을 떼었다 붙였다 하는 역할을 한다. 벨크로에 실이 달라붙는 원리를 이용하면, 벨크로는 캔버스처럼, 실은 물감처럼 사용할 수 있다. 퇴직 후 그는 이 아이디어를 본격적으로 작품에 도입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실 그림’, 벨크로에 실을 붙여 작품을 만드는 것을 ‘스트링(string) 기법’이라고 명명했다.
“실이라는 소재가 가진 고유의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있습니다. 저도 어릴 적 어머님이 수놓은 걸 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습니다. 실 그림도 그래요. 어떤 것을 그려내든 특유의 포근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풍경화·인물화·추상화 등 장르와 상관없이 실 그림이 될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등의 명화를 벨크로 위에 재현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이를 슬퍼하는 신의 모습을 그려 세간의 호평을 받았다.*
벨크로와 실이 일반적인 미술 재료가 아닌지라 창작에 어려움은 있다. 먼저, 무한대로 색을 섞어 쓸 수 있는 물감에 비해, 실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색 표현이 어렵다. 명암, 채도를 조절하기도 어렵다. 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벨크로는 폭이 10㎝ 정도로, 크기가 약 40×50㎝인 4절 캔버스 사이즈 하나를 채우는 데에도 공이 많이 든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털실을 그대로 쓰거나 풀어서 쓰며 질감을 조절하고, 실을 둥글게 말아 모양을 만드는 등 새로운 방법을 연구 중이다. 벨크로 생산 공장에 직접 찾아가 대형 사이즈의 벨크로를 구해오기도 했다. 원하는 크기의 캔버스를 얻은 것이 만족스러운지 그는 “조만간 대작을 선보이겠노라”며 웃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화가의 ‘실’

회장을 맡으면서, 지역 예술인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다. 흙을 가까이하면 작품에도 양분이 전해지는 모양이다. 지난 3월에는 좋은 결실을 맺었다. 세종시 BRT 작은 갤러리에서 두 손주와 「7088전–할배 그리고 손주」 전시를 연 것. ‘7088’은 조석희 회원의 나이 ‘70’과 쌍둥이 손주의 나이 ‘8’ 두 개를 이어붙인 숫자다.
“세종시 간선급행버스 체계인 BRT(Bus Rapid Transit) 환승 주차장에 작은 갤러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시민들에게 전시회를 열 수 있게 해줘요. 쌍둥이 손주 녀석들이 그림을 꽤 잘 그려서 합동 전시를 신청했고, 운 좋게 기회를 얻었습니다. 명색이 할아버지가 화가인데, 전시회에서는 제 작품보다 손주들 작품이 인기가 더 많더라고요.”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손녀는 화가 할아버지를 닮아 그림을 잘 그리고, 손자는 과학교사 할아버지를 닮아 숫자에 관심이 많다. 자신을 빼닮은 손주들을 보면 조석희 회원은 웃음이 난다. 할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작업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모습도 퍽 귀엽다. ‘전시’라는 공통의 추억이 생긴 후로 대화 주제도 풍성해졌다. 과거 어머니가 수놓는 모습을 떠올리며 스트링 기법을 생각해낸 것처럼 실은 화폭에 담겨 그와 다음 세대를 연결해 주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시작하세요. 새로운 걸 도전하는 시기를 퇴직 후로 못 박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할 일을 찾으세요. 퇴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적으로 사는 퇴직자를 보며 ‘부럽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여러분도 지금 하십시오. 환경을 탓할 것 없어요. 뭔가 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내 마음 탓이에요. 인생을 즐겁게 사는 비결은 지금 시작하는 것, 단지 그것뿐입니다.”
인생 2막은 시작이 반이다. 화가로서의 시작은 특히 수월하다. 준비물은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된다. 그릴 대상도 멀리서 찾을 필요 없다. 집 안의 사물,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면 된다. 그러다 보면 그리고 싶은 것이 많아지고, 기법에 관한 아이디어도 생긴다. 크로키에서 시작해 유화, 벨크로를 이용한 실 그림으로 점차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조석희 회원처럼 말이다.
올해도 조석희 회원의 작업실 옆 과수원에는 복숭아꽃이 가득 피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세상은 그에게 “그려보라”고 자꾸 속삭인다. 그 정성스러운 속삭임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는 오늘도 연필을 든다. 얼굴에 닿은 햇볕이 실처럼 포근하게 느껴져 오늘은 대작이 나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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