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The–K 혁신 인터뷰

따뜻한 마음을 품고,
애틋한 뜻을 키워
세상에 전한 사랑

제10회 대한민국 스승상 대상 수상자
세종예술고등학교 박영주 교사
은하수 속에 사는 별은 모른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이는 존재인지. 박영주 교사도 그랬다. 열정 넘치는 교사, 재능 있는 학생들 속에 있으니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 줄 몰랐다. 대한민국 스승상 대상을 받고 나서야 그는 어렴풋이 알아차린다. 그동안 많은 학생이 자신을 바라보며, 가야 할 방향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제자들의 따뜻한 인생 멘토로 내일의 길을 밝게 비춰주는 박영주 교사를 만나봤다.
  • 글. 이성미
  • 사진. 김도형

음악을 사랑하는 섬마을 선생님

“학교가 받아야 할 상이 제게로 온 것 같아요. 학생들이 받아야 할 관심도 제게 온 것 같고요. 그래서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스승상을 받았지만, 스승이라는 말은 낯설다. 박영주 교사도 자신을 “선생이지만 스승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박영주 교사의 삶을 돌아보면, ‘선생’으로 시작해서 오늘날 ‘스승’으로 사는 사람이다.
선생(先生)은 ‘먼저’라는 뜻의 선(先)과 ‘살다’, ‘기르다’라는 뜻의 생(生)을 합친 말이다. 그러니 선생이란 먼저 싹을 틔워 길러본 사람일 것이다. 박영주 교사는 학생들보다 먼저 예술에 대한 마음을 틔워봤다. 그 마음을 길러도 봤다. 그래 보니 알겠더라. 예술을 배울 때는 돈이 많이 들어 걱정이고, 배울 만큼 배웠더니 돈이 되지 않아 걱정이라는 것을. 그가 교사가 된 이유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가야금을 배웠어요.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대학도 국악과에 진학해 계속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돈이 없으면 음악을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점차 크게 다가왔어요. 결국 사범대학교에 입학해 음악 교육을 전공했고, 음악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를 교사의 길로 이끈 것은 가난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교사가 되자 교사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1991년 첫 근무지인 경기도 섬마을에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함께 악기를 연주하며 그는 행복감에 젖었다. 평생 예술가로 사는 방법이 거기 있었다. 충청남도로 근무지를 옮기고 나서도 금동풍물패, 봉황리코더합주단, 장평현악합주단을 구성해 방방곡곡을 다니며, 학생들을 더 큰 세상과 만나게 했다.

“교사는 바뀌어야 해요. 가르치는 교사가 아닌
멘토로서의 교사로요. 멘토로서의 교사는 학생이
살아나갈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학생 개개인이 겪고 있고,
겪어야 할 문제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하죠.”
장애아의 엄마이자 스승으로 살아온 시간

1996년, 박영주 교사의 인생에 한차례 변곡점이 생겼다.
생후 10개월이 된 큰아이에게 중복 장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벼락을 맞은 듯 큰 충격이었다. 절망감에 휩싸여 있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다른 눈을 갖게 되었음을 알았다. 아이 하나하나의 모습에서, 자신의 학생이 살아가야 할 미래가 덧대어 그려졌다. 교사의 역할도 달라 보였다. 학생들에게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 없이 행복하게 사는 법, 어떤 어려움과 마주하더라도 넘어서는 법을 가르쳐야 할 것만 같았다.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 스승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봉사에도 심취하게 됐다.
“2004년 ‘봉사의 대가’로 불리던 현정효 선생님을 만났어요. 선생님이 함께 봉사하자고 하셔서 같이 다니며 봉사의 가치를 배웠죠. 당시 근무하던 봉황중학교에도 음악봉사단을 만들고 토요일마다 학생들을 데리고 봉사활동을 다녔습니다. 사회복지대학원에서 공부도 하고요. 그때 큰아이가 9살이었는데, 그때까지 주변 사람들이 제 가족사를 잘 모르고 있었어요. 하지만 봉사를 하면서, 저도 용기를 내어 아이와 학생들이 세상과 더불어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열정은 천성인 듯 박영주 교사와 봉사는 어느새 한 몸이 되었다. 주말에는 봉사를 다니고, 학교에서는 장애가 있거나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학교 안팎에서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재능을 발굴해 살아갈 길을 열어주면서 말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에는 충남청소년자원봉사활동 지도자상을, 2006년에는 전국동아리경진대회에서 대상(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교사들과 함께 조직한 마시멜로봉사단은 2008년부터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10년 충남예술고등학교에 근무하게 되면서, 봉사와 예술에 열심인 박영주 교사는 더 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한편, 예술고 학생들과 본격적인 재능 나눔에 돌입했다. 학생들과 창단한 뮤직플러스봉사단이 주축이 됐다. 박영주 교사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뒤로 사회에 재능을 나눌 줄 아는 제자들이 생겨났다.

자신의 몸을 퉁겨 소리를 내는 가야금처럼

살면서 스승의 이름은 더욱더 짙어졌다. 2018년 세종예술고등학교 개교 준비 교사로 투입되면서, 박영주 교사는 진학보다 미래형 예술고에 맞는 교육에 더욱 초점을 두었다.
예술가는 개인의 작품 및 공연 활동만 잘하면 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예술을 더 폭넓게 활용할 방법을 함께 고민한 것. 그는 교사가 학생들의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할 일의 마침표를 찍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교사는 바뀌어야 해요. 가르치는 교사가 아닌 멘토로서의 교사로요. 멘토로서의 교사는 학생이 살아나갈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학생 개개인이 겪고 있고, 겪어야 할 문제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하죠. 그다음 ‘이건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해결 방안을 제시하고, ‘이런 프로젝트를 해보지 않을래?’ 실질적인 방안도 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생보다 먼저 앞에 놓인 장애물을 보고 대비를 하는 것이죠.”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박영주 교사는 지난해 담임을 맡은 음악과 2학년 학생들과 “예술대학 나와서 뭐 먹고 살지?”를 주제로 4가지 직업, 즉, 음악가 본연의 직업, 음악을 이용한 직업, 음악과 관련 없이 하고 싶은 직업, 은퇴 후 제2의 직업을 탐색하게 했다. 그리고 이를 정리해 도서 「세종예술고 2학년 음악과 학생들에게 음악을 묻다」를 출판했다.
또 학교사회적협동조합도 세웠다.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예다움학교사회적협동조합은 학생들이 전공을 살려 음악 공연, 생활용품 및 디자인 용품 제작, 실시간 방송 및 영상 제작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지역사회와 학교를 대상으로 사업을 운영해 이익을 창출하는 곳이다. 이는 단순히 예술로 먹고사는 방법을 체득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무대 경험을 길러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박영주 교사는 “경험이 학생들을 절로 성장하게 한다”라고 확고히 말한다.
엄마, 아내, 교사, 조합 이사장으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줄을 퉁겨 소리를 내는 가야금처럼 박영주 교사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 고운 소리를 내고 있다. 스승답게, 예술가답게 살고 있다. 앞으로도 박영주 교사는 자신의 아이, 제자, 사회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함께 걷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옆과 앞을 바라보게 할 것이다. 그렇게 박영주 교사의 사랑은 앞으로도 수많은 예술가를 더불어 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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