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K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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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2 Vol.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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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곱하기

키워드로 읽는 시사

미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의 생존 전략

경계를 허무는 미래 산업 트렌드, 빅블러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구찌나 루이비통이 중국에서 스타벅스에 비견되는 ‘커피점’을 내는 것에 대해 이견을 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소비자는 음식 맛보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원래 무엇을 했든 기술이 밝혀주는 미래 영역에 기꺼이 손을 내줄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 기업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바로 영역 파괴다. 이를 ‘빅블러(Big Blur)’라고 부른다. ‘블러’란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을 의미하며, 빅블러는 큰 규모로 이런 경계 융화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생산자와 소비자, 소기업과 대기업, 서비스와 제품 등 모든 경계가 융화되는 시대적 흐름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고, 지난 2년간 이어진 코로나19 시대에 비대면으로 지내며 이루어진 디지털 기술 발전이 빅블러 현상을 가속했다.

김고금평 머니투데이 기자

은행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스타벅스?

국내 은행 기업의 경쟁자는 은행이 아니다. ‘스타벅스’다. 아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 수 있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돈=금융’, ‘금융=은행’이라는 상식적 방정식이 성립되지 않고 있다. 커피를 금융의 상징인 은행과 같은 영역에 넣을 수 없다는 논리는 음료업계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스타벅스가 은행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것은 디지털 결제 기술 덕분이다. 모바일 앱으로 커피를 주문하고 결제할 수 있게 되면서 커피전문점이 ‘돈을 맡길’ 창구가 된 셈이다. 이른바 ‘선납식 충전 카드’다. 이를 통해 이용하는 주문 결제 시스템 ‘사이렌 오더’는 세계적으로 2조 원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스타벅스코리아가 전용 앱과 카드 등을 통해 예치한 선급 충전금은 1,801억 원인데, 스타벅스가 이런 식으로 전 세계 고객에게 유치한 돈은 약 20억 달러(2조 3,380억 원)에 달한다. 한편, 미국 FDIC(연방예금보험공사)에 따르면 미국 내 4,500여 은행 중 87%에 해당하는 3,900개 은행의 총자산이 10억 달러가 채 되지 않는다. 커피 회사가 잔뼈 굵은 은행의 가장 강력한 적수임을 부인할 수 없는 방증이다.

한계를 뛰어 넘는 기업들의 빅블러 경쟁

온라인 여행 플랫폼 익스피디아가 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이 회사는 여행사입니까, IT(정보기술) 기업입니까”다. 콘텐츠 속성으로 보면 여행이지만, 이를 구현하기 위해 수행하는 도구와 하드웨어는 IT이기 때문이다. 실제 매해 얻은 이익의 70% 정도를 기술료로 지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흔히 만나는 경계의 산업은 자동차와 ICT(정보통신기술) 기업이다. 전기차 부문 1위 회사 테슬라는 ICT 기업으로부터 배터리를 조달받는 것을 넘어 자체 생산 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독일과 미국 등에 공장을 짓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보험 사업에도 눈독을 들인다. AI(인공지능) 기술로 차량의 실주행 데이터를 분석, 개별 운전자의 사고 위험을 계산해 보험료를 책정한다. 2020년 테슬라는 3분기 실적 발표에서 보험 사업이 자동차 사업의 30~40% 가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ICT를 대표하는 빅테크 기업 애플과 구글은 어떨까. 두 회사는 원래 컴퓨터 기업, 검색엔진 등 정보통신에 최적화된 기업으로 통했다. 하지만 최근 모빌리티(이동 서비스) 산업에 진출하면서 완성 자동차 산업계를 위협하고 있다.
구글의 관계사 웨이모는 자율주행 택시 시범 운행에 나섰고, 애플 역시 자율주행 전기차 기술을 바탕으로 ‘애플카’ 사업을 시작할 것으로 전망된다. 구글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간 수명 150년 프로젝트 등 생명과학 분야에도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세계 최대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업체 넷플릭스가 게임을 영화나 드라마 같은 콘텐츠로 보고 게임까지 직접 개발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빅블러의 최신 사례 중 하나다.
온라인 유통업만 주력할 것 같던 쿠팡이 쿠팡플레이를 통해 또 다른 OTT 플랫폼을 구축한 데에는 기술 발전과 혜택이 단단히 한몫했다. 여러 분야의 앱을 하나로 모은 슈퍼앱을 통해 은행, 카드, 보험, 통신, 부동산까지 아우르며 소비자가 필요한 서비스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높였다. 푸드 테크도 간과할 수 없다. 채식주의 소비자 증가 와 식음료 기술 발전으로 대체육 시장이 커지면서 기존 축산 농가들은 뜻하지 않게 비욘드미트(Ethan Brown이 2009년에 설립한 로스앤젤레스 기반 식물성 육류 대체품 생산업체) 등 첨단 기술 식품 기업과 경쟁을 벌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던 산업의 영역들이 너나없이 경계의 대상이 되어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된 것이다.

빅블러 시대, 기업이 살아남는 법

빅블러 시대가 성큼 다가오면서 각 기업도 전통적 타이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활발히 하고 있다. 사명을 바꾸는 작업도 그중 하나다. 두산중공업은 HD현대로, SK종합화학은 SK지오센트릭으로, 한화종합화학은 한화임팩트로 각각 사명을 변경하는 배경에는 빅블러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측면이 강하다.
새롭게 떠오른 메타버스(metaverse, 가상+현실 세계)는 빅블러 현상의 가장 고도화한 단계로 인정받는다. 어느 쪽이 실제 인간이고 가상 인간일까 하는 정의의 논쟁부터 사회· 경제적 활동의 모호한 구분까지 경계가 무의미해질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상대적으로 힘 있는 기업이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는 독과점의 폐해는 빅블러 부작용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무너지는 경계, 기술 위주의 독점 등을 불러온 빅블러 시대에 살아남는 법은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어찌 됐든 ‘원천 기술’이라고 꼬집는다. 산업 간 장벽을 뛰어넘는 융합도 결국 원천 기술에서 파생되기 때문이다. “애플은 사업이 통합되는 지점을 찾아내고 핵심 기술을 보유하는 걸 좋아한다.” 애플 CEO 팀 쿡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은 당연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가치이자 관점일지 모른다. 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