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기억하기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구국외교로 일본에 항거한
대한제국 외교관

‘이범진 공사’

“황제폐하.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대한제국의 초대 주러시아 상주 공사였던 이범진은 고종에게 이 같은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이역만리에서 망국의 소식을 접하고 그가 느꼈던 참담함과 분노가 그대로 느껴진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항거해 자결한 이범진 공사는 남은 유산을 미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단체에 기부했던 대한제국의 충신이었다.
  • 글. 정상규(「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의 저자)
정상규 작가는 지난 7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해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반일감정을 싹틔운 청년시절

이범진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17대손으로, 왕의 친족이다. 그의 아버지 이경하는 조선왕조 무관으로 병인양요(1866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인 병인박해를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를 명분으로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 때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그의 집안이 다시 일어서는 태동기를 맞이한다.
그는 청년기까지는 호기롭고 호탕하며 음주가무를 즐기는 ‘호인’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이범진은 거리에서 일본인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수모와 치욕을 당하게 된다. 당시 부동산 매매 관련 문제가 발생해 그의 집이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상상도 못 할 만큼의 폭행을 당하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반일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 이범진은 과거에 급제한 뒤 여흥 민씨 집안의 신임을 얻어 조정 내 요직을 두루 거치고, 초고속 승진과 출세를 하게 된다.

고종이 이범진에게 하사한 친필 작품(1885.1.15.)
국권 회복에 힘을 쏟은 외교활동

1800년대 후반, 조선은 여흥 민씨 집안의 민비와 그 친인척들이 정권을 잡았고,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나라가 가장 가난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일본은 1년 예산의 70%를 국방력에 쏟으며 ‘침략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1895년 경복궁에서 민비가 일본군에게 암살된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었고, 이범진은 고종의 어명을 받아 일본군 감시를 피해 궁궐 담을 뛰어넘었다. 러시아공사 웨베르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그는 1년 뒤 1896년 고종과 왕세자를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시키는 아관파천을 주도했다.
그 후 이범진은 외교를 위해 1897년부터 미국 워싱턴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자원, 파견돼 4년간 재직했다. 1900년에는 프랑스·오스트리아·독일 3국 겸임 공사에 임명됐는데 이 시절에 둘째 아들 이위종이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지에 이범진과 함께 다니면서 4개 국어 이상을 능숙하게 하는 외교관으로 성장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아들 이위종은 이후 20살이 됐을 때 이준, 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특사(1907년 고종이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였던 사건)가 되어 네덜란드로 향했다. 이준과 이상설은 신뢰할 수 있으면서도 유럽에서 소통이 가능한 ‘입과 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범진은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주하는 초대주러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청·일전쟁(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 이후 1903년 8월에 진행되기 시작한 러시아 차르 정부와 일본 간 협상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고, 한반도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이 주도권을 갖는 분할 통치를 제안했으나 결렬됐다. 일본은 1904년 협상 결렬 후 러시아가 향후 전략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러·일전쟁을 선택했다. * The-K 매거진 2020년 7월호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이준 선생’ 편 참고

  •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 시절의 이범진
  • 공개된 100년 전 외교문서 중 일부로, 러시아에서 이범진 사망 전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항일운동 후원을 위한 열렬한 마음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한일의정서(러시아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중립을 주장하는 대한제국을 세력권에 넣기 위해 1904년 1월 대한제국 황성을 공격하여 황궁을 점령한 뒤 같은 해 2월 23일 강제로 체결한 조약)를 체결했으며,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소환을 요구했다. 이에 고종은 1904년 5월 18일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관 폐쇄와 공사 소환을 지시했으나 이범진이 불응했다. 같은 해 9월 1일 결국 이범진은 면직됐다. 고종은 소환 지시 명령과 함께 별도의 밀명을 함께 내렸다. “귀환 명령은 일본의 압박에 따른 것이므로 돌아오지 말고 러시아에 남아라.” 이범진은 차남 이위종과 함께 1906년 초 공사관이 폐쇄된 후에도 러시아 정부를 대상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이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때 외국어에 능통한 아들 이위종을 특사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밀사들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아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하는 등 헤이그밀사 파견 활동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다.
1908년엔 이위종을 연해주로 보내 최재형, 안중근 등이 몸담고 있던 의병단체 동의회 창설을 지원했다. 이때 이범진이 동의회에 보낸 군자금은 1만 루블에 달했다. 1만 루블은 당시의 가치로 40억 3,253만 원이었다.
이범진은 공사관 폐쇄 이후 작은 집에서 여생을 보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해 일제 강점기가 시작된 한일합병조약) 소식을 듣고 1911년 1월 26일,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자 목을 매 자결했다. 그는 러시아 궁내성, 고종 그리고 이위종 앞으로 3통의 영문 전보를 유서로 남겼다.
당시 이범진의 자결 소식은 러시아 내에서도 화제였다. 주요 언론사의 1면 전체를 다룰 만큼 당시 국제정세상 그의 자결이 가진 의미는 상당했다. 이범진의 자살은 나라는 망했지만 자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불굴의 투쟁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목숨조차 반일투쟁의 수단으로 내놓은 셈이다. 이를 두고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는 “적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복수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이범진은 자결 거행 며칠 전 장례회사를 찾아가 2,500루블을 선지급했다. 본인의 장의비용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유해 운반비용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 동포들이 세운 마을 신한촌과 최재형, 이상설, 이범윤 등 독립운동 지도자급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안창호, 이승만 등으로 대표되는 미주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에 7,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거류민회 5,000루블 등 총 1만 2,000루블을 독립자금으로 남겼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임무였다.

  • 자결한 이범진 유해가 안치된 옛 안치소 자리
  • 이범진과 아들 이위종
비통과 절망을 통감해온 애국자의 선택

안타깝게도 이범진의 유해는 연해주로 가지 못하고 1911년 2월 3일 우스펜스키 묘지에 안장됐다. 더 가슴 아픈 사실은 1975년 북방 묘지 재정비 과정에서 이범진의 묘지에 대한 관리 감독의 소홀과 무연고 묘지 분류로 인해 유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뒤늦게 한국 정부는 그가 있었을 곳을 추정해 추모비를 세웠다. 현 파르골로보 3번지 북방 묘지(과거에는 우스펜스키 공동묘역)에 가면 러시아인 묘비 사이로 눈에 띄는 한국식 비석을 찾을 수 있다.
2019년 4월 필자는 MBC 「백 년만의 귀향, 집으로」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을 만났는데, 그들을 통해 100년 만에 공개된 러시아 비밀 외교문서를 볼 수 있었다.
문서에 따르면 외교관에서 면직당한 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던 이범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그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최재형에게 1만 루블을 보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생활비조차 남기지 않고 전 재산을 보낸 것이었다. 이것은 곧 자결을 의미했다. 또한 공개된 비밀문서에는 이범진이 영양실조에 걸려 생활할 수 없다는 내용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일본이 알면 안 되니 비밀리에 생활비를 지원해 주도록 하라’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문서에는 ‘그는 대한제국의 애국자이니….’ 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것이 아무도 몰랐던 대한제국 마지막 외교관의 모습이었다.
훗날 정부에서는 이범진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르골로보 3번지 북방 묘지(옛 우스펜스키 공동묘역) 8구역에 조성된 이범진 추모비
이범진(李範晉) 공사(1852.9.3.~1911.1.26.)
- 대한제국의 정치가, 외교관, 애국지사
- 1896년 아관파천을 단행하며 친러파 내각 조직
- 1901년 러시아 상주 공사로 임명
- 1911년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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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공사는 1901년 초대 주○○○ 상주 공사로 임명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주하며 대한제국의 주권을 지키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에 들어갈 국가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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