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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3 Vol.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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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던

소파 방정환과 제자들의 모임 ‘색동회’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민족의 미래가 아이들에게 달렸다’는 신념 아래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던 모임 '색동회'는 소파 방정환 선생과 뜻을 같이한 손진태, 강영호 등이 의기투합해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자 결성됐다. 아동문학가 마해송, 윤석중, 조재호, 최진순, 정인섭 등도 색동회에 가입하면서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활동이 시작됐다.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가극 공연, 동화회, 동요회를 여는 등 어린이 문화 보급에 힘썼다. 해방 후에는 방정환 선생 동상 건립, 전국어머니동화구연대회 개최 등 어린이 문화 운동을 벌여왔다. 1995년에는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덴마크의 세계적인 완구업체 레고 그룹이 제정한 ‘어린이 문화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레고상을 받았다. 어린이를 위해 헌신한 개인이나 단체에 매년 수여하는 상으로 아시아에서는 색동회가 처음으로 수상했다. 나라를 잃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어린이의 인권과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한 색동회의 주요 인물들과 이들의 활동을 만나본다.

유정호 인천소방고등학교 역사교사

유정호 교사는 인천소방고등학교에서 딱딱하고 어려운 용어로 가득한 역사가 아닌, 쉽게 접근해 활용할 수 있는 역사를 가르치고자 노력하고 있다. 「방구석 역사여행」,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 「조선괴담실록」,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동네 독립운동가 이야기」 등 역사 관련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u842@daum.net)

나라 잃은 슬픔 속, 어린이를 위한 ‘색동회’의 탄생

일제강점기 대다수 어린이는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를 마주하기 어려웠다. 나라를 빼앗기고 자긍심과 자존심이 짓밟힌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푹 숙이고 다녔다. 한국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한국 어린이를 대놓고 무시했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수탈로 경제적 궁핍을 겪었기 때문에 많은 아이가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아이들은 학교 갈 시간에 집안일을 돕거나 산업 현장에서 일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이런 현실을 우려하며 어린이가 아무 걱정 없이 밝고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심에 하루 종일 어린이를 행복하게 만들 생각만 하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방정환 선생은 자신과 뜻을 함께할 친구를 찾아다녔고, 어렵지 않게 함께할 동지를 만날 수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 중이던 유학생들은 방정환 선생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서로 앞다투어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의 하숙집에 손진태, 강영호, 고한승, 정순철, 조준기, 진장섭, 정병기 등 유학생 8명이 모였다. 이들은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어린이 운동 단체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나라를 되찾는 일이라 믿었고 더불어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라 고대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은 미래를 위한 씨앗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모임에 합류한 도쿄음악학교 학생 윤극영이 ‘색동회’라는 명칭을 제안했다. 첫 어린이날은 색동회 발회식이 열린 1923년 5월 1일이었다.(어린이날은 1927년부터 5월 첫 일요일로 바뀌었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부터 5월 5일로 변경됐다.) 아동문학가 마해송, 윤석중, 조재호, 최진순, 정인섭 등도 색동회에 가입했다.

어린이 운동에 헌신한 소파 방정환, 색동회 주축이 되다

방정환 선생은 서울 종로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경영하던 할아버지 아래에서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왕실 제사에 물품을 납품하던 그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었다. 학교에 도시락조차 가져가지 못했지만, 그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했다. 가난한 형편에 ‘소년입지회’ 총대장이 된 그는 토론과 동화구연을 통해 10명에 불과하던 회원을 160명으로 늘릴 정도로 탁월한 리더십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토지조사국에서 서류를 필사하는 사자생으로 취직했다.
어찌 보면 너무도 평범하게 살아갔을지 모를 방정환 선생의 삶은 민족지도자로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손병희* 선생과의 만남으로 180도 바뀌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19세의 어린 방정환이 품은 열정과 잠재력 그리고 훌륭한 인성을 알아본 손병희는 그를 자신의 셋째 사위로 삼았다. 이후 방정환은 손병희의 지원을 받아 포기했던 학업을 다시 이어 나가며 계속해서 꿈을 키웠다.
학업에 전념하던 방정환 선생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깨닫는다. 이후 방정환 선생은 천도교에서 발간한 종합지 「개벽」에 ‘어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본격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상황이어서 국내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방정환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의 주목적이 공부가 아니었던 그는 주기적으로 국내에 들어와 강연을 펼쳤고,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해 어린이에게 존댓말 쓰기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어린이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세계 명작 동화 열 편을 번역한 「사랑의 선물」을 출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일은 1923년 5월 1일 색동회를 설립한 것이다.
* 「The-K 매거진」 2021년 3월호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 기사 참조
방정환 선생이 도쿄 유학 시절 창립한 어린이 문화연구단체 '색동회' 조직
붉은 원이 소파 방정환 선생 [출처: 한국 방정환 재단]

한국의 얼을 불어넣은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 손진태 선생

손진태 선생[출처: 전통문화포털]
부산에서 태어난 손진태 선생은 5세 때 어머니를 잃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이후 서울로 상경한 그는 중동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3·1운동으로 4개월간 옥살이를 하면서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다.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인류학과 민속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일제로 인해 우리 역사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으로 그는 훗날 우리 역사학계의 거두가 된다.
20대의 일본 유학생 손진태 선생은 어린이들이 우리 신화와 전설 그리고 동화를 접한다면 자연스럽게 민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애국심이 형성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방정환과 함께 색동회를 설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색동회를 통해 어린이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며 희망이 생긴 손진태는 우리 민족은 어떻게 성립됐고, 우리 문화의 기초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를 알리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며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면서 「조선민담집」(1930),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 등 11권의 책과 120여 편의 글을 남겼다. 광복 이후에도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이 되어 일본 역사가 아닌 우리 역사를 가르칠 수 있는 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6·25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소년 운동의 발상지 '진주의 방정환' 강영호 선생

강영호 선생은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설립한, 정3품 벼슬을 지낸 강재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강상호도 진주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29명 중 한 사람일 정도로 그의 집안은 나라를 위한 일에 늘 앞장섰다. 그는 진주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를 졸업하고 1920년 8월 전국 최초로 발족된 '진주소년회'를 이끈 주역으로 항일전단지를 배포하려다 발각되어 도피하는 등 애국심이 투철했다. 그런 그였기에 색동회를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궂은일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뒤에도 고향 진주에서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항일 강연을 다니고, 반제단 지방단부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끊이지 않고 펼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0년 6·25전쟁 중 군경에게 처형되어 현재까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강영호 선생과 색동회 회칙
[출처:오마이뉴스]
강상호 선생 [출처: 경남일보]

민족의 애환을 달래준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선생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어린 시절 친구와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며 부르던 동요 ‘반달’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로 윤극영 선생이 만든 곡이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애환을 달래준 ‘반달’은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모든 이들이 널리 애창하는 동요이자, 유행가가 되었다. ‘반달 할아버지’ 윤극영 선생은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중고등학교)를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상록수」를 쓴 외사촌 심훈, 일본 천왕을 죽이려 했던 박열을 만난다. 이후 심훈을 따라 3·1 만세운동을 벌인 일로 1년간 수감되었다 출소 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돌아온 윤극영 선생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교육과정이 적성에 맞지 않아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 도쿄음악학교와 동양음악학교에 입학해 성악을 배웠다. 이때 자신을 찾아온 방정환을 만난 윤극영 선생은 어린이를 위해 평생 살아가겠다고 결의하며, 색동회라는 이름을 직접 지었다. 실제로 그는 6·25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라는 가사의 ‘설날’ 등 수많은 동요를 작곡하며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방정환 사후 중단되었던 색동회를 다시 조직하고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해 운영했다. 그러고는 친구이자 존경하던 방정환을 기리기 위한 동상 건립에 나섰다. 그는 죽는 날까지 후배들이 색동회의 꿈을 이어가주기를 희망했다.
윤극영 선생
[출처: KTV 국민방송]

어린이헌장을 만든 마해송 선생

마해송 선생 [출처: 연합뉴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 개성에서 태어난 마해송 선생은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학교에서 존경받던 한국인 교사가 부당하게 해고되는 모습에 분을 참지 못하고 항의하다 퇴학당하고 말았다. 그는 어쩔수 없이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유학 생활을 하는 동안 마해송 선생은 극단 ‘동우회’를 조직해 방학 때마다 국내에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공연을 했다. 마해송 선생의 활동 중 무엇보다 가장 뜻깊은 것은 방정환과 색동회를 조직한 일이다. 색동회 회원인 그는 「어린이」 잡지를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발표했다. 대학 졸업 후 마해송 선생은 일본 최대 종합 잡지사 ‘문예춘추사’에 입사하고, 발행 부수 10만 부가 넘는 잡지사를 직접 운영했다. 그는 잡지사 운영으로 바쁜 일정에도 어린이에게 희망과 민족정신을 심어주는 ‘토끼와 원숭이’, ‘호랑이와 곶감’ 등 여러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광복 이후에는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어린이헌장을 기초해 우리 어린이들이 마음껏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이 오기를 꿈꿨다. 1957년 2월 당시 한국동화작가협회 소속인 방기환·강소천·이종항·김요백·임인수·홍인순 등 7명과 함께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을 만들었고 이 헌장은 그해 5월 5일 정식으로 선포됐다.

어린이들의 행복을 키워낸 '색동회'라는 희망

위에서 언급한 선생들 외에도 많은 사람이 참여한 색동회는 일제강점기에 힘들어하던 우리 아이들에게 숨 쉴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색동회는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아동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고,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1927년 5월 첫째 일요일로 변경)했으며 이 외에도 세계아동예술전람회와 동화·동요회를 개최하는 등 많은 활동을 펼쳤다. 그러자 일제는 색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간주해 탄압했다.
일제의 훼방으로 힘들어하던 방정환은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1931년 숨을 거뒀다. 방정환이 사망하자 색동회 활동도 멈춰버렸다. 1934년 「어린이」가 폐간되고, 1937년 일제에 의해 어린이날 행사가 전면 금지되었다. 그 배경으로 1940년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시기 어린이들은 강제적으로 송진을 채취해 학교에 제출하고, 아동용 황국신민서사를 억지로 외우며 일본의 식민지인으로 살아가기를 강요당했다.
다행히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을 맞이하자 많은 이가 색동회를 떠올렸다. 색동회에 참여했던 사람 외에도 「어린이」를 읽고 동화와 동요를 보고 들으며 꿈을 키웠던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색동회를 찾았다. 이들은 힘을 합쳐 색동회를 부활시켰다. 1946년 「어린이」를 다시 발행하고,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했다. 그러고는 어린이가 세상의 주인공으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희망한 방정환 선생을 기억하기 위해 1956년 소파상을 제정했다. 이들의 노력이 하나둘 쌓인 결과, 대한민국 정부는 1975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무엇보다도 색동회의 가장 큰 성과는 어린이가 행복하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을 우리 모두에게 심어준 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색동회는 동화구연대회와 어린이자연생태학교 등을 운영하며 어린이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케이 로고 이미지
5월5일 어린이날은 소파 방정환(方定煥)등 일본 유학생의 색동회에서 만들었다.
[출처: 국립미술박물관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