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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2022 Vol.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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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역사 속 숨은 영웅

'널리 구하고, 크게 노력하자'

독립운동의 의지를 교육으로 실천한, 춘고(春皐) 이인식 선생


이인식 선생은 3·1운동 당시 학생 대표로 참가한 것은 물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부하며 이 시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독립운동가다. 해방 이후에는 교육자로서 국가의 발전과 지역 주민의 성장을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 특히 인생 전반에 걸친 독립에 대한 열정을 통해 이인식 선생의 애국심, 인내와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경훈 보라고등학교 역사 교사

이경훈 역사 교사는 보라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일 간 역사 갈등과 화해를 연구하면서 「쟁점 한일사」, 「마주 보는 한일사」(공저) 등을 출간했다. 동아시아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원교사,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 위원 등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민족의식이 투철한 곳에서의 첫 배움

춘고(春皐) 이인식(李仁植) 선생은 1901년 10월 전북 옥구군(현재의 군산시) 임피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임진왜란 이전부터 대대로 임피면에 거주하며 지역 유지역할을 해온 만석 부호였다. 그는 취학 연령 시기에 개교한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인 1916년 서울 보성학교에 입학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손병희가 교주로 있던 천도교에서 운영한 보성학교는 교내에 있던 보성사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투철한 곳이었다.
1917년 보성학교 전경 촬영(현재 서울 종로구 조계사 자리) [출처: 보성학교. 『민족사랑』 6월호, 2022. 민족문제연구소]

운명의 3월 1일, 역사의 한복판으로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은 3월 1일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진행된 독립선언식과 학생들의 시가지 만세 시위, 3월 5일 학생 중심의 남대문 시위, 3월 23일부터 26일까지 펼쳐진 민중 시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학생 시위를 주도한 대표자들은 고종이 승하한 직후인 1월 말부터 천도교와 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생들이 추진한 2·8독립 선언 소식이 들려온 뒤로는 각 학교의 대표단을 선발하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1917년 보성학교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로 개명) 학생 대표 장채극, 전옥결 등도 모교 학생들을 은밀히 모집했고, 이때 3학년 이인식도 동참했다. 1962년 국가보훈청에서 작성한 이인식 선생의 ‘유공자 정보 기록’에 의하면 그는 당시 미국 영사관과의 연락책임 및 전북 학생 대표로 활동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진행된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 뒤 다시 한번 탑골공원 육각당 위에서 낭독되자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와 동시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이인식 선생은 장채극에게 받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시위에 참여한 군중과 인사동 인근 미곡상 등에 배포했다. 이후 시민들과 함께 탑골공원을 나와 ‘조선 독립 만세’, ‘독립 만세’ 등을 외치며 종각을 거쳐 정동, 미국영사관, 대한문 앞을 지나며 만세 시위를 독려했다.
이인식 선생 판결문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이인식’이라고 쓰여있다.
[출처: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남대문 역 앞에 울려 퍼진 독립 염원의 함성

3월 5일 오전 9시, 1만 명에 가까운 학생이 남대문 역 앞에 집결했다. 학생 대표 강기덕, 김원벽이 각각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고 쓰인 깃발을 휘날리며 달려왔다. 이들은 “제2의 독립운동을 선포한다”라고 외치며 시위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남대문 역 앞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일제히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남대문으로 향했다. 행렬의 맨 앞에 선 학생들이 매를 맞고 검거되면 뒤쪽 학생들이 열을 정비하고 다시 돌진했다. 이인식 선생은 이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자임을 명료하게 표시하기 위한 붉은 천을 팔뚝에 두르고 남대문시장을 거쳐 종로 보신각까지 행진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3월 한 달 동안 서울에서 전개된 시위, 각종 격문과 지하신문 제작·배포로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된 학생은 모두 240여 명에 달했다. 그 중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도 18명이나 되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이인식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재판 당시 기록된 심문조서를 보면 3·1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장명식은 “강화담판(파리강화회의)에 조선 사람이 3~4명 가서 독립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아무리 각국 위원을 설득해도 조선의 나라 안이 조용하다면 각국 위원들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조선 사람들도 독립을 희망하는 소동이 큰 화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학우인 이인식 선생의 개별 심문 조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선생 역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인식 선생을 포함한 서울 독립만세운동 관련자에 대한 판결은 1919년 11월 6일에 열렸다. 이날 이인식 선생은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개월 형을 선고 받았다. ‘전무후무한 판결, 3월 1일부터 5일까지 서울 기타 각지에서 소란을 일으켜 국헌을 문란케 한 불량 학생 240명에 대해 6일 오전 9시 30분부터 판결을 내린다. 재판장은 피고를 하나씩 불러 통역을 시켜 피고인의 죄상을 일일이 열거하고 선고했다. 법원 구내에는 피고인들의 부모 형제 처자들이 산같이 모여 섰고, 경계가 매우 삼엄했다. 이와 같이 많은 피고인에 대해 일시에 판결하는 것은 조선에서 처음 보는 일이고, 일본에서도 이러한 큰 판결은 없었다.’ 1919년 11월 8일자 「매일신보」에는 당시 무거웠던 재판장의 분위기 담은 기사가 게재됐다.
“전무후무한 대판결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 대부분은 학생이었다” (징역 7개월 부분에 이인식 선생이 표기되어 있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매일신보」 1919년 11월 8일]

독립을 향한 끊임없는 열정, 숨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인식 선생은 감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조달하다가 투옥된 이원형 선생을 만났다. 그러면서 임시정부의 자금 상황이 여의찮다는 사실을 알았다.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고향 땅 24만 평을 처분해 8,000원을 마련한 뒤 경찰의 감시가 느슨한 틈에 심양에서 임시정부 요인을 만나 전액을 기부했다. 임시정부 요인은 그에게 무기명으로 된 1,000원짜리 공채 다섯 매와 기명 공채 세 매를 건넸다.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은 2원이었다. 그의 장손 이일곤이 1995년 한국감정원에 근무하며 할아버지가 매각한 토지 가격을 감정한 결과 1995년 기준으로 47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당시 그가 받은 공채 중 무기명 공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76호 일금 천 원, 대한민국(1920년) 3월 20일 총통부령 제11호를 받들어 공채거래에 무기한으로 발행하다. [출처: 무기명 공채. 『이인식과 그 시대』 2019. 스캔본]

독립 정신 고취를 위한 국내외의 노력

독립 자금을 기부한 뒤, 1923년 그는 일본 동양대학교에 입학했다. 임피보통학교 동창회보에 쓴 글에 그가 일본 유학을 결심한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고향 산천이 푸릇한 움과 싹은 하나도 없고 우수수 떨어지는 황엽뿐이니··· 우리가 유교의 개인적 중용사상을 동경한 지 몇백 년이며, 양반의 독존 사상을 호흡한 지가 오랜 세월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그러한 궤도를 밟아가고 있으니··· 구하자, 크게 구하자(···). 원수에게도 구하고, 은인에게도 구하자’라고 했다. 즉 양반 중심의 유교 사상으로는 국가의 운명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사상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원수에게조차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일본 내 한국 유학생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금우회(錦友會)를 조직해 월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실력양성운동과 함께 학교 교육에 힘쓰다

국내로 돌아온 이인식 선생은 임피지역 중학 기성회와 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고향에서 실력양성운동(민족의 실력을 길러서 나라의 주권을 지키자는 운동이다. 일제강점기 이전 대한제국 때는 자주독립을 지키자는 운동이었으며, 3·1운동 이후인 1920년대에는 사회·경제·문화 운동으로 전개되었다)을 추진했다. 1928년 가뭄과 흉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어렵게 야학을 펼치고 있던 지역 사람들에게 매월 2원씩 의연금을 보냈다. 또 임피보통학교가 교육 용품이 부족해 교육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역 유지들을 설득해 교육기자재를 기증하고, 이때 이인식 선생도 소년악대(少年樂隊) 한 세트를 기증했다. 한편 임피·서수·나포·성산 등 당시 옥구군 지역에는 중등학교가 없었다. 지역 유지들은 지역의 학생 교육을 위해 중학교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마땅한 설립 부지가 없었다. 그렇게 학교 부지로 적합한 곳을 찾던 중 ‘옥구농민항쟁’* 이 일어난 이엽사(二葉社) 농장 부지를 선택했다. 역사적 의미도 있고, 4개 면의 중심지라 교통도 편리해 이곳에 임피중학교를 설립했다. 어렵사리 학교는 세웠지만 먹고 살기 힘든 당시 환경 때문에 학생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이인식 선생은 1953년 임피중학교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해 집안 사정이 곤란해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집마다 방문해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한다’라고 설득하여 학교에 나오게 했다. 또 학교에 근학대(勤學隊)를 만들어 산과 들에서 자라는 한약재를 채취해 도시에 내다 팔아 기금을 모아 어려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등 지역의 교육 활성화를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그 결과 그가 교장으로 첫 부임할 때 21명에 불과하던 학생 수가 1962년 정년 퇴임할 때는 한 학년이 245명이나 되는 학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옥구농민항쟁:1927년 전라북도 옥구에 사는 일본인 지주, 시라세이가 운영하는 이엽사(二葉社)농장에서 75%에 달하는 고율의 소작료를 받아가자 이를 인하할 것을 요구하며 지역 농민 조합과 청년 단체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다.

꾸준한 인내와 노력의 가치를 실천으로 보여준 교육자

이인식 선생은 3·1운동에 학생 대표로 참가한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일생을 헌신했다. 해방 이후에도 교육자로서 국가의 발전과 지역 주민의 성장을 위해 매진했다.
그가 이렇게 흔들림 없이 올곧게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생전 그가 남긴 여러 흔적을 통해 어떤 생각으로 어려운 시대와 인생을 살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인식 선생은임피중학교 교장 시절,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훈화를 통해 인내와 노력을 강조했다. “노력이 천재를 낳는다. 운명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자의 노력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이를 명심하고 이에 맞게 성실하게 생활해야 한다. 더불어 원대한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해야만 내일의 꿈을 이뤄나갈 수 있다.”
그는 말과 글로만 인내와 노력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전 생애에 걸쳐 인내하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독립운동가로서는 물론 교육자로서 그는 사표(師表)로 기억될 인물임이 틀림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인식 선생의 독립 정신을 기려 1962년 3월 1일 건국 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고, 사후인 1974년 10월 17일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자 묘역에 안장했다. 005년 10월에는 그의 고향 군산 월명 공원에 동상을 세우고 매년 8월 15일 추념식을 통해 끊임없이 인내를 구하고 노력하는 그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케이 로고 이미지
군산 월명 공원에 세워져 잇는 애국지사 춘고(春皐) 이인식 선생의 동상[출처: 군산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