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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ember 2022 Vol.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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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나누기

에세이

가을 앓이

최홍석(前 호남삼육중·고등학교 교장)

최홍석 작가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접고 교사가 됐다. 2019년 8월 은퇴후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며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과 깨우침을 주는 글을 쓰고 있다.

가을의 낭만 뒤 외로운 듯 그리운 듯 미묘한 감정들

나른하고 몽환적인 봄과 달리 가을은 차갑고 이지적이다. 청량음료 같기도 하고, 명징(明澄)하다. 풍요롭고 넉넉한 것 같은데도 무언가 허전하고 외로운 듯 그리운 듯 무어라 단정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들이 종일 엎치락뒤치락한다. 태양은 아직도 이글거리고 절기상으로 가을은 아직 멀리 있을 때도 논에 내리쬐는 햇살은 벌써 생기를 잃고 쓸쓸해진다. 봄이 사람을 들뜨게 한다면, 가을은 사색하게 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한다. 봄은 1년을 계획하는 때이지만 가을은 한 해를 정리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리라. 올해도 소리 없이 가을이 깊어간다. 눈에 띄게 수은주가 뚝뚝 떨어진다. 이제 머지않아 산야는 붉게 타오를 것이다. 눈부신 억새는 군무를 출 것이고, 가을을 기다리는 이들은 벌써 설렌다. 백두대간이 어떻고 100대 명산이 어떻고 셈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한편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들의 손길은 더욱 바빠질 것이다. 어디 사람뿐이랴. 온갖 산짐승도 월동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가을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계절인가?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노숙자, 실향민, 그리고 가을에 아픈 사연을 지닌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나는 가을이 썩 좋지만은 않다. 어릴 적 기억 때문이다. 땅거미가 짙어오고 밤이슬이 내려 으슬으슬 추워지고 손발이 시려오는 데도 일은 끝날 줄을 모르고 집에 가자는 부모님의 말씀은 떨어지지 않았다. 형제들이 우글거리는 방도 고구마며 호박이며 고추 등이 점점 좁혀와 방 밖으로 밀려날 지경이 되곤 했다. 죽도록 일해도 지독한 가난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은 가을의 낭만 따위는 없었다. 친구들이 경주로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와 자랑하는 사진과 선물이라고 사다 준 우편엽서에 찍힌 단풍이 가을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내 유년 시절 가을은 고생이 먼저 떠오르는 계절이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서리맞은 나뭇잎들

어느 늦가을 두물머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운길산에 올랐다. 굽이져 흐르는 강물과 가을 들녘을 넋을 잃고 바라보자니 두보(杜甫)의 시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가없이(끝없이) 지는 나뭇잎은 소소히 나리고 다함 없는 긴 가람(강)은 이어 이어 오는구나.’(「등고(登高)」 중) 인생의 덧없음과 자연의 영원함을 대조한 노래이며, 노경(老境)의 탄식과 비애가 서린 시다. 덩달아 나의 심사도 처연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불타는 단풍이 한 그루 서 있었다. 서리가 내린 후라서 다른 나무들은 모두 잎을 떨구고 앙상한데 ‘서리 맞은 나뭇잎이 2월의 꽃보다 더 붉다’(두목(杜牧)의 「산행(山行)」 중)던 옛 시인의 말처럼 핏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하도 곱기에 한 잎 따다가 책갈피에라도 넣어둘 요량으로 가까이 가서 뒤지는데 거짓말처럼 성한 잎이 하나도 없었다. 벌레 먹고, 지난 태풍에 찢기고, 서리에 끝이 바스라지고…. 그러나 댓 걸음만 물러나서 보면 여전히 황홀하게 아름다웠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더란 말인가

배나무 과수원 농사를 하는 형님이 한 분 계신다. 어느 해 봄, 길을 가다 보니 겨울이 지나 날씨가 풀리고 배나무에 꽃망울들이 부풀고 있었다. 머지않아 눈송이처럼 천지를 뒤덮을 배꽃을 생각하며 들뜬 목소리로 형님에게 전화했다. “형님, 꽃망울이 곧 터지겠어요! 곧 장관이 펼쳐지겠네요! 얼마나 좋으세요!” 덩달아 기뻐할 형님의 반응을 기대했으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형님의 대답은 비명에 가까웠다. “동생, 그런 말 말우! 그러잖아도 그 일만 생각하면 잠이 안 와! 이제 고생 시작이야!” 전화를 끊고 생각하니 그 말이 맞았다. 행락객들이야 눈이 부시니 낭만적이니 하겠지만 정작 농부는 고된 일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인 것이다. 화접을 붙이고, 열매를 솎고, 봉지를 싸고, 농약을 치고, 잡초와 병충해를 가까스로 견뎠나 싶으면 태풍이 기다리고, 힘든 수확과 판로 걱정까지 이겨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하, 이 또한 인생과 같구나. 먼발치서 보면 완벽해 보이는 삶도 한 걸음 다가서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처투성이인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던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더란 말인가. 먼 곳의 잔디는 언제나 푸르지 않던가. 산 그림자가 내려오는 산마루에서 굽이져 흐르는 강물을 보며 어쭙잖은 사색에 잠겼었다. 인생이 그렇지만 가을도 이중주(二重奏)다. 아름다움 가운데도 추함이 있고 환희 가운데도 비애가 있다. 조물주는 기쁨이라는 씨줄에 슬픔이라는 날줄을 얽어 인생이라는 피륙을 짠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페르시아 양탄자처럼 아름다운 문양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양은 대부분 슬픔의 순간이 만들어낸다. 그 대상이 인생이 됐건 상황이 됐건 굳이 가까이서 들여다보며 아파하고 슬퍼할 까닭이 무언가. 댓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아름다운 것을.

가을 앓이로 뒤척이는 이 밤

가을이 풍요로운 것은 혹한의 겨울을 견디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의미도 있거니와 변방의 흉노족이 약탈하러 올 시기가 되었으니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경계(警戒)의 뜻도 있다. 서정주 시인이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국화 옆에서」 중)라고 하더니 첫돌이 갓 지난 손자 녀석은 이가 돋아나느라 이앓이로 밤새 뒤척이고, 나는 한 살을 더하느라 가을 앓이로 이 밤을 뒤척인다. 자고 나면 내일은 더 성숙해 있을까나. 케이 로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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