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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스푼

시대를 넘어 전하는 용기

이태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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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장벽 앞에서 누구보다 먼저 용기 있게 나선 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동성동본금혼법’ 폐지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이태영 변호사입니다. 낡은 관습과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맞서, 그는 법과 제도를 넘어선 여성들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꿈꿨습니다. 남다른 삶의 궤적과 불굴의 의지로 이정표를 세운 이태영 변호사, 그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글 황인희 역사 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책을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 여행 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 사진 및 자료 제공: 법률구조법인 한국가정법률상담소

* 사진 및 자료 제공: 법률구조법인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동성동본금혼법’ 폐지를 향한 의지

1997년까지 존재한 민법 제809조 제1항은 성과 본이 같은 이들의 결혼을 금지한 법이었습니다. 이는 남성의 부계 혈통만을 기준으로 혼인 가능 여부를 결정해 이른바 ‘동성동본금혼법’으로 불리며 가부장제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았고, 2005년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이 혼인의 자유,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해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뿌리 깊었던 이 제도를 폐지하는 데 앞장선 이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입니다.
1950년대, 이태영 변호사가 이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기 시작하자 반대하는 유림은 “이 나라를 떠나라” “짐승이나 마찬가지다” “차를 폭발시키겠다”라며 협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태영 변호사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살아서 우리 여성들의 힘을 북돋아 주고 법 개정을 지켜봐야 순순히 죽을 수 있겠다”라며 결기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교사에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이태영 변호사는 1914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공부해야 할 녀석은 일찍 불을 끄고, 공부 안 해도 되는 딸은 밤새워 열심히 하니…”라고 혀를 찰 정도로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그는 성장했습니다.
1936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된 이태영 변호사는 그해 정일형 박사와 결혼했습니다. 독립유공자인 정일형 박사는 1937년 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특별 강연회를 개최한 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 강연회는 안창호 선생의 생전 마지막 강연회가 되었고, 이후 정일형 박사는 흥사단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이태영 변호사는 교사 월급으로 가사와 육아를 도맡고 남편 뒷바라지까지 하며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교사이던 그는 생활고에 부딪히자 직접 이불을 만들어 집집마다 다니며 팔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까지 나와 이불 행상을 한다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돈을 꽤 번다하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는 그의 말처럼, 덕분에 형편이 나아져 집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흥사단 사건: 1937년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흥사단 단원 약 70명이 체포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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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정일형 박사와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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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제2회 고등고시에 합격,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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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제14차 세계변호사회에 참석, 여자 변호사 최초로 개회사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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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정일형 박사와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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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제2회 고등고시에 합격,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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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제14차 세계변호사회에 참석, 여자 변호사 최초로 개회사를 함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다

1945년 해방 후, 이태영 변호사는 정치인이 된 남편 정일형 박사의 전폭적 지지 속에 학업의 꿈을 다시 펼쳤습니다. 서른두 살 나이에 넷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지만, 정일형 박사는 그의 도전을 응원했습니다.
1946년, 이태영 변호사는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했습니다. 출산 후에도 치열하게 공부했던 그는 1949년 졸업 후 6·25전쟁의 시련 속에서도 1952년 제2회 고등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여성 최초이자 서른아홉 살 가정주부의 고시 합격은 큰 화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하던 판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여성 판사 임용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태영 변호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로서 자택에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개소하자마자 남편의 외도, 가정폭력, 불합리한 이혼 등으로 고통받던 여성들이 줄지어 몰려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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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막사이사이상 수상 축하회에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직원들과 찍은 기념사진(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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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방한한 마더 테레사 수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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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막사이사이상 수상 축하회에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직원들과 찍은 기념사진(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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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방한한 마더 테레사 수녀와의 만남

법으로 이룬 평등, 이태영 변호사의 유산

1959년까지 시행된 옛 민법은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조항이 많았습니다. 헌법이 남녀평등을 규정했지만, 친족 및 상속법은 여전히 여성에게 차별적이었습니다. 남편의 혼외 자식은 호적에 올릴 수 있어도 그 반대는 불가능했고, 친권은 아버지에게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또 딸은 호주상속 순위가 가장 낮았고, 관습법에 따라 결혼한 딸의 재산 상속 지분은 매우 제한적이거나 아예 없었습니다.
법에 무지하고 취약했던 여성들을 위해 이태영 변호사는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열고 무료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우편, 전화, 잡지 지면은 물론 라디오 방송까지, 밀려드는 상담에 답하며 여성들의 권리 회복을 위한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의 노력 끝에, 1997년 ‘동성동본금혼법’이 위헌 결정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태영 변호사가 상담소를 차린 지 41년 만이자 그의 나이 팔십을 훌쩍 넘긴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별세한 지 7년 후인 2005년이 되어서야 민법이 개정되고 호주제와 동성동본금혼제가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이태영 변호사는 시대의 금기를 깨고 사회의 경계를 과감히 넘어선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실천은 법과 제도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었으며, 수많은 여성에게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지켜낼 힘을 불어넣었습니다. 법률이라는 도구로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 그는, 미래 세대의 삶까지도 변화시켰습니다. 이러한 공로는 막사이사이상**을 비롯한 여러 인권상 수상으로도 증명되었습니다. 그가 일평생 걸어간 길은 오늘날 우리가 함께 이어가야 할 ‘희망의 이정표’로 남아 있습니다.케이 로고 이미지
**막사이사이상: 아시아 지역의 사회 발전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는 '아시아의 노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