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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학계 등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한 이들의 발자취

역사 한 스푼

한국인에게 ‘세계로 열린 창’을 제공한

김찬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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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으로 해외 여행이 위축된 3년이 지나고 엔데믹이 선언된 2023년, 해외 여행 출국자 수는 지난 3년 출국자 수의 2배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해외 여행은 빼놓을 수 없는 여가 생활이 됐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 국민이 본격적으로 해외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989년으로, 이전에는 정부의 허가 없이 자유롭게 해외 여행을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우리 국민에게 해외 여행의 꿈을 심어준 인물은 김찬삼 교수였습니다. 그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테마 여행을 비롯해 3회에 걸쳐 세계 일주를 한 뒤 이를 글로 옮겨 온 국민에게 여행의 즐거움과 가치를 전해 왔습니다. 그의 일대기를 다시금 되짚으며 우리가 처음 여행을 떠났던 그때의 설렘을 되살려볼까요.

글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대학교 졸업 후 줄곧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월간 「샘터」 편집장을 끝으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다수의 저서를 저술했고, 현재 역사 칼럼니스트, 인문여행작가로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출처: 「한국 최초의 세계 여행가 김찬삼」,
출판사 길벗어린이

지구 32바퀴를 달린 '여행의 신'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은 조선 말기의 관리 민영환입니다.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1896년 4월 1일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민영환 일행은 중국, 일본, 캐나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에 도착했습니다. 돌아올 때는 시베리아를 횡단했으니, 지구를 한 바퀴 돈 셈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지구 한 바퀴를 ‘경유’했을 뿐 ‘여행’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지구 곳곳을 샅샅이 다니며 여행다운 세계 일주를 한 사람은 김찬삼 교수가 처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가 처음 세계 일주를 시작한 해는 1958년입니다. 남들은 생애 한 번도 하기 힘든 세계 일주를 그는 1988년까지 무려 세 번이나 했고, 20여 차례 테마 여행을 했습니다. 2023년을 기준으로 우리 외교부가 인정하는 전 세계 국가는 228개국인데 김찬삼 교수는 그중 160여 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다닌 거리를 다 더해 보면 지구 32바퀴를 돌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니 그에게 ‘여행의 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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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삼 교수가 여행 시 사용한 물품

'꿈'을 현실로 만든 지리 교사

외국 여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 김찬삼 교수는 숙명여고 지리 교사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가 외국 여행을 계획한 가장 큰 이유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세계 지리를 가르치는 데 교과서 속 내용만으로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25전쟁이 끝난 지 5년여밖에 되지 않았던 당시 우리나라 현실에서 외국 여행은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국력도 보잘것없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입국 비자를 내주는 나라는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허가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전에는 여권을 발급받는 일 자체를 특권으로 여겼을 정도였고, 해외 관광여행 횟수 제한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찬삼 교수는 ‘지리학적 현지 조사’를 명목으로 나라 밖으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첫 목적지는 북미,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 지역이었습니다. 그의 여행 원칙은 ‘문명지보다는 비문명지를, 잘사는 사람보다는 못사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행 경비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주로 걸어 다니거나, 오토바이 혹은 자전거를 타고 무전여행 못지않게 이곳저곳을 다녔습니다.
김찬삼 교수는 자신이 다닌 여행지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었고, 여행지의 역사, 문화,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과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꼼꼼히 기록해 1950년대 말부터 이를 일간 신문에 연재해 많은 사람에게 넓은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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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세계여행을 떠나는 김찬삼 교수(왼쪽에서 아홉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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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생한 모험담이 실린 『김찬삼의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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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여행 중 여비가 부족해 길에서 식사하는
     김찬삼 교수
'꿈'을 현실로 만든 지리 교사

외국 여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 김찬삼 교수는 숙명여고 지리 교사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그가 외국 여행을 계획한 가장 큰 이유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세계 지리를 가르치는 데 교과서 속 내용만으로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25전쟁이 끝난 지 5년여밖에 되지 않았던 당시 우리나라 현실에서 외국 여행은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국력도 보잘것없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입국 비자를 내주는 나라는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허가를 얻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전에는 여권을 발급받는 일 자체를 특권으로 여겼을 정도였고, 해외 관광여행 횟수 제한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찬삼 교수는 ‘지리학적 현지 조사’를 명목으로 나라 밖으로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첫 목적지는 북미,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 지역이었습니다. 그의 여행 원칙은 ‘문명지보다는 비문명지를, 잘사는 사람보다는 못사는 사람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행 경비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현지에서는 주로 걸어 다니거나, 오토바이 혹은 자전거를 타고 무전여행 못지않게 이곳저곳을 다녔습니다.
김찬삼 교수는 자신이 다닌 여행지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었고, 여행지의 역사, 문화,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과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꼼꼼히 기록해 1950년대 말부터 이를 일간 신문에 연재해 많은 사람에게 넓은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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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세계여행을 떠나는 김찬삼 교수
(왼쪽에서 아홉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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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생한 모험담이 실린 『김찬삼의 세계여행』
역사한스푼06
▲ 세계여행 중 여비가 부족해 길에서 식사하는
     김찬삼 교수
생생한 모험담이 실린 <김찬삼의 세계여행>

김찬삼 교수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빗대 ‘서방견문록’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모아 만든 책에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함께 찍은 사진과 박사의 움막에서 열흘을 지냈다는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또 그가 위기나 역경을 극복한 무용담도 많았습니다. 현지인의 꾐에 빠져 따라갔다가 격투 끝에 빠져나온 이야기나 하룻밤 잘 곳을 구하지 못해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이야기도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지갑 등 귀중품은 다 빼앗겼지만 사진 필름은 구두 속에 숨겨 지킬 수 있었다는 대목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물론 그의 여행에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70년 독일 여행 중 사귄 독일인 친구에게서 자동차를 선물 받은 뒤 그때부터 자동차로 여행하게 되었다는 사연은 독자들에게 훈훈한 안도감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이 차는 국내에서 ‘딱정벌레차’로 불리던 폭스바겐 비틀로, 김찬삼 교수는 이 차에 ‘우정을 나눈 두 번째 친구’라는 의미로 ‘우정 2호’라는 이름을 붙여 그가 여행을 그만둘 때까지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이런 감동적인 여행기가 <김찬삼의 세계여행>이라는 열 권짜리 전집으로 나올 즈음, 넓은 세상을 동경하고 그처럼 여행가를 꿈꾸는 이른바 ‘김찬삼 키즈’도 많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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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정벌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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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봉공화국에서 슈바이처 박사와 만난 김찬삼 교수
역사한스푼09
▲ 1992~1993년 떠난 아구(亞歐)답사
생생한 모험담이 실린 <김찬삼의 세계여행>

김찬삼 교수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빗대 ‘서방견문록’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글을 모아 만든 책에는 아프리카 가봉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함께 찍은 사진과 박사의 움막에서 열흘을 지냈다는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또 그가 위기나 역경을 극복한 무용담도 많았습니다. 현지인의 꾐에 빠져 따라갔다가 격투 끝에 빠져나온 이야기나 하룻밤 잘 곳을 구하지 못해 경찰서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이야기도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지갑 등 귀중품은 다 빼앗겼지만 사진 필름은 구두 속에 숨겨 지킬 수 있었다는 대목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물론 그의 여행에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970년 독일 여행 중 사귄 독일인 친구에게서 자동차를 선물 받은 뒤 그때부터 자동차로 여행하게 되었다는 사연은 독자들에게 훈훈한 안도감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이 차는 국내에서 ‘딱정벌레차’로 불리던 폭스바겐 비틀로, 김찬삼 교수는 이 차에 ‘우정을 나눈 두 번째 친구’라는 의미로 ‘우정 2호’라는 이름을 붙여 그가 여행을 그만둘 때까지 동반자로 삼았습니다. 이런 감동적인 여행기가 <김찬삼의 세계여행>이라는 열 권짜리 전집으로 나올 즈음, 넓은 세상을 동경하고 그처럼 여행가를 꿈꾸는 이른바 ‘김찬삼 키즈’도 많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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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딱정벌레차
역사한스푼08
▲ 가봉공화국에서 슈바이처 박사와 만난 김찬삼 교수
역사한스푼09
▲ 1992~1993년 떠난 아구(亞歐)답사
말년까지 이어진 세계 탐험

첫 세계 일주를 마치고 귀국한 김찬삼 교수는 경희대학교, 세종대학교 등에서 재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세계여행과 여행기 발간은 꾸준히 계속되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점차 탈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김찬삼 교수는 마지막 조각이 빠진 퍼즐을 완성하려는 듯이 러시아, 중국, 동구권 국가를 여행했습니다.
김찬삼 교수는 1992년 실크로드-서남아시아-유럽을 잇는 7만 3,000km ‘서유견문 테마 여행’에 참여했는데, 그 여행 중 인도에서 열차 사고로 머리를 다쳤습니다. 이후 그는 언어장애가 생겨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노력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2001년 인천광역시 영종도에 세계여행문화원과 세계여행 도서관을 세우고 평생 모은 사진, 수기, 여행 도구, 여행 가이드북과 여행 관련 도서 1,800여 권, 화보집 200여 권 등을 전시했습니다.
2003년 김찬삼 교수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아들이 운영하던 세계여행문화원은 2013년 영종 하늘도시공원 공사로 철거되었습니다. 아쉽게도 지금 김찬삼 교수의 흔적은 그가 남긴 여행기와 사진 그리고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여행 동반자 폭스바겐 ‘우정 2호’에서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지핀 세계를 향한 열정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우리의 모험과 도전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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