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좋은 생각」은 급격히 변화하는 교육 환경 속에서 삶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제시하는
멘토 회원들에게 귀 기울이고 교육 철학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는 코너입니다.
한글 사랑으로 찾은 새로운 인생의 행복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정재환 책임연구원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학생’에 둔다. 평생 공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인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마흔 살에 대학 새내기가 된 뒤 배움과 가르침을 함께해 온 20여 년. 묵묵히 이어온 학업의 길이 그의 삶을 갈수록 풍요롭고 다채롭게 한다. 그 중심에 한글이 있다. 과학으로 빚은 세계 최고의 ‘명품’을 모두가 제대로
누리게 되기를…. 그 소망이 그를 이끌어간다. 도전을 거듭해 온 비결이다.
글
박미경 /
사진
김수
※ 모든 인터뷰 및 사진 촬영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해서 진행했습니다.
한글의, 한글에 의한, 한글을 위한, 바쁘지만 기쁜 그 길
그 카페는 주택가 골목 안에 숨어 있다. 서서히 사라져간 것들이, 그 길 위에 은은히 남아 있다. 골목은 길이기 이전에 ‘마당’이다. 평상이나 의자를 놓고 어른들이 동네 소식을 나누던 공간이기도 하고, 꼬마들이 숨바꼭질이나 구슬치기 같은 놀이를 하면서 유년의 추억을 쌓던 장소이기도 하다. 담장을 두르고 있어도 서로의 살림이 훤히 보이고, 대문을 닫고 있어도 각자의 처지가 빤히 읽히던 곳. 그리움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수원의 한 골목에 그의 호를 딴 북 카페 ‘봄뫼’가 있다. 기어이 꽃을 피우는 봄날의 산처럼, 그의 꿈도 마침내 싹을 틔울 것이다.
“2019년 10월에 문을 열었어요. 사람 냄새 가득한 공간을 꿈꾸면서요. 북 콘서트, 미니 특강, 독서 모임 같은 것을 일주일에 두 번은 하려고 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코로나19 시국으로 접어드는 바람에 그 소망을 이루지 못했어요. 하지만 가능성은 봤습니다. 강사 초청 특강을 몇 번 진행했는데, 동네 분들이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슬슬 다시 시작하고 싶네요.”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 한글학회 연구위원,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칠곡할매글꼴 홍보대사, 서울경제TV ‘정재환의 아리아리’ 진행자…. 지난 학기를 끝으로 교수로서의 삶을 접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빽빽한 일정 속을 누빈다. 최근엔 ‘조선어학회 사건’ 80주년을 기념해 한글학회에 발표할 논문을 쓰고 있다. 한국어 교육에도 열심이다. 한글문화연대 부설 한국어학교에서 결혼 이주 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얼마 전부터는 일본인과 미국인을 상대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온라인 수업도 시작했다. 그에겐 바쁨이 곧 기쁨이다. 한글의, 한글에 의한, 한글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오산시 평생학습관에서 진행한 강연 모습
세상 모든 것을 ‘스승’으로, 넓고 깊은 삶
“한글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는 바로 방송이에요. 무명 생활을 오래 하다 ‘청춘행진곡’ 진행자로 인지도를 높이면서 라디오 DJ로, TV 진행자로 바삐 활동하게 됐어요. 그중에는 ‘퍼즐특급열차’, ‘우리말 겨루기’처럼 우리말·글에 관한 프로그램도 있었고요. 마이크 앞에서 혼자 말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개그맨일 때는 미처 몰랐던 제 부족함이 확연히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우리말을 잘 모르는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 속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잘못된 언어 습관을 하나씩 고쳐나가는 게, 말로 밥을 먹는 사람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책무라고 생각했죠.”
이런저런 책을 읽으며 한글 사랑에 빠졌다. 독서의 즐거움과 한글의 아름다움에 단단히 매료됐다. 대학생이 된 건 우리 나이로 마흔 살 때 일이다.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나가고 싶어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한글문화연대를 창립했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2000년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조차 ‘지금은 돈을 벌어야 할 때’ 라며 그를 말렸지만, 학업과 한글을 향한 그의 열정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인생은 두 번 살 수 없기에 실제로는 한 번도 살지 않은 것과 같다.’ 그 말이 깊이 와닿았어요. 한 번뿐인 인생, 마음 끌리는 대로 살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국문학과와 사학과 사이에서 고민하다 한글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사학과를 선택했어요. 사학과에서 한글 역사를 별도로 가르쳐주는 건 아니지만 역사를 공부한 덕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어 생각하는, 연속적 시각을 배우게 됐죠.”
스스로 찾아가며 한글 역사를 공부한 끝에 2013년 논문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대학에서 10년 가까이 강의를 했다. 배우고 가르치고 또 배우면서 끝없는 ‘학생’의 길을 지금껏 걷고 있다. 평생 공부하는 삶을 살고 싶은 그는 계속해서 배울 수 있는 원동력으로 ‘불치하문(不恥下問)’의 태도를 꼽는다. (나이나 지위, 학식 따위가) 자기보다 못 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무 살가량 차이 나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그도 처음엔 무얼 묻기가 부끄러웠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걸 극복하면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음을 톡톡히 경험했다. 그때부터 세상 모든 것이 그의 ‘스승’이 돼줬다. 스승이 도처에 있으니 삶이 넓고 깊어졌다.
어린이들과 함께 세종대왕이 잠든 영릉 답사 (2008년 10월)
알고 있는 낱말의 크기가 할 수 있는 생각의 깊이
“우리는 모두 명품을 갖고 있어요. 그게 바로 한글이죠. 다른 나라의 글자는 대부분 우연히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한글은 달라요. 세종이라는 ‘장인’이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드셨죠. 한자가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던 것과 달리 훈민정음은 백성과 나누기 위해 만든 글자예요. 글자 안에 ‘민주(民主)’와 ‘공유(共有)’의 정신이 들어 있죠. 세계 유명 석학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어요.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분이라면 주시경 선생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의 기초를 다진 분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아주 큰 획을 그은 인물이기에 온 국민이 그 이름을 기억해 주길 간절히 소망한다.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언어는 살아 있는 존재니까요. 다만 그 신조어가 누군가를 상처 주는데 쓰이지 않았으면 해요. 새로 생긴 그 말이 우리 언어를 풍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고요. 최근 동영상 세대의 ‘문해력’ 문제가 화두인데, 사전 찾기와 책 읽기에 그 답이 있다고 봐요. 사전을 찾다 보면 낱말들의 다채로운 의미를 알게 되고, 책을 읽다 보면 단어와 문장의 맥락을 이해하게 되니까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로 말을 하고, 그 말로 생각하는 존재예요. 알고 있는 낱말의 크기가 할 수 있는 생각의 깊이와 비례하죠. 우리가 어휘력을늘려야 하는 이유예요.”
‘ㅎ’ 닿소리 하나 마음에 품고 사는 즐거운 삶
좋아하는 순우리말이 많지만, 그는 그 가운데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나아가자’는 뜻의 ‘아리아리’를 가장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닿소리는 ‘ㅎ’이다. 하하하 호호호. 웃는 소리를 떠오르게 할뿐더러 ‘행복’이나 ‘희망’ 같은 낱말이 ‘ㅎ’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가 사랑하는 ‘한글’도, 그가 좋아하는 ‘함께’도, 그의 예전 직업인 ‘희극인’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자음 하나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삶은 훨씬 즐거워진다.
“더는 희극인이 아니지만, 저는 유머의 힘을 믿어요. 한글 관련 특강을 할 땐 웃음을 줄 수 있는 농담을 많이 생각해 가요. 대학에서 강의할 때도 한두 마디 유머는 꼭 하려고 노력했고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잖아요. 웃음이 곧 행복이에요. 남을 웃게 만들려는 노력만큼은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고 싶어요."
한글과 한국어를 끔찍이 아끼지만, 외국어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결코 닫혀 있지 않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일본어를 배웠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53세에 필리핀으로 영어 연수를 다녀왔다. 그 도전들이 지금 큰 도움이 된다. 일본인과 영어권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 여간 유용하지 않다.
“만 65세가 되면 동네 할아버지 교사가 되고 싶어요. 이 공간에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도 좋고, 그게 어렵다면 온라인 수업을 해도 즐거울 것 같아요. 무얼 어떻게 가르칠지 틈틈이 고민하고 있어요. 그 생각만 하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요.”
이제 4년 남았다. ‘하하하 호호호’ 소리가 넘쳐날 그의 ‘행복’ 한 교실이 벌써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