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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tober 2022 Vol.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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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

내 삶의 디자이너는 바로 나
소녀 감성으로 펼치는 꿈, 더 반짝이는 인생 후반전


글 쓰는 패션 디자이너 박애란 회원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아름답다’는 사람의 입꼬리를 움직이는 가장 짧고 확실한 말이다. 박애란 회원의 인생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꼽는다면, 역시 ‘아름다움’일 터. 패션, 춤, 음악, 문학 그리고 꽃보다 아름다운 학생들. 박애란 회원은 퇴직 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꿈을 좇고 있다.

이성미 / 사진 이용기

※ 모든 인터뷰 및 사진 촬영은 코로나19 방역수칙을 준수해서 진행했습니다.

시대가 일깨운 꿈, 아름다운 삶

외출을 앞두고 박애란 회원이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와 망사, 레이스로 장식된 모자를 꺼내 들었다. 또 가파른 길을 올라갈 것을 알면서도 굽 있는 신발을 골라 신었다. 그러고는 씩씩하게 앞장서 나갔다. 마치 여배우처럼 궂은 길 위에서도 당당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박애란 회원의 삶이다.
박애란 회원은 6·25전쟁 발발 직후 태어났다. 전쟁, 여성, 가난. 꿈꾸기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꿈꾸기 어려운 세대였다. 하지만 그는 멋지게 살고 싶었다. 교사, 패션 디자이너, 발레리나.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 꿈을 응원해 준 곳이 바로 서둔야학이다.
서둔야학은 1926년부터 1983년까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에 있던 야학이다. 당시에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을 위해 전국 각지에 야학이 설립·운영되었다. 그중 서둔야학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현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이끌었다.
박애란 회원은 이곳에서 1964년부터 1967년까지 공부했다. 초창기에는 문맹 퇴치와 성경 공부가 목적이던 서둔야학은 초등 과정이 의무교육으로 바뀌면서 학생들에게 중등 과정을 가르치게 되었고, 박애란 회원은 그 혜택을 제일 먼저 받았다. 학업에 대한 열의가 컸던 박애란 회원은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서둔야학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서둔야학은 학생들의 유토피아였다. 그곳에서 학생들은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았다. 문학, 음악, 철학 등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려주었다. “그런 것은 알아서 뭐 하게?”라고 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서둔야학 선생님에게서 스위스의 교육 개혁가 페스탈로치(Pestalozzi) 이야기를 들으며 박애란 회원의 꿈은 더욱 선명해졌다.
“모두가 살기 어려운 시대였어요. 힘없는 아이들은 항상 가난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죠. 아이들은 올이 나간 러닝 한 벌만 입고 마을 여기저기를 쏘다녔어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저는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치고 싶다’, ‘깨끗한 옷을 해 입히고 싶다’ 생각했어요. 직업으로 치면 교사, 패션 디자이너를 꿈꾼 것이죠. 시대가 제 꿈을 일깨웠다면, 서둔야학 선생님들은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알려주셨어요.”
그러나 현실은 꿈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집에선 학교조차 보내주지 않았다. 박애란 회원은 돈을 벌며 틈틈이 공부해 중등 검정고시를 치렀다. 스무 살 되던 1970년에는 자력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1979년에는 교원자격검정에 통과하고 타자 교사가 되었다. 타자를 공부한 이유는 그토록 배우고 싶던 피아노가 타자기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안 된다”라고 말하는 가혹한 운명에 맞서 박애란 회원은 멋지게 꿈을 이뤄내 보였다.

1979년 여고 담임 시절 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마세요

꿈을 이룬 후에도 박애란 회원은 꾸준히 서둔야학 선생님들에게 보답할 길을 찾았다. 해마다 서둔야학 기념행사에 참석해 선생님들을 만나고, 1997년에는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발전기금으로 100만 원을 쾌척했다. 현재까지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행정실 한쪽 벽 기부자 명단에는 ‘박애란(서둔야학 졸업생)’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다.
서둔야학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은 박애란 회원은 ‘교육은 마음밭을 가꿔주는 일’이라고 믿었다. ‘교육의 비결은 학생들을 존중하는 데 있다.’ 미국 사상가이자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말도 마음에 품었다. 박애란 회원은 학교 안에서 교사로서 학생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마음밭을 살뜰히 돌봤다. 가난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이 있으면 길을 열어주기 위해 발 벗고 뛰어다녔다.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마라.” 어린 시절 자기 자신에게 하던 말을 학생들에게 해주었다.
고르게 다듬은 마음밭에는 예술의 씨앗을 심었다. 서둔야학 선생님들이 그러했듯 박애란 회원의 수업 시간에는 시 읊는 소리와 클래식 음악 소리가 창밖으로 흘러나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읊을 때면 학생들은 “모란이 어떻게 생겼어요?” 하고 물었고, 그런 학생들을 위해 박애란 회원은 손수 화단에 모란을 심었다. 꽃은 사시사철 그의 옷 위에도 피어 있었고, 학생들은 패션과 예술을 사랑하는 그를 ‘공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낮 동안 교사로 열심히 살았다면, 밤에는 꿈의 빈칸을 채웠다. 일이 끝나자마자 서둔야학으로 달려가던 10대 소녀는 50대가 되어서도 일이 끝나면 어김없이 배움터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왈츠 동호회, 오페라 동호회, 지역 문화원 등을 오가며 예술에 대한 갈증을 채웠다. 한국폴리텍대학교에서 패션 디자인 야간 과정을 밟기도 했다. 막차를 타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몸은 무거워도 마음은 가벼웠다. 그리고 2012년, 다음과 같은 인사를 남기며 평택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퇴직했다.
“이제 제가 무엇을 할 것이냐 하면, 발레를 배울 것입니다.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배워 무엇을 할 것이냐? 목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냥 그 과정을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 패션 디자이너, 발레리나. 이것은 제 어릴 적 꿈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30년 넘게 했으니 이만하면 됐고, 그다음 꿈을 향해 도전할 것입니다. 살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중략) 그래서 여러분도 저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수필가 등단 기념식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자유로운 후반생

퇴직 후 박애란 회원은 서울로 거주지를 옮기고 본격적으로 꿈을 이룰 준비를 했다.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발레였다. 마음은 여전히 10대 소녀였다. 마음처럼 몸이 움직여주지 않을 때는 ‘이 나이에 내가 왜 돈 들이며 고생을 하나’ 싶다가도 우아한 발레 음악이 들리면 다시금 열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패션 학원에도 등록해 16개월 동안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 뒤 곧이어 서울시 창업스쿨에서 패션 창업 과정을 수강했다. 모델 워킹을 배워 시니어 모델로도 활동했다. 끼를 주체할 수 없어 각종 방송에도 얼굴을 내비쳤다.
새로운 꿈이자 직업도 생겼다. 수필가가 그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박애란 회원은 어릴 때부터 일기를 쓰며 필력을 키워왔고, 교직 생활 중에도 틈틈이 글을 썼다. 1992년, 야학 은사님과 통화를 마친 뒤 ‘서둔야학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겠다’ 마음먹은 그는 한동안 끼니를 거르며 집필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간의 경험을 살려 박애란 회원은 2018년 계간지 「문학의 강」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했고, 이듬해 서둔야학과 그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 「사랑 하나 그리움 둘」을 발간했다. 2020년에는 70세의 나이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마음먹으면 해내고야 마는 천성의 결과물이었다.
사랑과 지식에 굶주린 시대, 서둔야학은 박애란 회원에게 그 두 가지를 모두 채워주었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꿈이란 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도 알려주었다. 덕분에 그는 때 묻고 눈물로 얼룩진 시대를 ‘아름다운 날들’로 기억했다. 박애란 회원은 “인생은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는 전반생,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후반생으로 나눌 수 있다. 후반생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으니 마음껏 헤엄쳐 보라”라고 조언한다.
세상살이에 치여 잊고 살던 꿈은 없는지 생각해 보고, 더 늦기 전에 도전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박애란 회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케이 로고 이미지

2017 MBN TV의 교양 토크 쇼 ‘황금알’, ‘인생에 정년은 없다’ 편에 ‘고수’로 출연 중
"순수한 마음을 나누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한왕석 사무국장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현 농업생명과학대학교) 65학번 학생으로, 1965년부터 2년간 서둔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서둔야학에 대해 “교실 안에 정이 살아있던 곳” 이라고 정의한다. “특별한 교육철학은 없어도 우리에게는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학생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라고 자부한다. 6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기억 속에 박애란 회원의 모습은 또렷이 남아 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글솜씨가 뛰어난 학생이었다”라며 “서둔야학과 선생님들을 기억해줘서 고맙다”라고 지체 없이 이야기한다. 덧붙여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도 당부를 남겼다. “우리가 서둔야학을 ‘아름답다’라고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돕고 어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 마음속에도 ‘순수’라는 단어가 영원히 퇴색하지 않길 바랍니다.”


박애란 회원의 꿈을 열어준
前 서둔야학 교사 現 한국일보 사우회 사무국장 한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