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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과 회복을 통해 이루어가는
‘꽤 괜찮은 해피엔딩’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이지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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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셋, 갑작스러운 사고로 삶을 잠시 멈추었다. 음주 운전 차량이 덮쳐 심각한 화상을 입었고, 마흔 번이 넘는 수술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그는 멈춰 선 시간 속에서 희망을 길어 올려 평범한 일상을 회복했다. 많은 이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온 이지선 교수를 만났다.

글 정라희 l 사진 이명철 l 영상 이한솔

멈춰 선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희망

“이제는 사고와 헤어진 사람.” 이지선 교수가 쓴 책의 저자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으로 돌아가던 길, 예기치 못한 사고는 그의 온몸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음주 운전 차량이 덮친 교통사고로 심각한 화상을 입고 마흔 번이 넘는 수술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가족의 지극한 사랑에 힘입어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을 아픔 속에 가두지 않았다. 수십 번의 고통스러운 수술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찾아낸 소소한 행복과 감사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전에 제가 경험한 일들은 저나 제 주변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도, 실수도 아니었어요. 예고된 불행이었다면 어떻게든 막았겠죠. 저처럼 갑작스러운 사고를 겪거나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난 분이 많아요. 그럴 때 사람들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며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나쁜 일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거예요. 저 역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5년, 10년 뒤 먼 미래를 상상하는 건 너무 막막하고 힘든 일이었어요. 그래서 그저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자’라고 매일 다짐했습니다.”
누구나 과거를 돌아보면 후회가 남고, 미래를 내다보면 걱정이 앞선다.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절, 막막한 상황 속에서 그를 일으켜 준 것은 바로 ‘오늘’이라는 선물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눈에 보이는 많은 것을 잃었죠. 하지만 사라진 것들에만 연연하니 제 삶이 피폐해지더라고요. 병원에 있을 때 어머니께서 하루에 한 가지씩 감사한 일을 찾아보자고 제안하셨어요.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니, 환자복조차 제대로 입을 수 없던 시절에도 매일 감사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멘토인사이드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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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나를 만나는 회복의 여정

진통제로도 해결되지 않던 고통을 이겨내게 한 힘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이었다. 사고 이듬해, 그는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얀 모니터를 상담가 삼아 홀로 글을 쓰는 시간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를 되짚었다.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것을 기록하며 더 좋아질 내일을 기대하는 동안, 고통스러운 현실과 자연스레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글쓰기는 어느새 세상과 소통하는 또 다른 창구가 되어주었다.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을 깊이 돌아볼 수 있었어요. 제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차분하게 마주하는 시간이 마치 상담받는 것처럼 느껴졌죠. 글을 통해 힘들었던 저를 위로하고 다독일 수 있 었습니다. 글쓰기에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는 것을 제 경험으로 알게 되었어요.”
사고가 났던 2000년 7월 30일은 그에게 두 번째 생일이다. 사고 후 20년이 되던 날 아침, 불길 속에서 그를 구해 낸 오빠는 새로운 스무 살을 축하하며 “힘들고 아팠던 기억보다 기대하지 못했던 좋은 일과 행복한 기억이 점점 많아져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선물과 함께 보냈다. 5년이 더 흐른 지금, 이지선 교수는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멈춰 있는 순간에도 성장은 이루어진다

이지선 교수의 연구 분야 중 하나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다. 이는 장애인 복지와 아동·청소년 권리 연구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외상 후 성장이란, 극심한 역경을 겪은 후 개인이 경험하는 긍정적 심리 변화를 의미한다. 이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다. 그가 국내 20~30대 화상 경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연구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났다.
“저뿐 아니라 많은 화상 경험자가 고통과 상실의 시간을 지나며 성장을 실감했다고 답했어요. 특히 얼굴이나 손처럼 눈에 잘 띄는 부위에 화상을 입은 분들이 가족관계나 대인관계에서 더 큰 성장을 경험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행복을 더 깊이 느끼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더 잘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의 첫 책 『지선아 사랑해』의 핵심 메시지인 “삶은 선물입니다”라는 고백은 외상 후 성장의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마디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도 하고, 설령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려 노력한다. 어떤 사건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하지만, 회복의 여정에서 이전보다 더욱 단단하게 성장하는 사례도 많다. 나쁜 일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그 불행을 불행으로만 남겨둘지, 아니면 그 안에서 좋은 것을 끌어낼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멘토인사이드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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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길모퉁이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성장의 길목에서 조금 헤매는 듯해도, 좋은 일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중요해요. 제가 ‘사고를 당했다’가 아니라 ‘사고를 만났지만, 이제는 헤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거든요.”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나아가는 하루

이지선 교수는 “나쁜 일에서 긍정적 의미를 찾으려면, 외상 직후에 나타나는 스트레스에 잘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조언한다.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해소하고 자신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차분히 살피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나쁜 일이 단순한 불행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세 가지 노력으로 ‘의도적 생각의 되새김질’, ‘감정의 표현’ 그리고 ‘사회적 지지’를 꼽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돌아볼 때 새로운 삶을 살아갈 힘이 생기며, 믿을 만한 사람에게 고통과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회복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여기에 가족과 친구, 지역사회의 따뜻한 존중과 배려가 더해질 때 회복과 성장의 힘은 더 욱 커진다. 물론 그 과정이 언제나 순탄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그는 이 여정을 ‘여행’처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채워가기를 권한다.
“여행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길모퉁이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성장의 길목에서 조금 헤매는 듯해도, 좋은 일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중요해요. 제가 ‘사고를 당했다’가 아니라 ‘사고를 만났지만, 이제는 헤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거든요.” 이처럼 ‘멈춤’은 끝이 아닌 삶의 방향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지선 교수의 이야기처럼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순간에도 저 멀리 비쳐오는 빛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꽤 괜찮은 해피엔딩’에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케이 로고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