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성미 l 사진 성민하
글 이성미 l 사진 성민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메달을 획득한 이래 마라톤은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자부심이었다. 그 계보를 이어 김원식 회원은 1980년대 대한민국 마라톤을 이끌었다.
1981년 한국체육대학교에 스카우트되어 상경한 그는 이듬해 5월 전국종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1,500m 결승
경기에서 3분 50초라는 한국신기록을 수립했다. 이어서 1984년 3월 동아마라톤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1980년대에는 한국체육대학교가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태릉선수촌이 있었고요. 학교 울타리
너머로 태극마크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훈련하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저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손기정 선수 같은
마라토너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어요. LA 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인 동아마라톤대회에 나가 죽기 살기로
뛰어 3위로 골인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로 달릴 기회를 얻은 것이죠. 골인 후 기진맥진해 쓰러져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등을 어루만져 주시더군요. 뒤돌아보니 손기정 선생님이 서 계셨어요. 꿈만 같았죠. 지금까지 수많은 출발선에
서고 골인했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1984년 LA 올림픽 마라톤 국가대표로 출전한 그는 이후 국내외 대회에서 여러 차례 메달을 획득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고는 1995년 고향 전남 함평으로 돌아왔다. 선수 은퇴 후 육상 지도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지만, 그는 체육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상경했던 소년이 국가대표 출신 교사가 되어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셈이다.
1985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국내부 우승의 순간(왼쪽), 1984년 동아마라톤대회의 결승선 통과 모습(오른쪽)
1985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국내부 우승의 순간
1984년 동아마라톤대회의 결승선 통과 모습
김원식 회원은 전남 함평 나산고등학교와 나산중학교 등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하며 우수 선수를
발굴하고 지도해 전라남도 체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2014년부터는 진로진학 상담교사로 분야를
전환했다. 그가 진로진학 상담을 공부한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대한체육회가 발표한 ‘선수 경력자 진로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23년까지 은퇴한
운동선수들의 평균 실업률이 37.6%에 달했습니다. 취업자도 절반이 비정규직이었고요. 진로를 선택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을 묻자, 선수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답했어요. 어릴 때부터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왔기 때문에 경기장 밖의 세상은 모르는 것이죠. 은퇴해도 아직 20~30대인데,
앞길이 막막하다는 선수들을 보니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어떤 직업이 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가르쳐 은퇴 후를 고민하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돕고싶다’는 마음이 들어 진로진학 상담 교육을 공부했습니다.”
진로진학 상담교사로서 그는 학생들이 미래를 설계하도록 돕고, 인생의 중요한 가치와 교훈을
전달했다. 정년퇴임 후에도 여전히 진로진학 상담교사로 활동하는 한편, 육상 경험을 살려 교내 건강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한다.
장성중학교에 창단한 ‘에코러닝부’는 학생들과 함께 달리며 황룡강 인근 환경정화 활동을 병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김원식 회원은 “육상을 통해 학생들의 기초체력을 길러주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가르쳐주고 싶다”라며, “이는 학생들이 어떤 직업을 갖고 살아가든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교육 선진국으로 꼽히는 독일이나 핀란드에서는 체육 수업을 소홀히 하면 학부모가 강력하게
항의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체육 수업이 모든 활동의 기초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하려면
체력과 집중력, 끈기가 필요하고 이는 운동을 통해 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체 육은
입시 과목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과목으로 여겨집니다. 전 국민이 체육 교육의 중요성에
공감해 우리 학생들을 심신이 건강한 인재로 키워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좋겠습니다.”
김원식 회원은 코스 밖에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달린다. MBC ESPN(現 MBC SPORTS+)
해설위원으로 2007년 베를린 마라톤, 2008년 시카고 마라톤 등 국내외 주요 마라톤 현장을 생생히
전달했고, 2004년부터는 다수의 매체에 육상 칼럼을 기고하며 마라톤이 국민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랐다. 전국적으로 ‘러닝 열풍’이 부는 요즘, 김원식 회원은 다시 한번 한국 마라톤의 부흥을 꿈꾼다.
“마라톤 한국신기록은 2000년 이봉주 선수가 세운 2시간 7분 20초입니다. 벌써 25년 전 일이죠.
참고로 세계기록은 2023년 케냐 출신 켈빈 킵툼(Kelvin Kiptum) 선수가 세운 2시간 35초예요. 한국
마라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대목이죠. 따라서 마라톤 저변 확대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한편, 한국
엘리트 마라톤 선수들의 기록 단축을 위한 방안도 계속 고민할 계획입니다.”
기나긴 노후를 더 즐겁게 보내기 위해 김원식 회원은 하루 한 시간씩 조깅을 하며 건강관리를 한다.
최근에는 웃음지도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해 지역사회에 재능을 기부할 꿈도 키우고 있다.
“제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면,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다고 생각합니다. 21km를 달린 셈이죠.
지금까지는 속도를 내 달려왔다면, 앞으로는 주변을 둘러보며 즐겁게 달리고 싶어요. 은퇴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전국 교직원 여러분도 자기만의 레이스를 계속 이어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하지만, 김원식 회원의 삶은 그 비유를 넘어선 진정한 레이스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만을 위해 달리지 않았다. 선수 시절에는 ‘국민의 희망’을 가슴에 품었고, 교사가
되어서는 학생들의 꿈을 키우는 데 힘썼으며, 지금은 지역사회와 미래세대를 위해 달린다. 그의
레이스가 많은 이에게 영감이 되기를 바란다.